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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효람이 환생한 전설

작자/ 정중(鄭重)

【정견망】

중국문화는 신전문화(神傳文化)다. 자고로 환생하여 태어났다는 설이 많다. 무릇 유명인사들은 왕왕 누군가의 환생이라는 전설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채옹(蔡邕)이 장형(張衡)의 후신이라든지 엄무(嚴武)가 제갈공명의 후신이며 방관(房綰)은 영선사(永禪師)의 후신이라는 등이다. 또 일반인이라도 아무개가 전생한 거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기효람(紀曉嵐)은 청나라 때의 뛰어난 천재이자 학술계의 종사(宗師)였다. 어사를 두 차례, 예부상서를 세 차례나 역임했으며 또 잠시 병부상서도 맡았다. 마지막에는 내각협판대학사(부재상)를 역임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그의 전생에 대해 각종 설이 난무한다.

일설에 따르면 화정(火精 불의 정령)이 전생한 것이라고 한다. 화정은 오대(역주: 송나라 멸망 이후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를 총칭) 때 존재했으며 여성이었다고 전해진다. 매번 출현할 때마다 놋그릇을 두들겨 쫓아낸다. 기효람이 출생한 후 귀에 귀걸이를 한 듯 구멍 뚫린 흔적이 있었고 발바닥이 뾰족하고 하얘서 전족을 했던 것 같으며 신을 신기에 좋지 않았다. 신을 신으려면 반드시 솜을 받쳐야 했다. 이런 여성적인 특징이 화정이 전세했다는 증거로 든다.

어떤 생동한 기록에 말하기를, 기효람이 출생할 때 어떤 사람이 보았는데 불빛이 활활 타오르는 중에 어느 부녀가 기씨의 집으로 달려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후정(猴精 원숭이 정령)이라고 한다. 기효람은 평생 곡식을 좋아하지 않고 밤, 대추, 배 등 과일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 책상에 이런 과일이 있으면 즉시 집어 먹었다.

어릴 때부터 움직이길 좋아해서 잠시도 집에서 그냥 앉아 있는 법이 없었다. 이런 기호와 심성이 원숭이를 닮았기 때문에 후정이 환생했다는 설이 생겨난 것이다.

물론 이런 설명은 모두 억지로 가져다붙이고 추측한 것이다.

기효람은 청나라 옹정(雍正) 2년 (1724년) 6월 15일 오시 출생이다. 태어날 당시 이름은 ‘윤(昀)’ 자를 ‘효람’ 또는 ‘춘범(春帆)’이라 했다. 조부 기천신(紀天申)에겐 네 아들이 있었다. 이중 효람의 부친 기용서(紀容舒)가 맏이였고 운남 요안현(姚安縣) 지부(知府 역주: 명청대의 지방장관)를 역임했기 때문에 요안공이라 불렸다. 한편 손자대에서 기효람은 서열이 위에서 5번째였다. 그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출생할 때 특별한 점이 없었다. 그러나 유년 시절의 기효람에겐 두 가지가 남달랐다. 하나는 뛰어난 기억력이었고 또 하나는 특이공능(초능력)이었다.

5살 때의 일이다. 기효람이 집에서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는데 선생님이 그에게 ‘삼자경’을 외우라고 했다. 공부를 시작하던 처음 며칠 간 선생님은 하루에 20글자를 가르쳤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기효람은 보기만 하면 잊지 않았고 몇 번만 외우면 금방 익숙해졌다. 그는 반달이 못 되어 <삼자경>을 물 흐르듯 유창하게 외웠다. 또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사서, 오경을 읽기 시작했고 아울러 한시를 짓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대련에 아주 능했다. 한번은 늘 그의 집을 찾던 혜명(慧明)스님이 그의 머리에 상투가 매미머리 같은 것을 보고 농담으로 시를 지었다.

“소대가리에서 용의 뿔이 생겼구나”

기효람이 노스님을 흴끗 보더니 입을 열어 말했다.

“개 주둥이에서 어찌 상아가 생겼는가”

이 말이 나오자마자 대청이 떠나가게 웃었다. 이 구절은 승려의 놀림에 대한 답변이자 매우 깔끔한 응답이었다. 겨우 5살 어린이의 말이니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효람의 또 다른 재질은 4-5세일 때 불을 밝히지 않아도 어둠 속에서 물건을 똑똑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일은 본인도 깊이 기억하고 있으며 그가 69세에 쓴 <괴서잡지(槐西雜志)>에 아래와 같이 기술해놓았다.

“나는 4-5세 때 밤에도 낮처럼 물건을 볼 수 있었다. 7-8세 이후 점점 어두워 졌으며 10세 이후로는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혹 밤에 반쯤 깨어나면 이따금씩 볼 수 있었는데 잠시 옛날 같이 보였고 16-7세 이후부터 지금까지 2년에 한번쯤 보았다. 마치 전광석화처럼 튕기듯이 지나간다. 아마 나이가 들면서 먹고 마시게 되어 신명(神明)이 갈수록 없어진 것이다.”

이 글을 쓸 당시 기효람은 이미 조정의 대신이었고 문장의 태두로 존경받고 있었으니, 어린 시절에 대해 허언을 할 이유는 없다.

http://www.zhengjian.org/2015/09/03/147485.文苑逸事:紀曉嵐的投胎傳說.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