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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문명-숨겨진 진실: (2장) 먼 옛날의 발자국 – 4

​소학

【정견망】

1957년 《화석인간》에서 마르셀린 불(Marcellin Boule)은 카를로스가 톡소돈의 다리뼈를 발견한 후, 밀마의 Chapadmalalan 층에서 두 개의 돌화살이 박힌 완전한 톡소돈의 척추 뼈마디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불은 이러한 발견이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며, 신뢰할 수 있는 지질학자들은 이 발견이 고대 인디언 거주지였던 상층 암반에서 비롯되었으며 오늘날 그것들이 제3기 지층에 나타난 것은 지층 이동의 교란 결과이다라고 말했다.

불(Boule)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단지 1918년에 로메로의 보고의 주해에 불과하다. 불은 4명의 뛰어난 지질학자가 이미 로메로와 반대되는 결론을 얻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불의 눈에는 그들의 결론이 신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로메로의 지질학의 결론을 더 깊이 연구한 후 윌리스와 현대 연구 학자들의 결론을 결합하면 우리는 설마 로메로가 그렇게 믿을만한지? 의혹이 간다.

불은 또한 고고학 데이터가 이 결론을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같은 제3기 지층에서 나타난 석기가 인디언들이 사용한 것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불은 뛰어난 인류학자인 바우만(E. Boman)도 이 사실을 증명했다고 말한다.

아르헨티나의 고대 인류는 왜 제3기부터 그들의 기술을 고치지 못했을까? 왜 그 지질학자들이 증명한 것처럼 그 도구들이 플라이오세에 있는 것일까? 확실히 이 도구들은 근세 이 지역 사람들이 사용한 것과 동일하지만, 제3기 시기의 출신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현대 세계의 여러 지역에는 몇몇 고대 부족들이 있으며, 그들이 만든 석기는 200만 년 전에 만든 석기와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1921년, 밀마의 Chapadmalalan 지층에서 온전한 인간의 턱뼈 화석이 발견되었다.

밀마의 발견에 대한 논의에서 불은 고전적인 편견 사례를 제시했으며, 이 편견은 과학의 외피를 입혔다. 불의 책에서 아르헨티나에 제3기 인류가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모든 증거는 그의 이론에 의해 부정되었으며, 진화론에 의해 “금기”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 과학자들의 중요한 발견을 숨겼다.

예를 들어, 불이 앞서 언급한 Chapadmalalan 지층에서 발견된 인간 턱뼈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교과서에서 고인류학의 이른바 정설을 받아들일 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

“논란이 될만한 증거”에 반대하는 과학자들은 보통 불과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 만약 누군가가 비정상적인 발견을 제시한다면, 누군가는 이전에 어느 시점에 이미 이 문제에 대해 논쟁했다고 말하고, 그 문제를 해결했다고 여겨지는 권위를 인용할 것이다. 예를 들어, 로메로처럼 한 번 고생하면 영원히 편안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이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보고서(예: 로메로)를 주의 깊게 연구할 때 보고서는 사실 이러한 보고서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보만이 얼마나 정확하게 말했으면 로메로의 보고서도 그만큼 맞게 말하는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불은 보만을 훌륭한 제도사라고 불렀다. 하지만 보만의 보고서를 검토하면, 불이 그를 극진히 추앙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보만의 논문에서 그는 F. 아미키노의 이론과 카를로스 아미키노의 밀마 발견을 모두 공격했으며, 그 자신은 마치 충실한 신자처럼 곳곳에서 불의 말을 인용하며 신처럼 섬겼다. 예상대로 보만은 데리카의 장황한 비판 기사를 대량으로 인용했다. “아르헨티나 제3기에 인류가 존재했다”는 견해에 대해, 비록 보만이 매우 반대하고 심지어 발견자를 비방했지만, 그는 이 “금기된 견해”에 대해 무심코 훌륭한 증거를 제공했다.

​파로디(Parodi)는 박물관원으로, 카를로스의 조수로 일하고 있었다. 보만은 책에서 그가 사기 행위를 했다고 의심했지만, 증거는 없었다. 보만은 “카를로스의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나는 그를 의심할 권리가 없었다. 이래서 나는 그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만은 “당신은 어디에서 증거를 얻어서 사람들을 Chapadmalalan 지층으로 유인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발견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버려진 인디언 거주지가 있으며, 지표면에 노출된 지 약 400~500년이 되었다. 그곳에는 Chapadmalalan 지층에서 발견된 것과 매우 유사한 것들이 많이 있다.”

보만은 이어서 1920년 11월 22일 그가 밀마로 간 상황을 설명했다.

“파로디는 절벽에 박힌 석구를 발견했는데 파도가 그것을 씻어냈다고 보고했다.

카를로스는 많은 사람들을 증인으로 초대했고, 나는 전 외무장관 에스타니슬라오 제발로스 (S. Zeballos)박사, 브라질 상파울루 박물관 전 관장 해링(H. von Ihering) 박사, 그리고 유명한 인류학자 R. 리만 니체(Lehmann-Nitsche) 박사가 함께 갔다.”

밀마의 절벽에 도착했을 때, 보만은 카를로스가 보고한 그곳의 초기 지질 정보가 정말로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확인했다. 보만의 이 점에 대한 인정은 우리의 판단을 증명한다: 즉, 로메로의 관점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불을 반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밀마에서 발견된 돌화살이 박힌 톡소돈의 다리뼈와 척추뼈를 반박하려고 할 때, 유일하게 의지한 것은 로메로의 말뿐이었다.

보만은 “우리가 여정의 종착점에 도착했을 때, 패로디는 우리에게 절벽의 수직 직교 단면에 싸여 있는 석기를 가리켰고, 단면이 약간 오목하여 분명히 파도 작용의 결과였다. 이 물체의 표면 직경은 단지 2센티미터(1인치 미만)에 불과하다. 파로디는 사진을 찍기 쉽게 주변의 흙을 제거했는데, 이때 그것이 유성추에 있는 것처럼 적도 홈이 있는 석구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진은 절벽 현장에서 촬영된 것으로, 사진에는 다른 사람이 현장에 있었고, 이어서 그것을 파냈다. 그것은 단단한 흙 속에 꽉 끼어서 반드시 공구 하나로 그것을 조금씩 힘껏 파내야 했다.” 라고 썼다.

그런 다음 Bauman은 절벽에서 해변보다 3피트 높은 곳에 있는 유성추의 위치를 확인했다[그림 5.2a]. 보만은 절벽의 위쪽이 Ensenadan 지층이고 아래쪽이 Chapadmalalan 지층이라고 말했다. 두 층 사이의 장소는 분명히 좀 이상하다.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유성추는 Chapadmalalan 지층에서 발견되었으며, 암층이 촘촘하고 균일하다.

보만은 또 다른 발견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서 나의 지도 아래, 패로디는 유성추와 같은 곳을 계속 팠는데, 갑자기 또 다른 석구가 첫 번째 공 아래 10cm 지점에서 나타났다… 이 하나는 유성추라기보다는 롤러볼처럼 보인다.”

이 공구는 절벽 표면에서 10㎝(4인치) 깊이에서 발견됐다. 보만(鲍曼)은 그것이 낡았다고 말했다. 나중에 보만과 패로디는 또 다른 석구를 발견했는데, 첫 번째 석구에서 200미터 떨어져 있었고 절벽 아래 반미터 깊이에 있었다. 밀마의 마지막 발견에 대해 보만은 이 공이 손으로 둥글게 만든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보만은 전체 발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통해 밀마 유성추의 플라이오세 신세를 확립했음을 알 수 있다. 보만은 “리마니츠 박사가 자신의 견해로 우리가 현장에서 발굴한 석구는 하파드말랄란hapadmalalan 지형과 동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중에 넣은 것이 아니다. 해링 박사는 이 점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저 자신에 관해서는, 이것이 나중에 도입된 것이라는 어떠한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유성추는 단단한 흙 속에 단단히 묻혀 있어서, 누군가가 땅을 파서 넣었다가 다시 묻었다는 어떠한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

이후 보만은 매우 교활하게 이것이 사기라고 의심했다. 그는 패로디가 석구를 넣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말했다. 패로디가 어떻게 위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화살촉을 톡소돈의 다리뼈에 박아 넣었다. 마지막에 보만 스스로 말하기를, “마지막 분석을 보면 이 속임수를 증명할 확실한 증거는 분명히 없다.”

위의 많은 세부 사항들이 발견의 진실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보만이 패로디를 그렇게 의심하는 이유를 알기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패로디가 가짜 발견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박물관 직원으로서 이렇게 하면 그의 일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박물관 전문가들은 패로디가 매번 인공물을 제자리에 남겨두면 전문가들이 사진을 찍고, 검사하고, 마지막으로 옮길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인류의 진화를 지지하는 과학자들이 몇몇 유명한 발견에서 하는 방식에 비해, Paradi의 방법은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예를 들어, 폰 쾨니히왈드(von Koenigs-wald)의 대부분의 자바 직립인들은 현지인들이 발굴한 것인데 파로디처럼 화석을 제자리에 남기지 않고 나무 상자에 담아 그에게 운반한 것이었다. 또한, 유명한 유럽 신석기 시대의 비너스 조각상은 도로 보수공이 발견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모든 사람이 보만처럼 극단적인 회의론을 가지고 있다면, 어떠한 고인류학의 발견에 대해서도 의심을 제기하며 그것이 사기라고 말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회의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보만의 진술은 분명히 300만 년 전 아르헨티나에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인류가 존재했음을 강력하게 증명했다. 정말로 논쟁이 시작된다면, 보만이 밀마에서 발견한 첫 번째 유성추가 패로디가 계획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 발견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후자의 두 가지 발견은 파로디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니라 보만 자신이다. 그는 현장에 있었고, 아무도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 되새길 만한 점은 그들의 발견이 모두 예상치 못한 것이었고, 그들이 현장에 있을 때 패로디는 그들에게 전혀 아무것도 암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불, 로메로와 보만이 카를로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밀마에서의 발견을 폄훼하는 것은 실질적인 것을 제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마이오세(상신세)에는 유성추를 만드는 인류가 존재했다”는 것에 대해 보만은 같은 부류의 증거를 제시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7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