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송보람(宋寶藍)
【정견망】
명나라 말기에 어떤 사람이 기이한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문천상이 나타나 자신에게 어떤 일을 부탁했다고 한다. 송나라 말기부터 명나라 말기까지 시간간격이 360여 년에 달한다. 이 기이한 꿈은 후인들에게 두 왕조에 걸친 인연을 통해 나라는 망했을지라도 충혼(忠魂)은 여전히 남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공명함을 말하고 있다.
원나라 지정(至正) 11년(1275년) 원 세조 쿠빌라이가 백안(伯顏)을 파견해 대군을 이끌고 송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원나라 대군이 국경을 압박해오자 남송의 권신 가사도(賈似道)는 어쩔 수 없이 13만 금군(禁軍)을 이끌고 나가 싸웠다. 하지만 원나라 군대의 기세는 파죽지세였고 각 전장에서 송나라 병사들은 죽거나 항복했다. 심문을 받은 가사도는 전처럼 사람을 파견해 매년 세폐(歲幣 역주: 남송 조정에서 원나라 측에 해마다 세금처럼 바치는 공물)를 제공하고 평화를 사려 했으나 백안에게 거부당했다.
《송감(宋鑒)》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듬 해 가사도는 관직에서 쫓겨났다. 우승상 진의중(陳宜中)이 유악(柳岳)을 사신으로 파견해 평화를 구했으나 백안에게 거부 당했다. 나중에 또 상주를 올려 육수부(陸秀夫), 여사맹(呂師孟) 등이 낭가알(囊加歹 원나라 장수)과 함께 원나라 진영을 찾아가 신하를 자칭하며 매년 세폐를 바치는 조건으로 화의를 청하도록 했다. 하지만 백안이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송나라가 과거 천하를 얻을 때 어린 아이(후주의 마지막 황제 시종훈이 8세였다)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았으니 지금 또 어린 아이(남송 공제 6세)의 손에서 천하를 잃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그러니 평화협상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진의중은 어쩔 수 없이 태후에게 상서를 올려 원나라에 표문을 올려 작은 땅이라도 봉해달라고 요청하게 했다. 태후도 어쩔 수 없이 이에 동의했다. 하지만 학사원의 당번 대신인 고응송(高應松)은 이런 식의 항복 표문의 초안을 작성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진의중은 다시 명령을 내려 경국관(京局官) 유최연(劉裒然)에게 초안을 쓰게 했다 나중에 유악 등이 표문을 갖고 출발했으나, 고우(高郵 지금의 강소성 고우시)의 혜가장(嵇家莊)에 이르렀을 때 의민(義民) 혜용(嵇聳)에게 피살당했다.
혜용은 본래 평범한 향민(鄕民)에 불과했지만 뜻밖에 조정이 투항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이 일에 분개해 과감히 떨쳐 일어나 이런 일을 한 것이다. 청나라 때까지 혜용의 후손들은 여전히 혜가장에 살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송나라 때의 이 역사가 지워질 때쯤인 명말(明末)청초(淸初)가 되었다. 이때 나만상(羅萬象)이란 사람이 기이한 꿈 때문에 과거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명나라 때 추밀원(樞密院) 대신이었던 나만상은 사람됨이 청렴하고 강직해서 아첨을 몰랐고 업무처리가 공평타당했으며 사람을 관대하게 대했다. 그는 일찍이 천장현(天長縣 지금의 안휘성 천장시) 현령을 지낸 적이 있는데 업무성과가 탁월해서 현민들의 칭송과 사랑을 받았다.
그러다가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신해 중원을 차지한 후 나공(羅公)은 성문향(城門鄉)에 은거하며 자호를 호빈여객(湖濱旅客 호숫가의 나그네란 뜻)이라 했고 평소 고깔모자와 짚신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때로 논밭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다니다 만나는 농부들마저도 그가 일찍이 현령이었음을 잊고 지냈다. 나공은 평소 사람들에게 근면하게 농사일과 양잠을 하도록 권했고 또 공익을 위한 학교를 세워 향민의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꿈에 푸른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그를 초대하며 말했다.
“주인님께서 저를 파견해 당신을 맞이하라 하셨습니다.”
나공이 그를 따라 함께 가보니 어느 붉은 대문 집으로 들어갔는데 전각이 웅장하고 장엄하면서도 화려했다. 주인이 직접 전각에서 나와 그를 맞이했다. 서로 인사를 나눈 후 각자 자리에 앉았다. 나만상이 보니 주인의 모습은 마치 왕과 같았고 녹색 옷을 입었는데 구슬이 달린 신발을 신은 채 긴 수염을 날리고 있었다.
주인이 나공에게 말했다.
“나는 이 지역에서 제사를 누리고 있지만 사당에서 제비를 뽑을 때 쓰는 첨시(簽詩)가 너무 조잡하고 비루해서 마치 목동이 무지하게 하는 말과 같네.”
주인은 나공이 당대의 인재임을 알고 그에게 몇 편의 새로운 시를 써서 더 빛내주길 원했다. 나공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응답하고는 몸을 돌려 작별을 고했다. 그가 막 문을 나오는 순간 단번에 꿈에서 깨어났다.
나공은 이를 꿈속에 환상을 본 것이라 여겼다. 또 증거로 삼을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믿을 수 없다고 여기고는 개의치 않았다. 이튿날 저녁 그는 또 같은 꿈을 꾸었는데 그 왕이 다시 한 번 그에게 간청했다. 나공은 깨어난 후 아주 이상하게 여겼다.
하루는 나공이 우연히 성안에 있던 성황묘(城隍廟)를 유람하다가 정원에 보이는 계단의 굴곡이 마치 꿈속에 본 것과 같았다. 그러다가 담벽에 적힌 첨시들을 보니 과연 비속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나공은 본래 양명학을 숭상하는 까닭에 꿈속에서 왕이 부탁한 첨시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날 밤 나공이 막 잠들어 꿈을 꾸는데 두 시종이 나타났다. 모습은 고대의 관원과 같았다. 두 사람이 나공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빨리 가시오, 빨리 가! 주인께서 당신을 기다리신 지 이미 오래되었소!”
나공이 빨리 그들을 따라가서 보니 궁전 위에는 여전히 전에 보았던 그 왕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세 번째 만남에서 왕의 얼굴은 노기(怒氣)로 가득찼다. 그는 나공에게 왜 글재주를 아껴 몇 수의 시를 지으려 하지 않는가라며 질책했다. 말투가 아주 엄숙하면서도 또 날카로웠다. 나공이 감히 거절의 말을 하지 못하고 왕의 부탁을 받아들여 곧장 초고를 쓰겠노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왕의 노기 띤 얼굴은 여전했다. 이때 마침 옆에 또 한 명의 관을 쓴 손님이 있었는데 긴 수염에 흰 얼굴이 마치 왕의 막료처럼 보였다. 그가 옆에서 나공을 위해 간절히 사정하자 왕의 노기가 비로소 조금 누그러졌다.
나중에 관을 쓴 사람이 나공을 대전 앞까지 환송했고 서로 손을 맞잡고 작별인사를 했다. 나공이 그에게 본관과 성명을 묻자 그 사람이 대답했다.
“송나라 때 어떤 사람이 투항하는 표문을 지닌 대신을 죽인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나라오. 호수 맞은편에 큰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서 책을 읽거나 밭을 가는 이들은 모두 나의 자손들이라오.”
나공이 놀라서 물었다. “그럼 저 왕은 대체 누구십니까?”
그러자 그는 조용히 하라고 손짓하면서 손으로 나공의 손 위에 ‘문산상국(文山相國)’이라는 4 글자를 썼다. 그의 말뜻은 자신은 혜용이며 왕야는 바로 신국공(信國公) 문천상(文天祥)이란 뜻이다.
나만상이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난 후 마침내 목욕재계한 후 단번에 30수의 시를 썼다. 문사(文辭)가 수려하면서도 고상하고 아주 우아했다. 그는 이 원고를 가지런히 옮겨 쓴 후 조각상 앞에서 불태웠다. 그런 후 또 목판 위에 써서는 성황묘 대전의 벽에 걸어놓았다.
동시에 그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기이한 꿈을 통해 알게 된 내용에 대해 상세히 기술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과거 남송 시기 문천상과 그의 문객 두허(杜滸) 등이 난리 통에 원나라 진영을 탈출해 진주(眞州)로 갔다가 관아에서 체포령이 내리자 밤새 양주(揚州)로 도주했다. 이때는 이미 사경이 넘었다. 양주 성문 밖에 이르러 사람들이 “제대(制台 총독 관서)에서 문승상을 체포하란 명령이 떨어졌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문천상은 당시 의미 혜용의 명성을 듣고는 말고삐를 혜가(嵇家)로 향했다.
혜용은 문천상 일행을 맞아들인 후 집안에서 편히 쉬게 했으며 또 아주 면밀하게 시중을 잘 들었다. 문천상은 이에 큰 감동을 받았고 감개의 눈물을 흘렸다. 나중에 혜용은 가산을 팔아 건장한 젊은이들을 모집했고 또 자신의 아들과 문객들을 파견해 문천상을 태주(泰州)까지 안전하게 호송했다. 또 배를 타고 남송 망명정부가 있던 복건(福建)까지 도달하게 했다.
문천상이 생전에 이 지역을 지나갔기 때문에 사후 이 지방의 성황신이 된 것이다. 어쩌면 두 사람 사이에 생사의 사귐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혜용은 사망한 후 문천상의 막료가 되었다.
청나라 문인 선정(宣鼎)이 일찍이 이 지역 성황묘를 노닐다 문천상의 조각상을 본 적이 있다. 그가 보니 대전 중앙에 문천상의 조각상이 서 있었고 옆에 있던 혜공의 조각은 유생의 옷을 입은 채 엄숙하게 앉아 있었는데 영웅협객의 풍모가 살아 있는 듯 늠름했다고 한다. 명나라가 멸망한 후 나만상이 은거한 지역이 바로 혜공의 고향이었으니 아마도 나공, 문천상, 혜공 3인의 마음이 서로 의기투합했을 것이다.
이 신기한 이야기는 시간적으로 송말원초에서 명말청초까지 2개 왕조를 거치며 세 분 명사들의 서로 교차된 인연을 말하고 있다.
자료출처 : 《야우추등록(夜雨秋燈錄)》 5권. 이 책은 청나라 말기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선정(宣鼎)이 지은 문언소설이다. 총 8권에 115편으로 자신이 보고 들은 신기한 이야기들을 정리했다.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2/18/n11878678.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