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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의 결말 (1)

부친의 결말 (1)

작자: 하북(河北)제자 아슬 (雅瑟)

[정견망]

(이것은 부친이 파룬따파를 수련할 때 우리 자매들에게 계속 들려준 경험이다. 이미 십수년이 지나서 어떤 것은 잊어버렸다. 부친의 결말은 매우 유감스러운데 그가 수련에 용맹정진 하다가 오히려 사부님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1. 윤회전생

지난번 대홍수가 지나간 후 물이 점점 물러가고 모든 것이 조용할 때 갑자기 북쪽 산비탈(인상에는 마치 곤륜산 같았다)에서 어느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는데 아직 한 살이 채 안된 어린이였다. 그는 죽은 엄마의 시신 옆에서 큰소리로 울고 있었다. 엄마의 시신은 아직 물속에 잠겨 있었다. 이때 산속에서 남녀 몇 사람이 지나가다가 빠른 걸음으로 어린이의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이 분들은 왕모낭랑(王母娘娘 서왕모)과 보살, 또 그녀의 사형제들이 그들 사부의 설법을 들으러 가는 길이었는데 이곳을 지나게 된 것이었다.

이 때 왕모낭랑이 물속에서 아이를 안아 올려 손으로 아이 얼굴의 물과 눈물을 닦아주었다. 남자아이였는데 미목이 수려하고 매우 사랑스러웠다. 붉은 베를 가슴에 두르고 있었으며 목에는 은으로 된 기린쇄를 걸고 있었다. 작고 붉은 배두렁이에는 노란색으로 진선인 세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왕모는 이 아이를 안고 사부가 설법하는 곳으로 갔다. 아직 얼마 많이 가지 않았을 때 대우(大禹)가 치수(治水)하는 도구를 들고 열 살, 여덟 살 되는 두 아들을 데리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왕모는 대우를 불러 세워 어린이를 대우(大禹)에게 주었다. 대우는 열 살 된 큰 아들에게 어린이를 안으라고 하여 대우는 세 사람을 데리고 치수를 하게 되었다.

이후 윤회 중에(남자아이는 황제, 관리 등이 되었는데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 하나만 이야기 한다. 명나라 숭정 연간에 낙양의 남쪽 어느 마을에 성이 이(李)씨인 큰 집안이 있었다. 그는 항렬로는 셋째였다.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해 양자를 들였다.(그러니 이 집은 이 아들 한명밖에 없었다) 이 아이가 자라서 16세가 되던 해에 양부모는 그에게 혼처를 결정했는데 며느리가 집안에 들어오기도 전에 큰백부, 큰백모, 둘째 백부모, 양부모 모두 갑자기 차례로 세상을 떠나버렸다.

1년 후의 가을 어느 스님이 와서 아이에게 말했다. “가산을 다 나누어주고 절에 들어가 수행하는 것이 어떠냐.” 아이도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어려서부터 마음이 부처님을 향했고 집안에 또 아무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기와 하인들만 있었으며 할머니 역시 병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신 상태였다. 아이는 집안의 많은 논밭, 많은 재산 북경과 천진에 있는 장사 등을 모두 하인과 마을의 고향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기는 약간의 양식만 가지고 스님이 알려준 대로 길에 올랐다.

가는 도중 비바람과 노숙을 하며 며칠을 갔는지 모르는데 가지고 간 양식이 이미 다 떨어져서 가는 동안에 구걸을 하며 온갖 고생을 다 겪었다. 작은 길을 따라서 어느 큰 산속에 들어갔을 때 가다보니 길이 없고 인가도 없었다. 게다가 해는 이미 져서 아이는 커다란 바위에 앉았다. 목마르고 배고프며 다리는 이미 천근만근으로 무거웠고 신발도 다 헤졌다. 마음속으로 너무나 괴로워 죽음까지 생각하며 울기 시작했다.

한참 울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의 말이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 할머니가 그에게 왜 울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 한해 동안에 그에게 일어난 많은 일들과 자기가 현재 스님이 가르쳐 준 절로 가서 수행하려고 한다고 하면서 지금의 처지를 할머니에게 한바탕 늘어놓았다. 할머니는 “얘야, 네가 찾는 그 절은 저 앞에 있는 산을 넘으면 된다. 너는 우선 이 떡을 좀 먹으렴.” 할머니는 말하면서 자기의 광주리에서 옥수수로 만든 떡과 한쌍의 신을 주며 말했다. 이 신은 내 아들 것인데 한번 신어봐. 아이가 신을 신어보니 꼭 맞았다. 옥수수 떡을 들고 게걸들린 듯이 먹기 시작했다.

다 먹은 후 “어르신 감사합니다!” 말을 하려고 하니 할머니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그제서야 어쩌면 보살님을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땅에 꿇어 앉아 몇 번이나 절을 올리고는 견정하게 앞에 있는 그 산을 향해 나아갔다.

하룻밤을 걸어서 다음날 겨우 그 산을 넘을 수 있었고 산 아래 과연 절이 있었다. 아이가 절에 도착하여 잠기지 않은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갔다. 절 안에는 몇 칸의 방이 있는데 마치 몇 년간 수리하지 않은 듯했다. 아이가 앞으로 걸어가서 막 문을 두드리려고 하는데 집안에서 “들어오게나” 하는 사람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들어가니 노 스님이 있어서 여기에 오게 된 원인을 또 스님에게 한바탕 이야기했다. 스님이 말했다: 나는 네가 어디에서 온지 안다. 나의 법호는 혜연(慧緣)인데 이 절이 바로 나이며 나 혼자 뿐이니 너는 여기 머물러라. 이때부터 아이는 이곳에서 혜연스님을 따라 수행을 했으며 혜연 스님에게 밥해주고 불 때는 소화상이 되었고 법호를 얻었다.

혜연 스님은 대추를 무척 좋아했으므로 아이는 사방으로 대추를 찾으러 다녔다. 시간이 길어지자 사방 200리 안의 대추는 다 떨어져 동이 났다. 혜연스님은 아이에게 쇠부채를 하나주었는데 그것은 혜연 스님의 법기였다. 이것을 가지고 주문을 외면서 어디에 가겠다고 생각하면 곧 그곳에 도착했다. 그래서 아이는 매일 광주리를 하나 들고 이백리 밖으로 대추를 따러갔다.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에 돌아왔다. 절은 산에 있으므로 심는 곡식이 매우 적어서 곡식을 찧은 후 혜연스님에게 쌀죽을 만들어 드렸고 아이 자기는 거친 겨를 먹었다. 때로는 인가를 찾아 동냥을 했는데 수행이 매우 간고했다.

하루는 절 밖에서 또 혜연스님을 스승으로 모시려고 하는 사람이 왔는데 혜연은 거두지 않았다. 그러자 찾아온 사람은 밖에서 사흘을 꿇어 엎드리고 있었다. 아이는 이 사람이 일심으로 수행하려고 하며 또 자기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은 것을 보고 남아서 자기와 친구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여 스스로 그가 남도록 주장했다. 아이는 집안으로 들어가 혜연스승에게 말했으나 혜연스님이 그를 못 본 척 했는데 못 본척한다는 것은 묵인하는 것이라 아이는 매우 기뻐하며 그 사람은 방안으로 들였다.

아이는 이때부터 친구가 생겼고 수련에 더욱 정진했다.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혜연 스님은 이 두 제자를 곁으로 부르더니 말했다: “나는 가야한다. 내가 간 후 너희들은 수련에 용맹정진하며 절대 나태하지 말아야 한다.” 혜연 스님이 원적한 후 두 소 젊은 스님들은 부지런히 수행하여 이년이 지난 후 그들 둘은 사원을 떠나 떠돌아 다녔는데 온갖 고생을 다 겪었다. 이렇게 또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어린 사제가 아이에게 우리 함께 상계로 올라가서 사부님을 찾아보자고 했다.

이렇게 하여 어린 사제는 아이와 함께 남천문(南天門)에 도착했다. 문을 지키는 천병은 그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남자아이는 철선을 꺼내어 문을 지키는 천병에게 주었다. 병사는 들어가서 보고하고 잠시 후 나와서 그들을 대전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왕모낭랑을 만났다. 낭랑은 아이를 보더니 매우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철선동자(鐵扇童子)”였다. 아울러 철선동자에게 하늘의 병기고를 지키도록 했다.

또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왕모 낭랑은 철선동자를 부르더니 말했다. 그는 인간세상의 유모가 염라전에서 그를 고소했다고 말했다. 유모는 염라왕전에서 말하기를, 그가 어려서부터 똥오줌을 다 치워주며 키웠는데 16살에 가산을 다 나누어주고 출가할 때 유모에게 조금도 재산을 나누어 주지 않았고 또 결혼하지 않은 아내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으므로 아내는 그가 출가했다는 소식을 듣고 괴로운 마음에 죽어버렸다고 했다. 이 두 가지 잘못이 있으므로 철선동자는 하계(下界)에 떨어져야 했다.

(다음 회에 계속)

발표시간:2011년 7월 19일
정견문장: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11/7/19/7605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