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객
【정견망】
막 갓난아기를 출산한 한 젊은 부부가 겪은 신기한 일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산모는 어릴 때 귀여운 사모예드 강아지를 키웠는데, 강아지는 늘 그녀와 함께 자랐고 그녀의 인생에서 충실한 동반자가 되었다. 알다시피 개의 수명은 사람보다 짧아서 12살 되던 해에 개가 죽자 부부는 몹시 슬퍼했다. 그런데 한 달도 안 돼 아내가 임신했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고, 열 달이 지나 귀여운 아기를 낳았다. 아기의 출산은 가족들을 기쁘게 했고 당시 아기의 몸에는 특별한 표시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 아빠는 아이의 왼쪽 손목에 검은색 모반(태어날 때부터 지닌 짙은 반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모반을 보고 그들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망한 개의 왼쪽 앞발에도 이와 똑같은 표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돌아왔구나?”
두 사람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태어난 아이의 몸에서 죽은 반려동물과 같은 모반이 발견되는 이런 일이 적지 않은데 꼭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는 없다. 일부 아이들은 실제로 죽은 반려동물이 전생[轉生 역주: 육도윤회 중에서 돌고 돌아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흔히 환생(還生)으로 번역하는데 이 경우 인간 세상에 다시 돌아왔다는 의미가 강해 육도에서 윤회 전전하는 원래 뜻이 희석될 수 있다]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육도윤회(六道輪迴)를 말하는데, 육도 속의 생명체들은 서로 전생(轉生)할 수 있는데 전세(前世)의 업력에 따라 천신도(天神道), 인간도(人間道), 수라도(修羅道), 축생도(畜生道), 지옥도(地獄道) 및 아귀도(餓鬼道)로 전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 축생도를 말하자면, 축생이란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한 모든 지각 있고 자의식이 있는 생명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식물은 유정(有情) 생명과 무정(無情) 물질 사이의 생명이라고 보는데 자의식과 고통과 즐거움에 대한 감각이 없기 때문에 축생도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실 식물도 감정을 지니고 있는데 지금 식물학자들이 이미 일련의 실험을 통해 이점을 증명했다.
어떤 생물학자가 채소에 측정기를 연결하고 끓는 물로 그 잎을 데치자 민감한 기기에 즉각 식물이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는 신호가 반영되었다. 또 식물의 잎을 세게 뜯어도 기기에서 즉시 급격한 전위차가 나타나는데, 이는 사람이 팔다리에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격렬한 고통을 당할 때 나타내는 신호와 같은 것이다. 이 실험은 식물에게도 ‘통증’이 있음을 반영한다. 만약 곧장 마취제를 투여하면 즉시 진정되었다.
더 많은 실험 결과는 관련 문장들을 참조할 수 있는데 실험을 통해 식물도 감각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감정이 있으며, 심지어 눈이 있고 청각까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식물은 축생도에 속하며 여기서 축(畜)은 동물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식물 등의 생물을 가리킨다.
축생의 특징은 탐진치(貪瞋癡)인데 즉 탐욕스럽고, 쉽게 분노하며, 우매해서 다만 동물의 본성에 따라 행동한다. 축생도의 절대다수 중생(衆生)은 생존이 매우 어려운데 생존경쟁, 약육강식으로 생명에 대한 보장이 없다. 한 생명이 생전에 많은 살육을 저질렀다면, 가볍게는 축생도에 떨어져 다른 생명에게 죽임을 당해 업채(業債 업의 빚)를 갚아야 하고, 심하면 지옥도(地獄道)에 떨어져 반복적으로 형벌을 받아 업채를 다 갚은 후에야 다음 단계로 진행할 수 있다.
사람이 만약 무정하고 의리가 없으며 이지(理智)가 없고 아주 이기적이며 자신의 정욕을 함부로 한다면 축생도로 떨어지기 쉽다. 또 애완견으로 태어난 생명은 종종 다음 세(世)에 사람으로 태어나기 쉽다. 왜냐하면 개는 온순하고 주인에게 충성스럽고 또 야생 동물처럼 다른 작은 동물들을 사냥하기 위해 살업(殺業)을 거의 짓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의 운명이 다 하는 날 주인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이런 소망이 있다면, 주인집에서 사람으로 태어나도록 배치될 수 있다.
한 생명은 그가 전세(前世)에 동물이었다고 해서 그의 원신(元神)도 동물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아마도 그 이전 한 세(世)에 천인(天人)이었을지 모른다. 정말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지금 이 말법(末法)시기의 말겁(末劫)시기에 사람으로 전생할 수 있는 이들은 내원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작은 공능이 나오기만 하면 남들의 전생을 봐주길 좋아하는데 그것은 모두 정확하지 않다. 사람의 전생은 너무나도 많은데 그가 본 것이 어느 한 세(世)에 남긴 정보인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오직 아주 높은 층차까지 수련해 본원을 거슬러 올라가 본 것만이 진상(真相)이다. 진정으로 이런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모두 보지 못하게 하는데 불교에서도 이런 것을 대단히 기피했고 보지 못하게 했다. 왜냐하면 누구도 이 사람이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파괴하러 왔는데 말법시기에 많은 마(魔)들도 사람으로 전생했다. 만약 이를 말해준다면 이 사람은 아주 거대한 심적 부담이 생겨 수련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사람으로 전생하면 전세(前世)의 기억이 지워지는데 이는 사람에게 새로 태어나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내력이 어떻든, 만약 정말로 파괴하러 온 사람이라도, 금생에 불문(佛門)에 들어갔다면, 그럼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는 아마 세상에 내려오기 전의 임무를 계속할 수도 있고, 또는 강대한 정념으로 그것을 부정할 수도 있다.
축생 노릇을 하기는 매우 힘들다. 사람들은 개로 태어나면 아주 좋다고 생각하는데, 역할을 바꿔서 생각해 보라! 당신 몸에 땀샘이 없는데 한여름에 두꺼운 솜옷을 입는다면 괴롭지 않겠는가? 만약 상갓집 개라면 더욱 고생스러운데, 매일 배불리 먹지도 못하고, 쓰레기 더미에서 먹을 것을 찾아야 하며, 여기저기 다니며 욕을 먹는다. 가장 무서운 것은 그것의 미각이 의도적으로 일부분 폐쇄되어 냄새나는 것을 맡기만 하면 고소하게 여기고 똥 먹는 것도 좋아한다.
사람이 만약 청성(淸醒)한 상태라면 감히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야생동물로 전생하면 시시각각 기아에 시달려야 하고 도처에서 생존 위기에 처해 몇 달 안에 자립을 배워야 하고 늙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만약 초식동물이라면 그래도 업을 덜 짓겠지만, 육식동물이라면 생존을 위해 다른 작은 동물들을 계속 사냥해야 하기에 끊임없이 업을 짓는데 다음 세(世)에 다른 작은 동물로 전생해 다른 맹수들에게 사냥당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민간에 미친 여자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갑자기 미쳐서 자신을 잔혹하게 해치고 한겨울에 홑옷을 입고 한여름에는 솜옷을 입으며 말똥을 맛있게 갉아먹었다고 하셨다. 이것은 사실 고급 생명이 사람의 업을 없애는 한 가지 방법이다.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고생을 겪게 하고 업을 갚는데 이런 사람들은 종종 아주 빨리 업을 다 갚을 수 있고 이어서 공능이 나올 수 있다.
개의 일생은 모두 이런 상태이니, 그것이 얼마나 많은 업력을 갚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개가 사람으로 전생하는 일을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다. 동물이 사람으로 전생할 수 있고, 사람 역시 동물로 전생할 수 있다. 사람이 늘 나쁜 짓을 하고, 빚을 지고도 갚지 않고, 남을 때리고 욕하면, 그가 빚을 갚을 수 있도록 원수의 집에 가서 소, 말, 양, 돼지 등으로 전생할 수 있다. 전세(前世)에 얼마의 돈을 빚졌다면, 금생에 일을 해서 그만큼의 돈을 갚아야 한다. 그가 이전에 어떻게 남을 때리고 욕했다면 금생에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얻어맞고 욕을 먹어야 하는데 조금의 오차도 없다.
동물은 전생한 후 흔히 사람처럼 기억을 지우지 않기에 전세에 남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금생에 이런 꼴이 된 것임을 기억할 수 있다. 때문에 대부분의 가축들은 아주 순종적이다. 그것이 있는 공간에서 그것더러 이런 이치를 볼 수 있게 해서 빨리 빚을 갚게 한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동물은 수련할 수 없는데, 그것은 나쁜 짓을 하면 보응을 받는 것을 볼 수 있기에 자발적으로 나쁜 짓을 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진심에서 우러나와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또 한 가지 이유는 동물에게는 사람의 선량한 본성이 없기 때문에 높이 수련하면 곧 마(魔)로 들어가 사람을 해칠 수 있다.
수진 작품(修真作品 도를 닦는 것을 주제로 하는 작품)에서 묘사한 바에 따르면 천겁(天劫 하늘의 겁난)을 당하는데 하늘이 벼락을 쳐서 그것을 죽인다. 고서(古書)에 따르면 몇백 년에 한 번씩 겁난을 겪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피할 수 있으면 다음에 또 겁난이 있고, 피할 수 없으면 혼백이 분리된다. 큰 나무 속에 숨어 있는 동물은 벼락에 맞아 쪼개지기 쉽다. 어떤 사람들은 벼락 맞은 나무가 액막이를 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동물이 여기에서 죽었기에 남겨진 정보가 그것과 유사한 부류들을 두렵게 만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직 사람만이 수련할 수 있고, 또한 오직 미혹 속에서만 수련할 수 있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전세(前世)에 수많은 시련을 거쳐 얻어 온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수십 세(世)에 걸쳐 고생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오늘날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천년에도 만나기 힘든 이 기회를 절대적으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6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