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전 기억을 일깨워준 “대당고리(大唐鼓吏)”
작자: 대륙 대법제자
【정견망 2008년 4월 3일】
신운(神韻)예술단의 아름다운 신년만회 공연을 보면서 나는 매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대당고리(大唐鼓吏)”는 더욱 그랬다. 한번은 “대당고리” DVD를 보는데 그 장엄한 북소리가 한번 울리자 천지가 울리는 것 같았고 바로 마음에 닿아 순간 천년 전의 옛 전장–금사탄(金砂灘)으로 나를 데려가 깊이 잠든 천년 전 기억을 일깨워주었다. “양(楊)씨 가문은 진충보국(盡忠報國) 대송(大宋)을 지키고 있는 힘을 다해 싸우다 금사탄에서 전사하다.”
비장하고 처참하며 처량한 슬픔이 가슴속에서 솟구치며 눈물을 그칠 수 없었다. 양씨 가문의 충렬은 비장하고 처량하며 슬픈 감동을 불러 일으켜 내 마음 깊은 곳에 이미 응고되어 지울 수 없는 천년의 기억이 되었다.
북송(北宋)의 명장 양업(楊業)과 사태군(佘太君)의 넷째 아들 양사랑(楊四郎)은 비록 육랑(六郞 양연소)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매우 총명하고 영준했으며 문무를 겸한 일대 명장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극은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그는 그 생에 비극적인 인생을 마쳤다.
금사탄 전투에서 양사랑(楊四郎)은 악전고투 끝에 포로가 되었고 요(遙)나라의 소(蕭)태후가 승리했다. 포로로 잡힌 사랑은 소태후의 장막 앞에 끌려가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태후가 사랑을 본 후 마음에 들어 항복을 받고 싶어 간단히 심문한 후 투항할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 이때 사랑은 일생 중 가장 어렵고 고통스런 선택을 했다. 만일 비분강개하여 죽임을 당하면 무장으로서 충신의 본분을 다하는 것으로 양씨 가문의 충의와 영웅의 기개를 더하게 될 것이니 지극히 간단한 일이었다.
양씨 가문에서 전해진 가르침에 따라 사랑은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은 대송을 마음에 품고 깊이 염려하여 설사 포로로 잡혀 죽음을 기다릴지언정 마음만은 여전히 어떻게 요나라를 멸망시킬 것인지 계획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개인의 명예를 포기하고 차라리 천년의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이 낫다고 결정했. 그래서 거짓으로 투항해 요를 멸하고 진충보국하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비분강개하여 충성을 다하는 것은 쉽고 욕을 참고 숨어들어가 보국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사랑이 이렇게 거짓으로 투항한 것은 수련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신이 멸시하는 “특무”의 행위였다. 그는 소태후와 요나라를 멸망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큰 죄를 지었다. 소태후는 사랑에게 높은 벼슬을 내리고 애지중지하던 딸을 시집보냈다. 소태후의 두터운 사랑, 아내의 은혜, 양씨가문, 대송에 대한 생각 등으로 양사랑은 극심한 고통과 모순에 빠져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기쁜 표정을 지었지만 내심의 고통은 찢어지는 듯했다. 특무 행위는 그의 마음을 심하게 뒤틀리게 했으며 송나라와 양씨 가문을 위해 구차하게 살아남아 나중에 결국 요를 멸했으나 태후와 아내에게는 부끄러웠다. 늘 미친 듯이 말을 달리고 술과 음악을 대해 비분강개하여 포로를 죽이지 못하며 정정당당하게 장군이 되지 못함을 한탄했다. 후세인들이 비록 “사랑탐모(四郎探母)” 라는 노래를 전하지만 이때 양사랑은 오히려 고통 속에서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천년 후 다시 중국에 온 나는 어려서부터 비뚤어진 성격과 변이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사랑의 내응으로 요나라는 참패했으며 소태후는 자살을 강요당했고 일대의 유명한 태후의 혼은 서쪽으로 날아갔다. 국가와 가문이 패망하자 소태후의 딸은 눈물을 흘리며 몹시 비참했다. 매번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감상에 젖어 비탄을 느꼈으며 태후에게 부끄러워 천 년간 죄를 짊어졌다. 멀리 그때를 생각하면 소연연(萧燕燕)의 미모는 경국지색이었으며 소태후의 권력 역시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유능했고 계략도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천군만마를 지휘함에도 침착하기 그지 없었다. 그녀는 사태군과 함께 송-요의 쟁패에서 큰 역할을 했다. 요나라 태종의 총애와 문무장수들의 신뢰를 받았고 딸들이 모셨으니 소태후의 일생은 매우 아름다운 장관이었으며 일대의 파란이었다. 양사랑의 음모가 아니었더라면 소태후의 일생은 완전히 아름답고 휘황했을 것이다!
1998년 5월 나는 대법을 수련하기로 결정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꿈을 하나 꾸었는데 꿈이라고는 하지만 현실보다 더 진실하고 강렬했다. 꿈에서 왕모낭랑(서왕모)이 시녀를 데리고 하늘에서 나를 보러 내려왔다. 당시 나는 방에 앉아 있었는데 전신의 모든 세포가 강렬하게 왕모낭랑이 온 것을 느꼈으며 그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나는 아랫목에서 미친 듯이 문으로 뛰어가 왕모를 만났으며 나도 모르게 꿇어 엎드리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사부님의 말씀이 생각나 중지했다. 왕모낭랑의 얼굴은 표정이 없었고 냉담했는데 나는 내내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나중에 와서야 알게 되었으니 그 때 소태후는 왕모낭랑이 전세한 것이었으며 그 단락의 은원은 소태후에게 극히 큰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 삼계 내의 중생은 모두 정이 있는 것이다.
2005년 나는 한 여자 동수를 알게 되었는데 나중에 우리는 늘 함께 법공부를 했다. 한동안 나는 이 동수를 보면 마치 요나라 사람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연속 며칠간이나 그랬다. 그래서 말했다. “당신은 왜 요나라 사람처럼 느껴질까요?” 나중에 이 동수는 한동안 사악의 교란을 받았는데 그녀가 곤란할 때 나는 스스로 힘껏 그녀를 도왔다고 여겼다. 비록 사람의 마음이 섞여 있었고 법에 있지 않은 곳이 있었지만 이기심 없이 도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동수는 늘 내게 불만을 터뜨렸고 또 충분한 이유가 있다면서 떳떳하게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도리어 사악의 조종을 받아 화를 내거나 원한도 없는 수련인을 화란(禍亂)시켰다.
그녀는 매번 나로 하여금 사람 마음이 일어나게 했고 마음의 평형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설사 이렇더라도 나는 “도우려고” 했는데 이는 나의 사람됨이나, 개성과는 매우 동떨어진 것이었다. 만일 다른 동수였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법에 있지 않은 것으로 나 개인의 수련 부족과 사람마음이 드러난 것이다. 2008년 전 세계 화인신년만회를 보고난 후 동수와 교류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그 동수 역시 이 당시 역사의 기억이 열렸다. 그녀는 바로 당시 양사랑에게 시집간 소태후의 딸이었고 왕모낭랑의 천상 7선녀 중 하나였다. 그 일세에 그녀와 왕모는 지상에서 모녀지간이었다. 천년 전에 맺은 인연은 정법시기에 때때로 험준하게 드러난다.
수련은 너무나 엄숙하다. 만일 우리가 정진하지 못하고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을 잘하지 못한다면 사악은 우리들 생생세세의 연원을 이용해 교란하는데 그중에는 악연과 선연을 포함한다. 만일 우리가 윤회중의 “정(情)”과 “한(恨)”에 빠져 미혹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미 사악에게 교란을 받는 것이고 구세력의 길을 걷는 것이다.
발표시간 : 2008년 4월 3일
정견문장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8/4/3/5214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