글/ 해안(海岸)
【정견망】
며칠 전 갑자기 뉴스를 보았는데 절강성 법화사(法華寺)에서 동영상 편집을 하는 사람을 초빙하는데 월급이 만 위안이 넘었다. 그곳은 내가 과거 생에 주지로 있으면서 수련하던 도량이었다. 지금 이렇게 돈을 벌기 위한 장사판이 되었으니 속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나의 법화사와 관련된 연분을 써내어 함께 하고자 한다.
대략 십년 전 어느 날이었다. 나는 동료와 함께 초청을 받아 남경 군구(軍區) 절강북부대(浙北部隊) 주둔지에서 학습교류를 진행했다. 그 부대는 장강 삼각주에 경제가 발달한 지역의 중임을 맡고 있었으며 군사 관제구에 속해 산 옆에 비록 고속도로가 뚫고 지나지만 군사용 차량이 아니면 일체 통행할 수 없는 곳이다. 군부대에 도착한 후 우리는 부대 군관의 열정적인 환대를 받아 호텔에서 배불리 먹었다. 나중에 군관 몇이 우리를 데리고 산허리에 있는 사격장에 가서 사격 연습도 했다. 각자 총을 들고 사격을 했는데 표지판이 매우 멀어서 몇 명의 군관도 대부분 사격표지를 빗나갔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시간이 좀 더 있어서 사람들은 자동소총 7발만 쏘고 떠났는데 나는 7발을 과녁 안에 다 맞춰 동료들 중에서 가장 점수가 높았다. 군관들도 나의 솜씨에 매우 놀라며 우수 병사라야 이런 점수를 낼 수 있다고 했다. 사실 나는 일개 서생으로 금생에 처음으로 실탄을 쏘아본 것이었다. 전생에 내가 항일 군대를 이끌고 오랫동안 싸웠기에 금생에 사격의 정확성이 많이 뒤쳐져도 여전히 일부 솜씨는 전생에서 따라온 것이다.
나는 태평한 연대에는 여러 생을 출가해서 수행한 적이 있고 난세에는 나는 여러 차례 장수가 되어 국가를 보위했다. 중화민국 난세의 직전 전생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손으로 군모를 벗고 새로 판 무덤 앞에 꿇어 앉아 사령관을 위해 슬피 울며 통곡하는 장면이었다. 그는 전사한 후 일본군에 의해 땅에 묻힌 항일 명장 장자충(張自忠 역주: 중화민국 육군상장으로 1891년 8월 11일~1940년 5월 16일. 일본군과의 전투 중에 포위되어 전사함.) 장군의 묘지였다.
당시 나는 장자충 장군의 부하로 그를 따라 남북으로 정벌을 다니며 함께 항일 전쟁을 했는데 몇 년간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번에는 뜻밖에도 사령관이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적을 방어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더니 마침내 전사하신 것이다. 나와 부하들은 부모를 잃은 심정처럼 마음이 아팠다.
금생에 이 일로 인해 꿈에서 울다 깨어나는데 이 글을 쓸 때 여전히 나도 모르게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 당시 국군은 비록 일본에 대한 항전에는 승리했지만 그 공로는 오히려 동굴 속에서 숨어지내던 공산군에게 빼앗겼다. 금생에 나는 여러 차례 장 사령관 묘지를 찾아가 제사를 올리려 했지만 줄곧 이루지 못해 너무나 유감이었다. 여러 번 이 글을 써서 기록을 남기려 했지만 글을 완성하지 못했다. 여기서 나와 일동은 용맹한 사령관 장 장군님께 경하를 드린다. 장자충 장군이여 천고에 길이 남으시길!
법화사는 남태호 주봉인 변산(弁山)의 동쪽 기슭에 있다[그곳에서는 백작산(白雀山)이라고 한다]. 대략 부대가 있는 산에서 10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역사에서는 남북조 시대 도적(道跡 역주: 달마대사의 제자)이란 비구니가 이곳에서 수행했다고 하며 매일 법화경을 염송하는데 20여 년을 밤낮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매번 도적 비구니가 경을 외울 때 늘 한 마리 하얀 참새가 옆에서 맴돌았는데 마치 조회에 참석해 법을 듣는 것 같았고 20년 간 끊이지 않았다. 현지인들이 신기하게 여겨 이 산을 백작산이라 고쳐 불렀다.
도적이 원적한 후 그녀의 제자가 유골을 보석함에 넘어 그녀가 늘 염송하던 산속의 집에 장사지내고 그 위를 청석판(青石板)으로 덮었다. 몇 년이 지나 신기하게도 갑자기 청석판에 사이에서 한 송이 푸른색 연꽃이 피어났다. 사람들은 비로소 도적이 원래 관음보살의 화신임을 알고 그녀를 장사지낸 곳에 ‘진신전(真身殿)’을 지었다.
전설에 따르면 양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이 절강 호주 백작산 도적 비구니의 일을 듣고는 직접 찾아와 참배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성지를 내려 지방관에게 백작에 법화사를 지을 것을 명했다. 동시에 한 가지 특수한 규정을 내렸는데 법화사에서 비구와 비구니가 함께 있도록 하되 비구는 앞에 비구니는 뒤에 서도록 했고 진신전은 오직 비구니만 공양할 수 있게 했다. 그때가 양무제 보통(普通) 3년이니 서기 522년이었다. 이후 법화사는 강남의 유명 사찰이 되었으며 강소 절강 일대에 믿는 사람이 많았다. 늘 버스를 대절하여 남경, 항주, 진강 등 먼 곳에서 참배하러 온 단체 참배객들이 많다고 한다.
부대와 교류를 끝낸 후 우리는 가는 길에 법화사를 방문했다. 사원의 산문에 들어가기 전 길 옆에서 손이 땅에 닿을 듯한 장애인에게 한번 속았다. 그는 내게 돈을 구걸했는데 불쌍한 마음에 몇 위안을 주었다. 하지만 사원을 나가서 다시 이곳을 지날 때 바닥에서 손을 끌던 그 장애인은 똑바로 서서 다른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원에 들어간 후 법화사에 대해 매우 익숙하고 다정한 것을 느꼈는데 인상이 가장 깊었던 것은 사원 맨 뒤에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관음대전이었다.
대전 밖에서 눈을 감고 한번 관망하니 자비롭고 상화로운 붉은 빛이 대전 안에서 밖으로 발산되어 나왔으며 확실히 좋은 관음의 도장이었다. 높은 곳에 있던 관음 대전에서 내려온 후 마당에서 우연히 이곳의 법화사 주지를 만났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나이는 50 정도 되고 얼굴이 마르고 길며 약간 검은 스님이었다. 우리는 몇 마디 나누었는데 그는 반복적으로 이곳의 관음보살이 매우 영험해 부탁하면 반드시 응답이 있다면서 내게 법화사 휘장을 하나 주었다. 그 뒤에는 금속으로 돌출된 네 글자가 있는데 유구필응(有求必應 구하면 반드시 응답이 있다)이었다. 사실 받고 싶지 않았으나 체면상 거절할 수 없어 받았다.
사찰의 주지는 통상 불법(佛法)과 인과(因果)로 중생을 교화하는데 법화사 주지가 여러 차례 강조한 것은 이 사원에 향불을 피우면 반드시 보답이 있다는 것이다. 아마 이런 선전으로 많은 향객과 시주를 끌어들이는 것 같았다. 구하면 응답이 있다는 것은 속인이 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어디 모두가 다 공허하다고 여기는 출가 수행인이 즐거워할 일인가? 사원의 산문을 나설 때 어느 70여세 된 노스님이 회색 승포를 입고 작은 승용차 속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알고 보니 법화사에는 그들의 승용차가 있었다. 진정으로 고생하며 수련하는 사원은 있으나 이미 매우 드물다.
법화사를 방문한 지 몇 년 후 나는 비로소 내가 전생에 법화사에서 수행했던 장면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60대 노화상이었는데 몸이 좋지 않아 혼자 나의 선방에서 거의 누워 지내다시피 했다. 한 젊은 승려가 공경하게 내 곁에서 있었는데 나는 그에게 사원의 일을 어떻게 하라고 분부했다. 지난 세 나의 도제였던 그 젊은 화상은 금생에 뜻밖에도 나의 학생으로 나타났다.
어느 동료 노교수가 곧 퇴직할 때가 되었는데 그가 데리고 있던 박사과정 학생이 선택한 과제는 매우 복잡한 공정 설계와 계산 문제였다. 그는 정력을 들여 1년 넘게 공부했고 많은 국내외의 관련 연구문헌을 참고했지만 스승이나 학생 둘 다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나중에 나에게 상의하며 그를 도와 졸업시켜 달라고 했다. 사실 그들이 맡은 과제는 내가 연구하던 방향이 아니었으나 그저 약간 관련이 있었다.
자신을 지도하던 교수는 퇴직을 앞에 두었고 선택한 과제는 전혀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박사과정을 졸업시킬 방법이 없으니 지도교수가 퇴직하면 자신은 학교에서 쫓겨날 판이었다. 그 학생은 내가 자기를 도와주지 않을까 봐 양주를 사들고 내 사무실로 와서 간절히 부탁했다. 나는 안심하라고 하며 우리는 인연이 있으니 가능하면 돕겠노라고 했고 양주는 받지 않았다. 나중에 2, 3개월 정도 시간이 걸려 내 밑에 연구하는 학생이 되었다. 복잡한 설계 문제는 연속적으로 해야 했다. 나는 그를 데리고 여러 번 철야를 하는 등 1년이 넘는 각고의 연구 끝에 그는 마침내 박사를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 교수가 되었다.
나는 법화사에서 있었던 전세의 불연(佛緣)을 이 학생에게 알려주었다. 그가 나의 학생이기 때문에 뭐라 반박하기는 어려웠으나 신고하지는 않았다. 비로소 그가 전혀 믿지 않음을 알았다. 그는 학교에 남게 된 후 즉시 연구비를 신청했고 대출을 받아 집을 사며 온갖 방법으로 돈 벌 궁리만 했다. 결혼해서 자녀를 갖는 등 속인의 자취가 만연했다.
이 젊은 화상이 어찌 금생의 복은 지난 세에 수련해선 온 것임을 알겠는가! 이 화상이 금생에 다시 나를 만난 것은 어쩌면 그가 전생에 스승의 은혜를 생각해 다시 나를 따르겠다는 발원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쫓으려는 것이 세속의 학식과 지위가 아니라 불법 수행임을 망각했다. 세세생생 세월이 너무 오래되다 보니 혜안이 깊지 않아 속세에 길을 잃고 본심을 잊었으니 정말 애석하구나!
여러 해 전 출장으로 개봉에 갔을 때 대상국사(大相國寺)를 참관한 적이 있다. 상국사는 한때 황실의 사원으로 매우 웅장했다. 대웅전 대문 밖 양쪽에 길게 늘어선 선반에는 각종 구슬, 염주, 불상, 걸이 등 여행 기념품이 잔뜩 펼쳐져 있었다. 보아하니 일하는 사람은 승복을 입은 젊은이인데 불교 용품을 팔며 나더러 기념품을 사라고 권했다. 그더러 상국사에서 몇 년을 수행했는지 물었더니 그는 자기는 스님이 아니며 일하는 직원이라고 해서 나는 좀 놀랐다. 또 더 놀라운 것은 몇 마디 나눈 후 그는 상국사 주지스님이 공산당원이라고 했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묻자 현재 사원의 주지는 모두 당원이며 당원이 아니면 주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 사무 관리국의 규정이며 주지는 모두 종교국 위원회에서 파견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아연했다!
사원의 주지들이 어찌 모두 정치 승려로 변해 버렸단 말인가? 그러나 이런 일은 또 정리(情理)중에 빠져 있다. 재작년 전국 불교협회 회장인 학성(學誠)법사가 많은 여인들을 성추행한 혐의로 고소당했다. 도처로 다니며 설법한다는 소위 ‘고승대덕’(高僧大德)이자 전국 불교를 이끄는 우두머리 대화상이 이와 같으니 그 외 수많은 고만고만한 사찰들의 혼란상은 말할 필요가 없다. 말법시기라 진짜 부처님은 절에 있지 않고 많은 사원은 이미 마귀의 자손들이 점거했으나 중생은 깨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604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