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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기의 기인: 전생을 기억하는 문인 이운경

글/ 덕혜(德惠)

[정견망] 청나라 말기에 이운경(李雲慶)이라는 문인이 있었는데 자는 ‘임청(霖靑)’이다. 청 말기 광서제 18년(서기 1892년)에 진사에 오르고 나중에 병부상서에 올랐으며, 공을 쌓아 직이 도원에 이르렀으며 2품을 받았다. 신해혁명 이후 북양 정부의 초청을 받아 예제관을 지냈으며 민국 예법제도 제정에 참여했다. 학식이 넓고 시, 사에 능했다. 만년에 불교에 심취했으며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또 다른 문인 곽측운(郭則沄)과 함께 모두 예제관을 지냈다. 곽측운은 광서(光緒) 29년(서기 1903년)에 진사에 올랐고 아마 두 사람은 같은 시기 진사이었으면서 또 시, 사를 사랑한 까닭인지 서로 친했다. 그는 한때 곽측운에게 자기의 신기한 경험을 말해주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전생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전생에 계명산의 승려였고 당시 강남의 명사 강벽(江璧)이 그의 친구였다. 강벽의 자는 남춘(南春)이며, 청나라 동치(同治) 연간(1862~1874)에 진사를 지냈다.

어느 날 그가 임안에 돌아다니다 소문으로 강벽이 과거 시험에 일등으로 붙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영은사 주지를 찾아가 이 소식이 확실한 것인지 알아보았다. 예상과 달리 주지는 “강벽과 당신의 수행이 어떤 관계가 있소? 강벽이 향시에서 일등 한 것이 당신 수행과 무슨 관계가 있소? 옛날 일에 관심 두지 마시오. 이 일념이 움직이면 떨어질까 두렵소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돌아가서 세상을 떠났고, 그 후 바로 이가(李家)에 전생해 태어났다. 출생하자마자 그는 입을 열어 강벽의 과거시험에 대해 묻자 식구들은 괴이한 일이라고 여겨 한바탕 야단을 쳤으므로 그는 더 이상 감히 말하지 않았다.

이운경이 좀 자란 후 자신의 경험을 금생의 부친 이연소(李廷簫)에게 말했으며 이연소는 이를 완전히 받아들였다. 이운경의 이번 생은 매우 총명해 공부를 시작한 후 부친도 엄격히 다루지 않았으나 성적은 자연적으로 남들보다 좋았다. 부친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 아들은 이번 생에 바로 과거 공명을 위해 온 것이니 자연히 부친으로서 감독할 필요가 없다.” 과연 이운경은 청년 시기에 진사에 붙었고 나이가 많아진 후 불교를 경건히 믿기 시작했다.

곽측운은 두 가지 소문을 기록해 놓았다. 그중 하나는 ‘이운경은 저승의 관리였다.’ 다시 말해 그의 원신이 몸을 떠나 저승에 가서 관직을 맡은 것이다. 일부 사람은 이 때문에 그에게 저승의 일을 물어보았으니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로지 한 번 진사 허재형의 아들 허중청이 중병에 걸렸을 때였다. 허중청의 동생 허계상은 형의 수명을 좀 알아봐 달라고 몹시 귀찮게 간구했다. 이운경은 할 수 없이 말했다. “오늘 당신 형이 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살아 있을 시간도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과연 한 달여 만에 허중청은 세상을 떠났다.

이운경이 매번 밖을 나서면 오른쪽 눈을 감기 좋아했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오른쪽 눈을 뜨면 귀신이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곽측운은 이것의 진위를 알 수가 없고 이운경도 이 일을 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른쪽 눈의 속눈썹이 매우 길어 곧바로 아래 눈꺼풀을 가릴 정도였으니 확실히 일반인과 달랐다.

곽측운은 청나라에서만 관직을 지낸 것이 아니라 민국 시기에도 국무원 비서장이 되었고 교우 관계가 넓어 문단 정치에서 활약한 사람으로, 그의 신분은 전혀 거짓을 지어낼 필요가 없다. 기록이 사실일 확률이 매우 높다. 이운경의 이야기는 윤회는 실존하고 무신론은 자기와 남을 모두 속이는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무신론을 이론적 근간으로 삼은 공산 사당(邪黨)을 생각하면 뿌리부터 잘못된 당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밖에 이운경은 전생에 승려였으나 친구의 과거 시험에 집착해 윤회로 떨어진 등, 불법 수행은 극히 엄격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사상이 편차가 있으면 수련이 실패한다.

자료출처: 곽측운 『동령소지(洞靈小志)』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18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