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德惠)
【정견망】
명대(明代) 관리 요사인(姚思仁)은 자가 ‘선장(善長)’이고 호가 ‘나부산인(羅浮山人)’이다. 절강성 수수(秀水 지금의 가흥嘉興)사람이다.
명 가정(嘉靖) 26년(1547년)에 태어나 숭정(崇禎) 10년(1637년)에 사망했다. 90살까지 장수했고, 관직은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이르렀다. 그는 다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법률에 통달해 《대명률부례주해(大明律附例注解》)》를 지었고, 한의학 서적 《녹죽당집험방(菉竹堂集驗方)》을 편찬했다. 이 책은 명나라 황실 비방 5백60여 개를 모아 주치, 배오(配伍), 약물의 포제(炮制), 약제 제작방법, 복약 금기 등을 열거하고 그 치료효과를 간단히 기록했다. 모두 요사인 본인의 임상 검증을 거친 것으로 후세를 위해 풍부한 의학 자료를 남겼다.
요사인은 사망 후 가흥에 묻혔고, 그의 무덤은 현지의 명승고적이 되었다. 무덤 뒤에 정원이 있고, 삼면은 강에 면해 있고, 정원에는 사당과 동산이 있다. 꽃과 나무가 무성하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늘 푸르러 매년 탐방객이 많았는데, 1960년대 중공에 파괴되었다. 지금의 홍파로(洪波路)와 홍흥로(洪興路)가 만나는 곳의 북쪽 땅이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요사인의 개인적인 이력이 아니라 그가 겪은 신기한 일이다.
만력 40년(1612년) 봄, 병이 들어 집에 돌아와 휴양하던 중, 요사인은 꿈속에서 목숨을 받으러 오는 사람을 보았다. 그해 6월 어느 날, 그는 비몽사몽 상태에서 한 사자가 와서 전령을 전하며 장관(長官)이 그를 불러오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창졸간에 그는 다른 생각 없이 일어나 얼른 관복을 입고 도보로 사자를 따라갔다. 길가의 경치는 이승의 세상과 같았다.
얼떨결에 관아에 도착하니, 남루한 옷차림을 한 열여섯 명의 억울한 죽은 귀신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피를 뚝뚝 흘리며 몰려와 목숨을 구걸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저승에 왔음을 알았다.
요사인이 이들이 뭐 하는 귀신이냐고 묻자 저승사자가 말했다.
“그들은 당신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산동 사람들이다.”
요사인이 해명했다.
“내가 산동 순무(巡撫)를 지낼 때, 직책에 따라 책임지고 사형수의 처형을 허가한 적은 있지만 이 사건들은 모두 사법관이 정죄하고 사형을 선고한 것으로 나는 단지 절차를 이행하고, 마지막에 서명하고 비준했을 뿐이다.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귀신이 뒤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한데 모여 그를 쳐다보았다.
사자가 그를 큰 건물로 데려가자 염왕(閻王)이 큰 탁자 뒤에 앉아 있었고, 주위에는 많은 시위들이 있었다. 요사인은 얼른 공손히 절을 했지만 염왕은 오히려 그를 외면했다. 이어서 염라대왕이 말했다.
“너는 왜 그렇게 죽이기를 좋아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 지금 너를 찾아 목숨을 갚으라고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요사인이 대답했다.
“저는 천자를 대신해 법을 집행했을 뿐입니다. 이 사람들은 스스로 법률을 지키지 않아 사형당한 것입니다. 저는 20년 동안 벼슬을 하며 한 사람도 헛되게 죽이지 않았다고 자신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목숨들이 빚을 받으러 왔을까요?”
염라대왕은 선악을 기록한 책자를 꺼내 가져오라고 명령하고는 오랫동안 보고는 말했다.
“너는 판단을 결정하는 자로서 아래 관원이 만든 억울한 사건을 다 살피지 않고 허가했다.”
요사인이 해명했다.
“저는 성지(聖旨)를 받들어 조사를 하기 때문에 전체 국면을 살펴봐야 하지만 사건의 구체적인 경위를 자세히 따져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이 말했다.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관직을 지내면서 하늘의 호생지덕을 느끼지 못하고 인명을 초개같이 여긴 것은 죄가 있다. 비록 네가 고의로 한 것은 아니지만, 불찰의 죄이다.”
요사인은 염라대왕이 자신에게 유죄판결을 내리자 자신이 하남에 있을 때 선행(善行)을 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얼른 말했다.
“세상의 선악은 저승 장부에 기록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왜 제가 한 선행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까? 제가 하남을 다니며 조사한 후 조정에 상소를 올려 3만 냥의 구조금을 내려 목숨을 건진 이재민들은 수만이 넘습니다.”
염라대왕이 기록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이는 주로 당시 실무를 맡은 하찬연(賀燦然)의 공로다. 하찬연이 구조금을 청구하는 초고를 썼고, 그의 권유로 조정에 구휼을 구하는 글을 올린 것이다.”
이어 염라대왕은 기록을 들쳐보고는 말했다.
“이 선행에 대한 기록에는 하찬연의 공이 9, 요사인의 공은 1이라고 적혀 있다.”
요사인이 말했다.
“비록 그가 극구 권했고 상소문도 하찬연이 초고를 잡았지만 제가 아니라면 어떻게 상소를 황제께서 보았겠습니까? 만약 이 때문에 황제가 진노한다면, 벌을 받는 것도 저지 하찬연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염라대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 그렇다면 이 선행은 너와 하찬연의 공이 반반이다. 너의 공과(功過)가 상쇄되었으니, 이승으로 돌려보내라.”
그러자 그를 데리고 온 사자가 문밖으로 밀어냈다. 요사인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고 곧 침대에서 깨어나 자신이 저승에서 돌아왔음을 깨닫고 서서히 병이 나았다. 당시 하찬연의 자는 백암(伯闇), 호는 도성(道星)으로 승승장구하다가 나중에 이부원외랑이 되었다.
요사인의 이렇게 다른 공간에 가서 재판을 받고 공과가 상쇄돼 인간 세상으로 풀려난 이야기는 원신(元神)이 몸을 떠난 전형적인 사건이다. 이 일은 사람에게는 원신이 있고, 원신이야말로 인간의 진정한 생명임을 말해주는 것으로 무신론은 잘못이다.
또 다른 공간에서는 인간의 선악은 모두 기록되며 선에는 선한 응보가 있고, 악에는 악의 응보가 있다. 물론 선과 악은 일정한 상황에서 공과(功過)가 서로 상쇄될 수 있다.
요사인은 산동 순무로 있을 때 비록 억울한 사건을 일으킬 의도는 없었지만, 악한 관리가 만든 억울한 사건을 자세히 검토하지도 않고 쉽게 서명하여 승인했기 때문에 그도 죄가 되었다. 죄악의 사슬에는 각 고리의 가담자가 죄악이고, 억울한 사건을 직접 저지른 죄악, 직접 집행한 죄악은 물론,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부주의로 서명만 한 상급자도 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요사인은 이 사건의 죄과가 작지 않았지만 다행히 큰 선행이 빚어낸 공덕이 있어 면죄부를 받고 이승으로 돌려보내졌다.
요사인의 경험과 교훈은 어떤 이유든, 어떤 부분이든 죄악은 당신이 관여했다면 당신은 유죄이고, 죄가 있으면 선행으로 상쇄될 수 있으며, 노력하여 공을 속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중공은 무신론을 이론의 기초로 삼아 보응을 믿지 않는데 물질적 힘만 미신한다. 지금은 더욱 돈과 권력만 탐내고 있다. 이런 사악한 이념에 사로잡힌 중공 통치하에서는 거의 탐오하지 않은 관리가 없고 억울한 사건이 도처에 널려 있다. 크고 작은 관리들이 거의 중공의 죄질에 휘말려 민중의 도덕성도 추락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중공은 정말 사람에게 많은 해를 끼쳤다.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중공은 물론 그 구성원들은 장차 천벌을 받을 것이며 주살당하고 소멸될 것이다. 그렇다면 파룬궁 수련생들이 중공 조직을 탈퇴하라고 권하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것 아닌가? 미래에 하늘에 의해 소멸되지 않고 살아서 역사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큰 공덕이 아닌가!
그리고 파룬궁은 진정한 불법(佛法)이었지만 중공 사악의 박해를 받았다. 이 단계에서 그들의 신앙을 존중하고, 파룬궁 수련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박해를 면하고, 파룬궁의 진상과 탈당을 알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적덕행선(德德行善)의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들이 모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역사를 거울삼아 요사인의 경험과 교훈을 기억하고 최선을 다해 선행하기 바란다. 이는 단지 과거 자신이 모르고 저지른 각종 죄업을 상쇄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덕을 쌓고 아름다운 미래를 얻게 할 수 있다.
자료출처: 《회원獪園》, 《덕육고감(德育古鑒)》, 《감응유초(感應類鈔)》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5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