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객(過客)
【정견망】
불교(佛敎)에서는 인간 세상의 고통을 총 여덟 가지로 총괄하는데 태어나는 고통, 늙는 고통, 병드는 고통, 죽음의 고통,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미워하는 이를 만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과 오음[五陰 역주: 흔히 오온(五蘊)이라 하며 사람을 구성하는 5가지 기본 요소인 색온(色蘊),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을 가리킨다.]이 치성한 고통이다.
지금 사람들은 흔히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말하면서 더 이상 그것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일종 자연법칙으로 이해한다. 몸이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고통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이 고통인 이유는, 이 신체(身體)가 있음으로 인해 태어나는 순간부터 온갖 불편함과 고통을 겪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왜 태어나면서 우는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추워도 안 되고, 더워도 안 되며, 배고파도 안되고, 배가 너무 불러도 안된다. 어쨌든 이 신체가 있으면 곧 당신이 고생을 겪어야 한다.
늙는 고통이 고통인 이유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우리 몸의 기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장기 기능도 쇠약해져서, 행동이 불편해서 고통이 생기기 때문이다.
아프면 얼마나 불편한지 누구나 다 아는데 병으로 인한 고통은 아주 분명하다. 여기에는, 신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시달림도 포함된다.
생명이 끝나면서 초래되는 고통을 죽음의 고통이라 한다. 사람들은 다음에 윤회하는 방향이 불확실한 것을 두려워한다. 혹시 지옥에 떨어지진 않을까? 나쁜 사람은 종종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정말로 좋은 사람은 흔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쁜 사람은 평소에 하늘도 땅도 두려워하지 않다가도, 죽을 때가 되면 필사적으로 죽음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는 죽기 직전 저승사자(鬼差)가 쇠사슬을 들고 자신을 잡으러 오는 것을 보고 또 그의 살아생전 적들이 여귀(厲鬼 사나운 귀신)로 변해 옆에 서서 복수하려고 안달하는 것을 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을 이별의 고통이라 한다. 육친, 친구 또는 배우자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은 육체적 고통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고통은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이나 사물을 만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가신 이웃을 만나거나, 혐오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 등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은 우리가 종종 말하는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은 그 의미마저 변이되어, 보통 모종의 결과를 얻는 것을 몹시 바라는데 사용한다. 구해도 얻지 못한다는 본래 의미는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거나 실현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때 느끼는 고통과 상실감이다.
오음이 치성해서 생기는 고통은 마치 불에 타는 것만큼 맹렬하다. 오음은 오음(五蔭)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당한데 이것은 본성(本性)을 가리는 다섯 가지 욕망과 나쁜 관념 및 사상업력을 말한다. 그것들은 사상 속에 살아 있으며 사람을 조종해 나쁜 일을 하고 업을 짓게 만든다. 수련인은 늘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고 그것들을 배척해야 한다.
사람으로서 우리는 늘 이러한 고통을 피할 수 없고 늘 이 신체의 각종 감각에 속아 넘어간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나면서부터 마찬가지로 고통을 받기 때문에 또 특별히 고통스럽다고 느끼지 않는다. 사실, 천상(天上)에서 볼 때 사람은 대단히 고통스럽다. 설사 자신은 행복하다고 여기는 부유한 사람들조차 마찬가지로 고통스럽다. 왜 고통스러운가? 행복하면 더는 해탈을 생각하지 않게 하는데, 원하는 모든 것을 얻고, 행복하고 아름다우며 신체도 건강하다면, 그는 이곳이 천국이라 여길 것이다. 무슨 수련을 말하면, 가소롭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흔히 막다른 길에 도달했을 때에야 인생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에 비하면 천인(天人)은 훨씬 행복하다. 그들은 비록 신체를 지니고는 있지만 신체가 지니는 모든 고통에서 자유롭다. 그가 있는 그곳에서는 거의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는다. 모든 고통은 다 그보다 낮은 등급의 생명이 감당한다. 소비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당연하다. 하지만 천인은 모두 자신이 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갖고 있다. 그는 농사를 지을 필요도 없고, 길가에서 달콤한 과일을 따기만 하면 된다. 마치 우리 인류의 원시 사회 상태와 매우 유사하지만, 차이점은 그에게 물자가 아주 풍부해서 무엇을 원하면 그것이 있고 무엇을 생각하면 그것이 있다.
삼계(三界) 내에서는 모두 고생을 겪는다. 사람이 보기에 천인(天人)이 행복하게 보이지만, 더 높은 층차에서 천인을 보면 역시 고통스럽다. 천인의 고통은 바로 너무 행복한 것에 있다. 근심이 없으면 수련할 방법이 없다. 수련이란 바로 모순과 마난 속에서 심성을 제고하는 것인데, 그가 있는 곳에는 겪을 고생이 없고, 이웃과 화목하며, 배고프면 길가에 음식이 널려 있다. 그들은 날마다 어떻게 하면 즐겁게 지낼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천인이 제거하지 못한 마음은 오만심이다. 다른 사람을 얕잡아 보는데 만약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뛰어나면 곧 질투심이 생긴다. 대각자(大覺者)는 천상에도 규정이 있다고 했는데 질투심을 버리지 않으면 정과(正果)를 얻을 수 없다.
질투심은 흔히 같은 계층, 같은 집단, 같은 직장, 비슷한 무리 중에서 비교적 심각한데 예를 들면 동창생이 그렇다. 누가 자신보다 나으면 불평하고, 비꼬는 말을 하며, 배후에서 상대를 넘어뜨리려 한다. 이런 마음은 우주 특성과 완전히 어긋나는 것으로 수련인들 사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데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영원히 삼계를 떠날 수 없는데 그쪽 공간을 오염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이것이 바로 천인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약간의 부족으로 공을 이루지 못하게 된 원인이다.
어떤 독자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지금 이곳의 실외 온도는 12도지만, 난방을 하면 실내 온도가 24도가 됩니다. 이치적으로 따지자면 이 온도에서는 반팔 옷을 입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래도 두꺼운 실내복을 입어야 따스함을 느낍니다. 이건 심리적인 영향인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가요?”
우리 공간에서 온도계를 측량하는 표준은 이치상 고정불변인 것으로, 온도는 확실히 그 온도지만, 인체마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온도가 있는데 그것의 표준은 끊임없이 변한다. 겨울에 날씨가 추워질수록, 벽을 비롯한 주변의 모든 것이 열을 흡수하기 때문에 사람은 춥다고 느끼고, 여름에 날씨가 더워지면 주변의 모든 것이 열을 방출하기 때문에 사람은 덥다고 느낀다.
같은 온도와 습도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춥다고 느끼고, 어떤 사람은 덥다고 느낄 수 있는데 사람에 따라 편차가 매우 크다.
말하자면, 사람의 감각은 일종의 가상(假象)이고, 사람의 행복 역시 가상이다. 사람이 자신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면 행복감을 느끼고, 자신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하면 고통을 느낀다.
지옥이란 공간에서 그곳의 고통은 마음에 따라 연화된[隨心而化] 것이다. 그곳의 중생은 늘 시시각각 고통 속에 있다. 땅은 모두 빨갛게 달군 숯으로 뒤덮여 한 걸음도 내딛기 어렵고, 하늘에는 사나운 독수리가 날아다니며 언제든지 사람의 눈을 쪼아 먹을 수 있으며, 덤불 속의 풀은 모두 날카로운 칼날과 가시가 있고, 차가운 바람이 더해지면 배고프고 불편한데, 어렵사리 곰팡이 핀 빵을 발견하지만 그것을 먹고 나면 입속에서 숯으로 변하는 등등. 지옥에서는 사람이 생전에 무엇을 두려워했으면 그것이 이루어진다. 뱀을 두려워하면 어디에나 독사가 있을 것이고 개를 두려워하면 어디나 사나운 개가 있을 것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무간지옥(無間地獄)인데, 그곳에서는 고통이 쉼 없이 계속된다. 일반적인 고통은 한동안 괴로워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지만, 그곳은 다르다. 고생을 겪는 것에 간격이 없고, 지속적이며 쉼이 없다.
이것은 필자가 사람을 놀라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의 정상적인 상태다. 만약 그곳 생명들이 마음속으로 후회하고 선념(善念)을 낸다면, 그들이 겪는 고통은 훨씬 완화될 것이다. 애석한 것은 이곳에 온 사람들은 누구도 좋은 사람이 아니다. 많은 생명이 마음에 더욱 원한(怨恨)이 생겨 더 가중된 징벌을 받는다.
누군가 말했다.
“당신이 내게 지옥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 말을 믿을 수 없소.”
사람은 바로 미혹의 공간에 있고 이 신체가 있기에 눈은 오직 이 공간의 물체만 볼 수 있고 천당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한다. 또한 지옥의 두려움도 볼 수 없다. 정말로 지옥을 볼 수 있을 때 후회한다면 이미 늦을 것이다.
여기서 유명한 일화 하나를 살펴보자. 어떤 학자가 회의장에서 사람들에게 신(神)은 절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청중들이 그의 말이 이치가 있다고 느꼈을 때, 그는 더 큰 소리로 신을 도발했다.
“신이시여, 만약 당신이 정말 영험하다면, 이 많은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내려와 저를 죽여보십시오. 그럼 우리가 당신의 존재를 믿겠습니다!”
그는 몇 분간 엄숙하게 기다렸지만,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곧 청중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여러분이 보셨다시피 신은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때 한 부인이 일어나서 말했다.
“선생님, 당신 이론은 아주 훌륭하고 학식이 풍부한 분입니다. 저는 단지 시골 아낙일 뿐이라 당신을 반박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제 마음속의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신(神)을 믿어 왔고 아주 행복했습니다. 저는 또한 성경 읽기를 좋아하는데 읽을수록 더 깨달음이 있고 제 마음속이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은 제가 죽었을 때 신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때 이 세상에서 제가 잃은 것은 무엇일까요?”
학자가 생각해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인, 내 생각에 당신은 조금도 잃을 것이 없습니다.“
농촌 부인이 다시 학자에게 말했다.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제 마음속에 또 다른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이 죽을 때, 만약 당신이 정말로 신이 존재하고 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무엇을 잃을지 묻고 싶습니다.”
학자는 한참을 생각했지만 말문이 막혔다.
사람의 행복은 흔히 오래가지 못한다. 설사 평생 행복하다 해도 천상에서 보자면 한순간일 뿐이다. 백 년 후에는 다시 윤회에 들어가야 한다. 전생에 모든 복을 다 써 버렸기 때문에 다음 생에는 구걸조차 하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 사람이 만약 복이 없다면 남는 것은 그저 고통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은 왜 그렇게 잘 사냐고 말한다. 그것은 그에게 아직 다 쓰지 않은 복이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도(道)는 공정한 것으로 단지 사람의 일생일세(一生一世)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본다. 일부 나쁜 사람들이 나쁜 짓을 많이 저질렀지만, 아무도 그들을 징벌하지 않는다. 천상의 고급 생명은 그가 너무 가련하다고 본다. 늘 나쁜 짓을 해서 복이 점점 줄어들고, 업력은 점점 더 커지는데 이 자체가 우주 규율이 그를 징벌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를 징벌하려 하지 않는데 복이 없으면 곧 지옥에 떨어질 때가 된 것이다.
서양의 한 어린 소녀가 이런 질문을 했다.
“왜 신은 나쁜 사람을 징벌하지 않고 좋은 사람에게 상을 주지 않으시나요?“
누군가 대답했다.
“신은 좋은 사람을 좋은 사람이 되게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좋은 사람에게 주는 가장 큰 상이란다. 또 악인(惡人)이 악인이 되게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그들에 대한 신의 징벌이란다.”
고층차에서 보면, 좋은 사람은 끊임없이 덕(德)을 쌓아 미래에 사람 몸을 얻을 것이다. 기연(機緣)이 있어서 불법(佛法)을 만나 수행할 기회가 있으면, 언젠가 삼계를 벗어날 수 있다. 반면 나쁜 사람들은 계속해서 죄를 짓고 미래에는 지옥에 가서 고통을 겪을 뿐, 영원히 벗어날 날이 없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이 되는 자체가 바로 가장 큰 상이다.
사실, 나쁜 사람에 대한 징벌은 그들에 대한 자비(慈悲)다. 징벌을 받은 후, 업력의 일부는 없어지지만, 원신(元神)이 완전히 소각되진 않는다.
수련인이 마(魔)를 제거하고 도(道)를 지키는 것은 당연히 할 일이다. 당신이 이 층차에서 마땅히 할 일을 하면 되는 것으로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하되 구함이 없어야 한다. 당신이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으로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것은 또 우주 법칙이 평형을 이룬다. 당신에게 약간의 덕마저 없다면 마땅히 갈 곳이 있을 것이다. 아울러 당신 사람의 생각에 따라 어떻게 생각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정말 그렇다면 모든 것이 이미 끝장났을 것이다. 이외에 강렬한 목적을 품고 이 일을 하는 자체가 바로 집착이고 사람 마음이며 수련인은 오직 사람 마음이 없이 참여할 때라야만 비로소 가장 큰 법력(法力)을 발휘할 수 있고 내심이 더 평온할수록 힘은 더 크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늘 사람 마음이 섞여 있는데 심지어 사랑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무사(無私)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럼 그는 왜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잘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여전히 사(私)가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을 구하는 각자(覺者)의 사랑만이 순수한 것으로 그것이 곧 자비다.
고생을 겪으면 소업할 수 있다. 하지만 수련하지 않으면 한편으로는 고생을 겪으면서 다른 한편 업을 짓는다. 그럼 그는 줄곧 삼계 속에서 윤회하게 되는데 어디로 윤회하든 늘 고생을 겪는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한 가장 큰 사랑은 바로 그를 윤회에서 벗어나도록 이끄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 널리 퍼진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사람을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수련대법(修煉大法)이다. 파룬따파 제자들은 세간에서 진상(真相)을 전파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세상 사람에 대한 자비로운 구도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40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