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기실: 천재옥아(4) 황주적벽(黃州赤壁)
작자: 소연(小蓮)
【정견망 2009년 7월 22일】
황주(黃州)는 양관(陽關)이나 한산사(寒山寺)와 마찬가지로 비록 경치가 절경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문인들의 자취를 남겨놓았기 때문에 중국 문화사(文化史)에 기록되었다.
나는 종종 생각하는데 만약 소동파가 황주로 쫓겨나 아무런 실권도 없는 단련부사(團練副史 역주: 단련이란 일종의 지방 민병조직이다)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저 화려한 《염노교(念奴嬌)•적벽회고(赤壁懷古)>》 와 《전후적벽부(前後赤壁賦)》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점에서 말하자면 황주는 소동파를 만들었고 문화사를 만들었으며 또한 송사(宋詞)를 이루게 했다.
사실 문인들은 장소와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는데 이것은 확실히 매우 절묘한 결합이었다. 장소는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문인이 나타남으로 인해 그것의 문화적 내막이 비로소 문인의 사유를 통해 널리 전해지며 천하에 이름을 날린다. 문인은 특정 지방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의 경지를 끌어올린다. 그러면 그는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문화를 창립하는 역사적 사명을 더 잘 완성할 수 있다.
황주는 당시 매우 황량한 작은 마을이었다. 소동파는 이곳에 쫓겨 와 적지 않은 고생을 겪었다. 조정에서는 비록 그가 여기서 멀리 떠나는 것을 허락하진 않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황주 주변에는 장강(長江)의 한 지류가 있는데 삼국시대에 이곳에서 적벽대전이 일어났다. 나중에 어떤 사람은 소동파가 옛일을 회고할 때 장소를 착각했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그가 비록 착각했다 할지라도 시문(詩文)을 지은 것으로 말한다면 맞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염노교•적벽회고>》와 《전후적벽부》가 출현한 것은 역사적인 필연이기 때문이다! 착오가 있었다면 있는 것으로 어쨌든 좋은 것으로 여기에는 모두 원인이 있다. 만일 소동파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이런 사(詞)를 써내기는 몹시 어려웠을 것이다. 많은 일은 모두 역사적인 배치이며 우리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동파는 감옥에서 4개월 20일간 갇혀 있다가 나중에 황주로 왔는데 완전히 허울뿐인 단련부사에 임명되었고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그는 완전히 농민이 된 셈이었다.
하지만 그의 천부적인 재능은 도리어 닳아 없어지지 않았다. 예를 들면 그가 친구 공평중(孔平仲)에게 써준 시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작년에 동파는 기와를 주웠고 누런 뽕나무 삼백 척을 심었다. 올해는 풀을 베어 설당(雪堂)을 지었는데 날이 뜨겁고 바람이 불어 얼굴이 새까맣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반성하며 이렇게 썼다. “하루 이틀 간격으로 분향하고 묵묵히 정좌해 자신을 깊이 성찰해보니 물(物)과 나를 모두 잊고 심신이 텅 비는구나. 죄가 처음 시작된 바를 찾고자하나 얻을 수 없구나. 일념이 청정하니 오염된 것이 저절로 떨어진다. 겉과 속이 다 걸림이 없으며 붙어 있는 것이 없도다. 남몰래 즐기노라….”
내 생각에 소동파는 바로 이와 같이 스스로 되돌아봄이 있었기 때문에 점점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완성할 심성 기초를 닦게 되었다. 이때 그의 주변 친구 중에는 시인이자 승려인 참료(參廖)가 있었고 또 120여세의 도인이 있었다. 물론 범진(範縝), 불인(佛印) 등도 없어서도 안 되며 또 진고(陳慥), 소곡(巢穀) 등이 있었다.
7월 여름 어느 날 밤, 소동파가 같은 고향출신의 도인(道人) 양세창(楊世昌)과 밤경치를 즐기는데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었고 수면은 고요해 파도가 없었다. 얼마 안 되어 휘영청 밝은 달이 수면 위에 떠올라 안개 자욱한 강을 비췄다. 그러자 물빛이 안개 기운과 맞물려 절묘한 경치를 이루었다. 두 사람은 함께 작은 배를 타고 강물이 흐르는 데로 표류했다. 그의 식구들 역시 강변에 앉아 이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조각배가 거의 강 중심에 이르자 양세창은 옥으로 만든 퉁소를 꺼내 천천히 불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흐느끼는 듯 끝없이 슬펐고 마치 속세의 모든 것을 다 간파한 듯, 마치 고통 속에서 또 절망적으로 호소하는 듯했다. 옆에 있던 배의 농촌 부인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당시 천상에서는 아주 많은 신선들이 나타났는데 그들 역시 감동했다. 원래 쾌청한 달이었는데 웬일인지 잠시 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천상과 인간세상이 모두 조용히 이 한 막이 열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동파가 물었다.
“퉁소소리가 어찌 그리 슬픕니까?”
양세창이 말했다. “이곳은 한때 삼국시대의 옛 전장이었소. 주유(周瑜)가 이곳에서 조조(曹操)와 대전하는데 깃발이 날리고 북소리가 둥둥 울리는 장면을 지금 어디서 찾을 수 있겠소. 지금은 남은 것은 오직 이 세차게 흐르는 호탕한 강물뿐이오. 인생은 꿈과 같고 나는 망망한 바다 속에 모래와 같을 뿐이오. 인생이란 정말 너무나 짧은 순식간에 불과하며 흐르며 그치지 않는 이 호탕한 강물만 못하구려. 나는 구천(九天)에 올라 노닐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것은 희망에 불과하오. 이런 것을 생각하니 퉁소소리가 나도 모르게 슬프게 되었구려.”
사실 이때 많은 신들이 모두 이 망망한 밤하늘에 나타나서 자비롭게 그들을 바라보았으며 그들을 위해 천고의 유명한 작품을 남겨놓도록 배치했는데 신들은 얼마나 큰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가!
동파선생이 웃으며 말했다. “물은 아무리 변해도 여전히 물이 아니오. 만물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인데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오. 그 외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것을 우리에게 속하도록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산간에서 맑은 바람과 하늘의 밝은 달만이 우리가 영원히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사실 그들 두 사람의 심경은 일찍이 사물에 초연했고 속세의 일은 이미 마음에 두지 않았다. 내심의 진실은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드러냈다. 하지만 그들은 무의식 중에 역사가 자신들에게 부여한 신성한 사명을 완성한 것이다!
이것을 시로 표현하면 이러했다.
江中泛舟憑月色
感懷古今解寂寞
談笑之間《賦》成就
千古流芳積善業!
강물에 쪽배 띄워 달빛에 의지하니
감회는 고금의 적막을 푸는구나
담소하는 사이에 <부賦>를 이루니
천고의 명성으로 선업을 쌓네!
사실 당시 소동파의 벗들은 이미 모두 법을 얻었다. 구체적으로 일일이 대응하진 않으니 양해를 바란다!
무엇 때문에 소동파는 황주에서 평생 가장 좋은 글을 써낼 수 있었는가에 관해, 다시 말해서 황주와 소동파가 대체 무슨 인연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탄거봉진: 낭적천애(浪跡天涯)》 시리즈에서 천천히 드러날 것이다.
발표시간 : 2009년 7월 22일
정견문장 :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9/7/22/6066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