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소련(小蓮)
【정견망】
머리말: 윤회기실(輪回紀實) 시리즈를 다시 쓰면서 나는 이전과 비교하여 돌파가 필요했다. 이번에 더욱 중시하는 것은 일부 역사의 수수께끼에 대한 바른 견해[正見]이다. 일체가 ‘법을 위해서 왔다’는 주제를 설명하면서 윤회의 현상을 배합해 설명하면서 사람들에게 그 가운데 감수가 있게 하려는 것이다.
1970년대에 발견된 진시황의 병마용(兵馬俑)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사람들은 대진(大秦)제국의 방대한 군사력에 경탄하는 동시에 당시 국가의 군대의 장비를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도용(陶俑 도기로 만든 인형)은 규모가 방대할 뿐 아니라 각각의 조각이 전부 다르다. 이는 매우 보기 드문 일이다. 병마용을 소개하는 글은 인터넷에 많이 있으니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찾아보기 바란다. 여기서는 지면의 제한으로 많이 말하지 않겠다.
병마용은 진시황 능묘의 일부분이며 지하에 2천 년이 넘게 잠들어 있었다. 사서에도 관련된 기록이 없으니 기이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에 사람들은 병마용이 진시황 능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진시황 이전의 어느 태후를 수호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었다. 나중에 많은 병기에 ‘상방 여불위 제조(相邦呂不韋造 역주: 상방은 상국으로 재상을 뜻한다)’라는 글자가 발견되어 논쟁이 가라앉았다.
위키 백과 자료에 근거하면 진시황릉은 기원전 246년~208년에 건설되어 총 39년이 걸렸다. 고고학 전문가들의 고증에 따르면 이들 진용(秦俑 진나라 병마용)은 같은 시기 산물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간단하게 옛날로 돌아가 당시 병마용을 만든 이유와 그 과정을 살펴보자. 진시황은 사람을 죽여서 묻는 잔인한 순장제도를 폐지한 후 자신이 죽은 후에도 생전과 같은 위엄을 누리고 싶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진시황의 마음에 남을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했다.
진시황은 하늘(上天)이 배치한 화하(華夏) 중심지대를 통일한 최초의 제왕이므로 그가 무엇을 하든 전부 후세에 대해 말하자면 일종의 개창(開創)이었다. 예컨대 화폐 와 도량형의 통일, 분봉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한 등이다. 비록 영토는 후세 왕조만큼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후세의 통일 왕조는 모두 진 제국이 개창한 영토에 기초해 발전한 것이다.
진시황은 신선과 도(道)를 찾길 좋아해 전국을 주유했다. ‘법가(法家)’의 방식으로 국가를 다스렸으므로 가짜 방사에 대한 처리는 가차 없었다. 이것도 후인들이 ‘갱유’를 잘못 전하게 된 원인 중 하나다.
사실 병마용을 만드는 아이디어는 당시 세간에 오래 은거하던 득도한 어느 고인(高人)이 낸 것이다. 한번은 진시황이 함양 궁궐의 후원에서 놀고 있을 때 갑자기 마음이 번민이 생겨 신변에 있던 사람들을 다 물리치고 혼자 잠시 머물러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대진제국의 휘황함을 백대까지 전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는 과거 6국이 자신에게 소멸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 자기 나라도 어쩌면 자신이 죽은 후에 다른 나라에 의해 멸망당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한때 말한 “2세, 3세,… 무궁하게 전한다”는 말을 웃음거리로 여겼다. 이후 진 왕조는 겨우 진이세(秦二世)까지 전하고 멸망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말한 것은 자신의 혈맥이 아니라 제왕의 체제와 국가제도를 말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가 개창한 휘황한 기업(基業)이 쉽게 훼손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이런 휘황을 미래에 남겨놓을 것인가 생각했다. 그가 미래에 남겨놓을 것은 당시 대진 제국과 자신의 휘황함이 아니라 신의 조화를 펼쳐내고 싶었다.
춘추시대는 바로 ‘예악(禮樂)이 붕괴’된 시대였다. 그래서 공자는 평생 주례(周禮)를 복원하려고 애썼다. 그대로 사회가 발전해가면 사람들의 도덕이 저하될 것이고 그럼 어떻게 그때의 사람들이 전통을 찾아 도덕을 수습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진시황이 이런 문제를 사고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 세상 밖 고인이 나타나서 말했다: “당신께서 개창한 공업(功業)은 많은 이들의 이익을 빼앗았기 때문에 이제 당신이 떠난 후 많은 사람들이 전력을 기울여 파괴하고 욕하게 될 것입니다.”
진시황은 이 말을 듣고는 담담히 말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관건은 여러 해 이후 사람들이 공적을 부수고 실물이 없을 때 만일 어떤 사람이 지금 시기를 회상하려 해도 방법이 없을 겁니다.”
고인이 웃으며 말했다.
“황상의 뜻은 제가 잘 알았습니다. 당신께선 여러 해 여러 왕조를 지난 다음에 모든 환란과 모욕이 시간이 지나 담담해진 후 사람들이 다시 진정으로 당신이 개창한 일체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 이 단락 역사의 진실한 표현을 찾고 싶어도 찾기가 매우 어렵단 말씀이지요.”
진시황이 이 말을 듣고는 탄식했다.
“그렇습니다. 장래의 사람들은 그 때가 되면 어떻게 할까요?”
그 고인이 말했다.
“제가 도우(道友)들과 방법을 좀 생각해보겠습니다.”
진시황은 손으로 포권(抱拳 주먹을 말아쥐는 예법)하며 말했다.
“고인께서 제 뜻을 이뤄주시기 바랍니다.”
“1년 후에 돌아와서 결과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시황제가 말했다.
“좋습니다.”
사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득도한 신선이 방법을 생각하는데 어떻게 1년이나 시간이 필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말을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고인이 돌아간 후 그는 많은 도우를 찾아가 함께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상의했다. 이때 한 도우가 이 일의 연유를 듣고는 말했다.
“내가 알기로 과거 헌원황제(軒轅黃帝)께서는 산속에서 구리를 채굴해 신선이 되는 술법을 연마한 후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천고에 증거를 남겨놓으셨네. 헌원황제는 5천년 중화 신전 문명을 개창하셨고 지금 황제(진시황)가 개창한 국가정치제도는 앞으로 2천년 제왕의 시대를 열 것이네. 이런 것들은 모두 최후에 창세주(創世主)께서 인간세상에 대법을 널리 전하시도록 준비를 하는 것이지.”
이 말을 들은 고인이 다시 진시황이 당초 자신과 나눈 대화를 생각해보니 진시황의 말에는 확실히 그런 뜻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럼 우리 함께 방법을 생각해서 그를 도와줍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함께 방법을 생각했다. 진나라 당시의 정황을 결합해 지상에서 기술을 관리하는 신들을 불러(목공조각, 진흙, 야금, 도기 제조 등에 관련된 많은 신들) 말했다.
“당신들이 방법을 생각해 진 왕조의 면모를 일부나마 당신들의 방식으로 미래에 남기게 하시오.”
이들 신들이 상세히 연구한 후 최후에 도기를 관리하는 신이 책임을 맡았다. 왜냐하면 도기는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어서 그것이 오직 부서지지 않기만 하면 천년이 지나도 썩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의 이치는 바로 “병사가 천하를 다투고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라 능묘 둘레에 병사들이 진으로 둘러싸는 방식으로 진나라의 휘황과 위의(威儀)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었다. (인형, 말, 전차 등 각종 방식의 도기)
그 후 또 일부 토지를 관리하는 몇몇 신들을 불러 그들에게 진용(秦俑)의 장래 작용이 매우 거대할 것이므로 잘 보호하게 했다. 한명의 토지신이 보호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더 높은 층차의 보다 많은 신들이 함께 보호해야만 가능했다.
많은 일에는 모두 기연(機緣)이 필요하고 또 기연의 요소를 성취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이에 각 방면의 신선들이 각종 연분을 이용해 제작, 매장, 보관, 출토 등 각종 자세한 부분에 일일이 세세하게 안배했다.
안배를 다 끝낸 후 세외(世外)의 이 고인은 1년 후 다시 진시황 앞에 나타나 진시황에게 알렸다. 도기를 이용해 지하군단을 만들면 된다고 했다. 또 진시황에게 어떻게 도기를 제작할 것이며 언제 매장할 것인지 누구를 불러 책임지게 할 것인지 자세한 사정을 알려주었다.
진시황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으며 명령을 내려 제작을 지시했다. 제작과정 중에 각지의 우수한 도공이 다 참여했다.
우리는 고고학 발굴을 통해 발굴된 작품은 기본적으로 진짜 사람을 본 따서 만든 것임을 알고 있다. 겉에는 각종 색깔의 선명한 안료를 발랐다.
그림에서 보다시피 애초 진용(秦俑)이 처음 제작되었을 때 그 위에 각종 안료를 발라서 보기에 몹시 예뻤다. 이런 선명한 색채의 배합 역시 모두 신이 직접 점화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당연히 전반 병마용 제작 과정 곳곳에는 모두 신의 점화와 뜻이 체현되었다.
오늘날 병마용이 출토되었을 때 채색은 몇 분 내에 점차 벗겨지고 사라졌다. 병마용 안료가 공기 속에 드러나면서 산화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병마용을 제작한 과정 중에 표면적으로는 토용 제작의 책임과 질을 명확히 제고하기 위해 옷소매 등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 도공의 이름을 새겨 넣었고 어떤 경우 지명까지 적었다.
사실 신전문화(神傳文化)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중화 민족은 성씨가 매우 많다. 매 성씨는 매우 긴 역사 연원이 있고 대부분 휘황한 역사가 있다. 아울러 많은 성씨는 조상의 교훈이 있다. 이 점은 유력하게 후세 자손들의 행위를 규범하며 특유의 성씨 문화가 되었다. 이것이 보편적으로 말하면 사실 이름을 남겨 내려온 도공 그 사람의 공덕은 매우 크다. 많은 경우 오늘날 창세주께서 직접 전하시는 법을 얻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도용(陶俑)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신이 의도적으로 안배한 것으로 그들이 도용을 제작하는 과정에 창세주와 연분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들 도용이 완전히 지하에 묻힐 때 매우 높은 층차의 한 여신이 와서 이 장면을 보고는 신통으로 다른 신들을 소집했고 이 신들을 도용 내에 주입해 수호신으로 삼았다.
미래 사람들에게 있어 이런 실물을 통해 전통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창세주께서도 여기에 대해 많은 안배를 하셨다.
그 매우 높은 여신은 어린이 모습을 띤 한 신을 두 손으로 안아 궁정 장인이 제작한 하나의 도용 속에 직접 집어넣었다. (금생에 이 어린이가 출생했을 때 엉덩이 한곳에 둥근 몇 가닥 푸른 태기가 있었는데 바로 당시 남겨 내려온 것이다)
이때 월광보살(月光菩薩 사실 이 신은 보살 층차를 아주 멀리 초월한다. 다만 당시 월광보살로 있었기 때문에 이 이름으로 대신 부른다)이 여신에게 말했다.
“제가 이곳에서 그를 잘 보호할 것입니다. (어린이 모양의 신)”
그러자 여신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어린이 모양의 신이 궁정 장인이 제작한 병마용에 주입될 때 여신이 말했다.
“사실 진조(秦朝)의 일체가 만약 주나라 문화를 이어받고 다지지 않았더라면 많은 것은 그리 성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는 이 궁정 장인이 제작한 도용에 들어가야 한다. 이를 연분으로 하여 장래 우리가 다시 만날 인연이 있을 것이다.”
사실 병마용에 많고 많은 부동한 신의 요소가 주입되어 있다. 직접 병마용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침범 당하거나 또는 다시 햇빛을 보기 전에 큰 파괴가 일어나 후세인들이 진면목을 똑똑히 보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그 어린이 모양의 신이 일으킨 작용도 이와 같다.
비록 이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세상의 이치는 상생상극이라 많은 나쁜 신들이 병마용이 미래에 남겨지는 것을 꺼려 온갖 방법을 다해 파괴하려 했다. 심지어 그런 사악한 신이 직접 와서 교란하려 했다. 그것들은 도기가 쉽게 부서지는 특성을 이용해 이들 도용을 부수려고 망동하기도 했다.
이것은 물론 바른 신[正神]의 눈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어린이 모양의 그 신과 마찬가지 작용을 하는 다른 신들이 가만있지 않았고 함께 그 사신(邪神)과 큰 싸움을 벌였다. 그 결과 어린이 모양의 신은 왼쪽 태양혈 약간 아래의 귀와 뺨부위를 한번 얻어맞았다. 다행히 월광보살이 제때 달려왔고 그들을 도와 사신을 물리쳤다. (금생에 이 어린이가 막 출생했을 때 왼쪽 태양혈 아래에 귀와 뺨 사이에 성인 손톱만한 푸른 태기가 있었다)
나머지 사정은 여러분이 다 아는 것과 같다. 비록 이곳에서 전란이 빈발했지만 신은 최대한도로 진 제국을 표현하는 이런 유물이 보존되어 내려오도록 했다.
후세인들이 병마용의 일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병마용을 완전히 봉할 때 신은 신통을 운용해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 철저히 지워버렸다. 그래서 이 한 무리 도용(陶俑)은 사람들에게 망각되었고 매몰되어 사서에도 기록이 전혀 남지 않게 된 것이다.
1974년에 이르러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임동(臨潼) 하하촌(下河村)의 한 농민이 우물을 파던 도중 병마용이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었다. 어린이 모양의 신도 이 때문에 이 병마용의 “신체”에서 벗어나 다른 몸으로 전생했다.
많은 중대한 고고학적 발견은 모두 그 시기에 출현한 것이며 기공 역시 이 시기에 출현했다.
병마용의 발견은 돈을 중시하던 중국인들에게 다시 한 번 2천 년 전 중국인의 풍채와 지혜, 초(超)고급의 과학기술이 있었음을 알게 했다. (병마용 구덩이 발견 당시 토용에 눌려 굽어진 오래된 검이 토용을 옮기자 검이 즉시 원상태를 회복했다. 이런 검을 만드는 형상기억 합금은 현대 과학의 산물이며 2천여 년 전의 사람이 어떻게 이런 기술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진정으로 오성(悟性)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제국(秦帝國)에 대해 완전히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 병마용은 신이 주입되었기 때문에 수많은 신의 내포와 광채가 발현할 수 있는데 바로 어느 한 생명이 어떻게 대하는가를 본다. 더욱이 그 도용을 제작한 공예수준의 우수함과 핍진(逼眞 역주: 진짜와 같음)함에 대해선 말할 나위도 없다.
1990년대 초 파룬궁(法輪功)이 중국 북방에서 널리 전해지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이미 28년간 전 세계에 널리 전해졌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세외의 고인은 지금 대법제자로 전생했다. 그녀가 작년에 서안을 지나며 내게 병마용 사진을 주었을 때 나는 깜짝 놀랐고 또 감개가 무량했다.
또 층차가 높은 여신은 이번 생에 역시 대법제자가 되었다. 내 생각에 그녀가 병마용 앞에 서면 분명 온갖 정서가 교차할 거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녀는 닫혀서 수련하지만 종전의 기억이 완전히 다 지워진 것은 아니라서 이런 것들을 보면 분명 친근함과 책임감을 느낄 것이다.
그 어린이 모양의 신은 금생에 여전히 어린이인데 눈구석에 싸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월광보살은 금생에 미용사가 되었는데 이 아이가 출생한지 얼마 안 되어 그를 보러왔다. 금생에 월광보살과 아이의 부친은 원래 전혀 모르던 사이였다.
이 수련자들이 사명에 욕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잘하기 희망한다. 동시에 일반 독자들도 중국 고대 신전문화를 정확히 인식해 무신론의 족쇄를 타파하고 진정으로 역사의 진상을 알기 바란다.
바로 다음과 같다.
진나라 병마용의 법연 천년을 끌며
견증을 남기기 위해 길게 잠들길 원했네.
오늘날 출토되어 햇빛을 보니
사명을 실현하고 다시 인연을 잡누나.
秦俑法緣千年牽 진용법연천연견
爲留見證願長眠 위류견증원장면
今朝出土見天日 금조출토견천일
兌現使命再攀緣 태현사명재반연
주: 마지막 구절의 뜻은 문화를 다지고 진용(秦俑)을 보호할 책임을 완성하였고 현재 다시 연분을 소중히 여기고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해야 할 일을 잘해야 한다는 뜻이다.
설명: 1 본문은 누가 역사상 어떻게 대단하거나 휘황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혀 이런 목적을 위해 쓴 것이 아니다. 평범해 보이는 보통 사람이 역사상 아마 글 속의 주인공보다 백배나 더 휘황했을 수 있다. 나는 주인공의 경력을 예로 들어 역사상 일어났던 한가지 진실을 설명할 뿐이다. 목적은 수천 년 묵은 수수께끼를 푸는 동시에 사람들더러 정신(正信)・정념(正念)을 수립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또 이를 통해 지금 정사(正邪)대결 중에서 자신의 위치를 선택하게 하기 위함이다.
부록: 진시황릉 병마용 규모
진시황릉에 배장한 병마용 구덩이로 1호는 남쪽에 있고 동서 길이 216 미터, 폭이 62미터, 면적이 1만 3260 평방미터에 달한다. 2호 갱은 동서 길이 124미터, 폭 98미터, 면적은 6000 평방미터, 3호 갱은 면적이 520평방미터다. 모두 합해 출토된 병마용이 800개, 나무 전차 18량, 도기 말이 100여 필이다. 병마용을 현재 있는 배열형식으로 추산하면 이 세 갱의 무사용(武士俑)은 아마 7000개, 전차 100량, 전마 100필 가량 될 것이다. 도용 하나의 크기는 보통 1.8미터 정도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61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