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석방행
【정견망】
본문에서 쓰려고 하는 경력은 주로 아이타산(阿爾泰山) 북동쪽에서 대흥안령(大興安嶺) 서쪽의 광대한 지역이다. 현재는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국경 인근지역을 포함[원래의 탕누우량하이(唐努烏梁海) 지역, 외몽골, 내몽골 대부분]하며 러시아의 아시아 쪽 서부에 해당한다. 지형은 산지와 사막 위주이고 바이칼 호를 주요 호수로 몇 갈래 하류들이 있고 황하는 내몽골 중부를 지난다. 외몽골 지역은 아시아 추위의 발원지다. 이곳은 목축을 위주로 하고 밀 감자 등을 심었다. 추운 날씨와 모래 바람의 침입으로 인구 밀도가 낮다. 기본적인 지리 상황은 이렇다.
역사상 이곳은 돌궐, 흉노, 몽골 등의 부족이 생활했던 곳이다. 이 지역에서 역사적으로 발생한 일은 한나라 때 소무(蘇武)가 북해(지금의 바이칼 호)에서 양을 키운 이야기와 왕소군이 국경 밖으로 나간 이야기 등이 있다.
이 일대에서 몽골의 셀렝가 강, 툴 강, 오르홍 강 등 유역과 북강가이 성, 볼간 성, 동고비 성 경내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 유물은 연대가 대략 2만–1.2만 년 전이다. 지금 러시아 경내의 구라마(庫拉馬) 2호 구석기 시대 유적지 유물은 지금부터 5만 년 전 것이다. 내몽골에 남아 있는 초기 인류의 족적은 더 많지만 여기서는 일일이 예를 들지 않겠다.
영국에서 출판된 《DK 아동역사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대략 기원전 5천년 중국 황하 유역의 거주민들이 시베리아에서 옥석을 들여왔다. 이상의 자료로 볼 때 이 지구에 일찍이 인류활동과 문명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중화문화권 내부의 각 지역 본토 문명에 대해 한번 언급할 필요가 있다. 현재 고고학 발견 중에서 중화문화권 내부 신석기 및 구석기 유적지가 많은데 이들 유적 사이에 어떤 것은 상호계승과 영향 관계가 있고 어떤 것은 상대적으로 비교적 독립적이다.
내가 아는 역사 사실은 창세주는 지구 표면에 산과 바다지형을 만들었으며 또 지형이 안정된 후 최종적으로 인간세상에 우주 대법이 널리 전해지고 사람이 법을 인식할 수 있는 문화를 다지기 위해 일정한 범위에서 ‘중화신전문명(中華神傳文明)’을 확정했다. 이 구역이 매우 컸기 때문에 창세주는 직접 중심구역의 문화발전을 안배하고 창립했으며 또 일부 변경 또는 보조구역에 창세주가 지정하거나 안배한 일부 신들이 사람을 만들고 문명을 열며 그곳에서 사람이 살게 하여 창세주가 개창한 신전문화의 핵심부분이 그곳까지 발전할 때 다시 중화신전문명의 계통 속으로 다시 융합될 수 있도록 기다렸다. 신이 배치한 일은 매우 다원적이고 복잡한 것으로 간단한 계승이나 DNA의 이어짐은 결코 아니다.
DNA 이런 종류의 유전을 말하자면 지금 사람들은 유전자지도를 이용해 인류의 기원과 발전을 연구한다. 현재 이 학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에서 발원해 가장 원시적인 단 한명의 여성 즉 ‘이브’가 낳았다고 한다. 이런 논점은 언론매체에 의해 널리 재선전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설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우주는 하나의 지혜체로, 우리 수련계의 사람들이 다 알다시피, 우주는 수많은 층차와 경계로 나뉘어 있고 각기 다른 층차와 경계에는 모두 각기 다른 상태와 능력을 가진 생명들이 있다. 이곳의 수많은 생명들을 우리는 모두 ‘각자(覺者)’ 혹은 ‘신(神)’이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각기 다른 경계 속에는 생명과 물질에 대해 각기 다른 요구가 있다. 마치 파룬따파 창시인 이홍지 대사님이 《/span>전법륜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대법은 시간 공간 더 많은 생명과 각종 생명 종류 만사만물을 육성했고 포함하지 않음이 없고 빠짐이 없다.”
그렇다면 사람 이 하나의 층차 중에서 대법이 부여해 사람을 만드는데 참여한 신들이 만들어낸 모든 사람은 역시 ‘사람’이란 종류의 생명이 장래 법을 얻는 물질 구성에 부합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류의 다양한 종족의 유전자지도가 매우 가까운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통속적인 예를 들자면 부친이 흙 한 덩이를 형제들에게 나눠주고 그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따라 흙으로 사람을 만들라고 하면 그들이 빚어낸 진흙인간은 분명 표면상 매우 닮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로 약간의 차이는 있다. 그러나 물질 구성에 있어서는 같은 종이라 할 수 있다.
유전학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우리는 근친혼이 후대에 각종 질병이나 선천적인 장애아 또는 정신 지체아가 태어날 일이 많음을 안다. 그러면 인류가 만약 ‘단일’하게 번식해 후대가 스스로 번식한다면 몇 대도 지나지 않아 소멸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때는 환경이 매우 열악하여 사람의 수명도 짧았다. 그래서 인류는 하나의 원시인으로부터 발전해왔다는 학설은 전혀 성립할 수 없다. 또 전설이나 역사서에서 말하듯 어느 부족이 난을 당해 단지 한두 사람을 남겨 스스로 번식했다는 설은 전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상 모두 신이 어느 한 부족을 남기려한다면 어느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게 했고 그 후 하나의 작은 군체에서 더욱 많은 군체를 만나게 되어 조금씩 번영 퍼진 것이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 사람이 번창하고 지혜와 능력이 뛰어날 수 있다.
아울러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관련되는데 바로 창세주가 이렇게 계통적으로 안배하는 것을 보고 다른 신들이 중화신전문화권 외에서 그곳 생명의 존재 상태를 배치했다. 예를 들자면 여호와는 그들의 생명과 중화문화권 내의 생명이 각종 교류(무역 전쟁 등)이 있도록 했는데 그 목적은 그들의 생명 역시 때가 되면 대법을 듣고 생명의 진상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이를 통해 법을 얻게 하며 또 인연을 맺는 일종의 표현이다. 이렇게 하다보니 많은 일들은 더욱 복잡하게 변했다.
만일 실증과학인 고고학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늘 인식상의 오차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어느 한 종족 무리에서 100명이 중화자손이고 10명이 외래인이라 하자. 하지만 전쟁이나 천재(天災)를 거쳐 오직 5명의 중화자손과 8명의 외래인이 함께 묻혔다고 하자. 하지만 이 묘가 오늘날 발굴된다면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외래인의 거주지라고 오인할 것이다. 이런 일은 매우 많다. 그래서 우리는 고고학을 통해 오직 역사의 일부 단편만 알 수 있을 뿐 전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다. 한편의 완전한 영화 필름이 잘려나가 뒤섞이고 유실된 후 다시 조합한 영화는 원본과 차이가 너무 크다.
이런 것은 더 이상 말하지 말자. 다만 중원민족이 상나라 때 전쟁이나 유목 등의 각종 원인으로 일부가 북쪽과 동쪽으로 이주했다. 그들이 그곳 사람들을 만났을 때 때로는 전쟁을 하거나 때로는 화합했다. 그곳은 매우 추웠기 때문에 바이칼 호반에 갔을 때 이런 부족은 이미 기진맥진하여 많은 이들이 중병에 걸렸다. 이때 사람들은 앞길에 대해 매우 비관했다. (본편은 주로 외몽골과 그 북쪽에서 법을 찾은 일을 말한다. 내몽골에서 법을 찾은 이야기는 《/span>윤회기실:초원심법을 참조할 것)
이 부족 중에 아아(阿雅)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부족이 위난에 처해진 것을 보고 바이칼 호반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울며 하늘에 대고 부족에게 출로를 열어달라고 기도했다. 한참 기도하자 바이칼 호 중심에서 흰빛이 솟아오르며 천천히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아아는 이 흰 빛줄기를 보고 멍하여 어쩔 줄 몰랐다. 잠시 후 흰빛이 어두워지더니 그 속에서 흰옷을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났다. 이 노인은 매우 자상하게 그녀를 보았다. 아아는 노인이 매우 자상한 것을 보고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느껴 말했다. “우리 부족이 이렇게 더 내려가면 전멸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그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까요?” 노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들을 구할 방법이 있단다. 단 조건이 하나 있는데 너는 이곳과 인연이 있으니 이곳에 남아야 한다.” 아아는 부족을 구하기 위해 응낙했다.
흰옷을 입은 노인은 아아를 데리고 부족의 백성들에게 가서 그들의 병을 고쳐주고 그들에게 이곳에서 생활할 수 있는 각종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또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인도하해 유목을 하게 했다. 이렇게 이 부족도 계속 생존할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아아는 노인의 신변에 남았다. 노인은 그녀를 이곳에 있는 여러 산들로 데리고 다녔으며 일부 신선과 수행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그녀에게 많은 수행의 이치를 가르쳐 주었다. 물론 아아도 많은 고생을 겪었다. 최후에 노인은 아아를 데리고 바이칼 호수바닥으로 갔는데 호수 바닥에서 아아는 지상에서는 볼 수 없는 많은 경치와 일들을 보았다. 여기에도 매우 풍부한 세계가 있었다. 일부 신선은 이곳에서 매우 시끌벅적하게 살고 있었다.
시간이 길어지자 아아와 신선들은 서로 잘 알게 되었다. 아아는 그들에게 왜 이곳에 사는지 물었다. 신선들은 말했다. “이곳은 장래 창세주가 인간세상에서 우주 대법을 널리 전하실 중심지역의 북방 장벽이다.(전반 인간세상은 모두 창세주가 대법을 널리 전하는 지방이며 중생은 어느 곳에서도 모두 법을 얻어 수련할 수 있다. 단지 중국이 ‘중심’ 혹은 ‘주무대’일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지키는데 그것은 북방 극지에서 오는 일부 요마(妖魔)가 중토를 화란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그들의 말을 더 확실히 표현하면 북방 극지에 대응하는 공간에 매우 많은 좋지 않은 생명들이 있으며 바이칼 호(산과 호수를 포함)에서 수호하는 신들이 중화신전문화권의 최외각 범위를 지키는 것이다. 물론 외흥안령과 아이타산도 있다]
아아는 이 말을 듣자 매우 놀라서 물었다. “그럼 창세주는 언제 중토에서 대법을 전하나요?” 신선들은 그건 아마도 수천 년 후일 거라고 했다. 아아는 매우 고민이 되었다. 흰옷 입은 노인은 위로하면서 “너는 수행을 배우면서 기다리면 된다.”고 말했다. 아아는 그 말을 듣고 도리가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곳에서 그 신선들과 함께 수행의 방법을 배웠고 많은 신통을 갖추었다.
그녀가 많은 신통을 갖추었고 늘 자기 부족 백성들을 돌보며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었기 때문에 모두들 그녀를 신녀(神女)라 불렀다. 그녀는 또 자신이 알고 있는 수천 년 후 중토에 창세주가 내려와 우주 대법을 전하는 일을 백성들에게 알려주었다. 백성들은 모두 그날이 빨리 올수 있기를 기대했다.
아아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윤회전생 중에서 이 지역에서 전세한 횟수가 비교적 많았다. 나중에 이곳의 문명 정도가 끊임없이 커져감에 따라 아아의 형편도 따라서 많이 좋아졌다.
진한(秦漢) 시기 이곳은 흉노의 지방이었다. 이때 중원제국과 흉노간에는 오랜 전쟁이 있었다. 이 시기 발생한 ‘소무목양(蘇武牧羊 소무가 양을 키운 일)’과 ‘소군출새(昭君出塞 왕소군이 국경 밖으로 시집간 일)’가 일어났다. 아아는 이 두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지만 후인들에 의해 매우 소홀히 취급되었다. 구체적인 것은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기회를 빌려 ‘소무가 양을 키운’ 진정한 의의를 말해보겠다. 소무는 북해(바이칼호)에서 양을 길렀는데 자신은 한나라의 신하라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이는 한 왕조에 대한 일종 충정(忠貞)의 신념을 표현한 것이다. 사실 신전문화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소무의 이 행동은 흉노 전체적으로 위아래의 모든 사람들에게 한문화의 정수(충정의 표현)를 알게 한 것이다. 이는 이곳 사람들도 때가 되면 창세주가 전하는 대법을 알 수 있도록 바탕을 깔아준 것이다.
한 왕조는 ‘예의의 나라(禮儀之邦)’로 불렸다. 일을 할 때면 모두 도리와 예의를 아주 중시했다. 흉노인들은 당시 매우 야만적이어서 싸우다가 도망가도 다른 사람이 깔보거나 비웃지 않았다. 이는 한나라 문화와는 인식이 다르다. 충정 방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무는 이곳에서 일이년이 아니라 이곳에서 19년을 견지했다. 이는 간단하게 신념을 지켰다고 해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실 이 과정 중에 바이칼 호의 산과 호수 중의 신들은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의 주변 사람들도 그를 매우 존경하고 지지했다. 때문에 그는 비로소 그 지극히 힘들고 추운 환경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소무를 언급했으니 우리는 이릉(李陵)과 사마천(司馬遷)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릉(비장군 이광의 손자로 한 무제 때의 명장)이 5천 명의 한나라 군사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다 중과부적으로 포로가 된 일이 없었더라면 태사공 사마천이 이릉을 위해 바른 말을 하다 궁형을 당하고 심신의 고통 중에 《사기》를 집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릉은 조부인 이광과 마찬가지로 아주 용감하게 잘 싸웠지만 하늘은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고립된 군대가 적진 깊이 들어와 비록 무수히 많은 적을 죽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흉노의 선우가 철병하는 관건시각에 이릉은 배신자의 배반으로 포로가 되었다. 아마 당시에는 투항을 임시방편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일어난 일과 오해 때문에 한 무제가 대노하는 바람에 이릉은 한나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소무는 흉노에 사신으로 갔는데 본래는 한 무제의 친교의 뜻을 전달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부하가 흉노 내정 간섭에 연루되어 소무도 흉노에서 억류되었다. 이릉은 소무와 한나라에 있을 때 사이가 좋았으므로 여러 차례 소무에게 흉노에 투항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소무는 응답하지 않았다. 설사 소무가 북해로 유배되어 양을 키우며 사람이 없어 쌓인 눈과 쥐구멍을 파고 쥐를 잡아먹으며 살아야 했지만 19년간 한나라 신하의 본색을 고치지 않았다. 이릉과 흉노 선우는 매우 감복했다.
내 생각에 이릉의 역할은 하늘이 그에게 배치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주 많은 일이 그렇게 교묘하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었으며 그의 일생은 매우 비참하게 보이며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일로 보인다. 바로 그가 소무와 함께 한 가지 일을 연기하여 이로부터 소무의 충정과 호연지기를 두드러지게 한 것이다. (참고자료 문헌은 부록1)
다시 왕소군을 말해보자. 그녀는 본래 경국지색이었으나 화공은 재물을 탐하는 사람이라 소군이 뇌물을 주지 않자 소군을 못생기게 그렸다. 황제의 사람을 받을 수 없음을 깨달은 왕소군은 흉노 선우가 한나라에 혼담을 요청했을 때 자발적으로 나서 흉노로 시집가고자 했다. 소군은 화친의 사명을 가지고 왔는데 더 중요한 사실은 고향(호북)과 중원의 문화 내포를 가져와 양국이 화친하며 싸우지 않게 했다. 이것 역시 세인들이 능히 알 수 있는 의미다. 실질상 마찬가지로 흉노인이 중원문화에 대해 인지하게 하고 이를 통해 오늘날 법을 얻도록 기초를 다진 것이다. 아아는 이 두 사건에서 좋은 교량 작용을 일으켰다. 동시에 소무와 왕소군이 중원을 생각하는 중에 위안을 얻는 작용을 했다.
아아는 늘 내륙의 추운 지방에서 전전했으므로 나중에 신은 아아에게 명나라 성조(成祖 영락제) 시기에 정화(鄭和)를 따라 서양으로 가서 대해와 열대의 풍경을 보게 했다. 그녀의 많은 요소는 그녀 부족에게 함께 연계되어 있기에 그들도 함께 열대지방에 전생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는 그들이 최초 몹시 추운 곳에서 나타났고 게다가 전세할 때 일부 다른 일이 생겨났다. 그래서 금생에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법을 얻었다. 이런 것들은 상세히 말하지 않겠다.
바로 다음과 같다.
부족이 살기 위해 북쪽으로 이주했으나극지 추운 곳에서 신선을 만났네천년 고생스런 기다림 끝에끝내 대법을 만났으니 빨리 하늘로 돌아가세
部族爲活向北遷極地苦寒遇神仙忍苦等待千載緣終遇大法快回天
부록:
1. 이 단락은 《사기》 “이장군열전” “태사공자서” 《자치통감》권23 “한기15 효소황제상”, “도설천하 탐색발현(圖說天下 探索發現)” 시리즈 《/span>역사진상중 “장군백전신명렬(將軍百戰身名裂)” 《中國那些事兒——秦漢》중 “이릉반투흉노(李陵叛投匈奴)”와 “소무목약(蘇武牧羊)” 등의 문장을 볼 것
무엇 때문에 이 두 단락의 문자에 이렇게 많은 사서를 조사해봐야 하는가? 왜냐하면 다른 서적에는 같은 일에 대해 기록하는 각도가 다르고 취사선택도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합하여 보아야 하며 근거가 있어야 한다.
2. 또 무엇 때문에 윤회 계통의 문장에 절반 내지는 더 많은 편을 할애해 각기 다른 지역의 문명발전 역정과 모종의 문화 내포를 말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한 생명이 법을 찾는 과정 중에서 이런 것을 떠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한 지역의 물과 흙이 사람을 키운다(一方水土,養一方人).” 이 물과 흙은 단순히 자연환경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인문역사환경도 사람의 환경에 대해 영향이 크다. 각 지역 문명의 발전과정 자체가 오늘날 문화의 내포를 다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윤회계통의 글에서 각 지역 본토문화와 문명발전과정 등을 쓴다. 독자들이 내 뜻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07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