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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심법: 후지산 벚꽃[富士樱花]

작자/ 석방행

【정견망】

후지산과 벚꽃은 모두 일본의 상징이다. 그래서 본문에 이런 제목을 붙였다.

본문에서 언급하는 범위는 일본의 혼슈, 시코쿠와 큐슈 및 그 부근 섬들인데 오키나와는 포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키나와 섬의 본토 문화 내포는 대만과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일본 민족과 중토(中土)문화는 몇 천 년의 교류역사가 있다. 대우(大禹 우임금) 시대 《산해경》에 ‘부상국(扶桑國)’이란 명칭이 나온다. 어떤 학자는 일본을 지칭한다는 의견을 냈다.(멕시코를 지칭한다는 학자도 있음) 이 책에서 언급한 부상국이 일본인지 아닌지 상관없이 일본의 별칭 중에 정말 ‘부상국’이 있다. 《사기》와 그 이후 역사서에는 모두 여러 차례 일본과 중원 사이의 내왕에 대한 언급이 있다.

우리는 먼저 진시황 시기 서복(徐福)이 동남동녀와 장인들을 데리고 해상으로 나가 선약을 찾아다닌 일을 말해보기로 하자.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서복이 진시황을 속여 외국으로 도피한 후 다른 나라를 세웠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모두 표면이다. 무엇 때문에 한 방사(方士)가 사람들을 데리고 새로운 환경에 가서 신천지를 개창했는가? 그가 대륙에서는 할 일이 없고 살기에 불편했는가? 무엇 때문에 구태여 진시황을 찾아가 선약 찾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고 했을까? 게다가 보통 사람들도 다 알다시피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는 일은 매우 위험하고 당시에는 특히 더했다. 한 무리 어린이들이 낯선 지방에 간다면 생존 자체가 큰 문제였다. 무엇 때문에 3천명의 성인이나 젊은 남녀를 데려 가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곤란을 극복할 확률이 매우 높다. 사실 서복은 하늘에서 일본 문화를 개창할 사명을 가지고 온 것이다. 사람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신무대왕(神武大王)’으로 불린다.

또 진시황에 대해 말하면 사실 그는 신선이 되는데 전혀 미련이 없었다. 또 제왕(帝王)제도를 건립하는 동시에 사람이 신을 찾고 생명이 영원에 도달하는 길을 개창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위해 6국을 평정하면서 수많은 기득권자들과 과거 질서(기존의 통치질서)를 유지하려는 자들의 마음속에는 자연히 불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속의 원망을 진시황에게 발설한 것이다. 나중에 한나라의 사마천이 진시황에 대해 쓸 소재를 찾을 때 그런 가짜 자료의 교란을 피할 수 없었다. 동시에 또 사마천의 개인경험이 더해져 한 무제에 대해 많은 불만을 진시황에게 발설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진시황과 한무제는 문치(文治) 무공(武功) 및 장생(長生)을 추구하는 등의 각종 방면에서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았다. 때문에 후인들은 흔히 진시황과 한무제를 함께 언급하곤 하는데 이 역시 사마천에게 불만을 발설할 ‘다리’를 제공해주었다. 이 속에는 자연히 우주 중 사악한 생명의 계통적인 안배가 있다. 왜냐하면 사서(史書)의 가치가 몹시 크기 때문에 후세에 아무리 많은 해와 아무리 많은 세대가 지나도 거울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나쁜 생명들이 체계적으로 이런 것들을 안배했다. 후인들이 진시황을 미워하게 하고 또 그가 몸소 실천한 수행에 관한 것들을 폄하시키고 진시황이 2천여 년 간 억울한 누명을 쓰게 했다.

만약 우리가 중화문명 전체의 역사를 본다면 인문 초조(初祖)라 불리는 헌원(軒轅)황제는 5천년 중화 신전문명을 개창한 후 득도한 사람에게 생사를 해탈하는 법에 대해 물어보고 최후에 용을 타고 날아 올라갔다. 또 최초의 제왕인 진시황 역시 사방으로 방법을 구하고 불로장생의 방법을 얻고자 했다. 그런데 일본 열도 문명의 개척자 중 하나인 서복은 원래 방사였다. 방사란 고대에 일반적으로 일부 특수한 능력이 있거나 또는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물론 가짜나 남의 명의로 사람을 속이는 자는 제외한다.

이는 또 일본열도의 문명과 중화문화가 일맥(一脈)으로 서로 이어지도록 다져주었는데 그 핵심은 바로 신전문화(神傳文化)다. 생명의 목적은 신(神)을 찾고 신을 따르기 위함인데 정말로 신이 오실 때 신을 따라 함께 회귀(回歸)의 여정에 오르는 데 있다.

우리가 이 점을 분명히 알고 나서 다시 수당(隋唐)시기 중원문화와 일본열도의 교류사를 보면 더 명백해진다. 그것은 모두 신전문화라는 이 주선(主線)을 까는 것이다. 나중에 감진(鑒真 역주: 당나라 승려로 일본에 율종을 전하고 당나라의 많은 문물을 전함)화상이 동쪽으로 건너간 것을 포함해서 모두 이런 것이다. 현재 일본열도의 수많은 사찰 고성(古城)은 모두 중원문화 색채가 농후한데, 문자마저도 한자에서 변화된 것 등을 포함한다.

당조(唐朝)를 말하자면 현종 시기 양귀비가 있었다. 이는 중국에서는 누구다 다 아는 인물이다. 현종은 안록산, 사사명의 난을 거쳐 촉으로 들어가는 도중 (마외파에서) 병변을 만나 어쩔 수 없이 양귀비를 사사한다. (고력사를 시켜 흰 비단으로 목 졸라 죽였다) 그 후 이치대로라면 당연히 현종이 촉으로 돌아온 후 마땅히 양귀비의 시체를 찾아야 하는데 찾지 못했다. (당시 비록 병란을 당했지만 귀비의 시체는 잘 보존해야 했다) 하지만 일본에는 오히려 양귀비의 묘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양귀비가 당시 가사(假死)상태에 있다가 대군이 지나간 후 소생했고 나중에 여러 곳을 전전하다 일본으로 가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한다.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는 사실 시인이 자신의 공능이나 혹은 하늘에 그에게 나타내 준을 통해 현종과 양귀비 사이의 진실한 연분을 알게 되었고 이를 문학적 필법으로 써낸 것이다.

일본 양귀비 묘에 정말 그녀의 시신이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일본민족이 중원문화를 몹시 숭상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방면에서는 일본 NHK의 다큐멘터리 《실크로드》 시리즈 제1부 제1집에 두드러지고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제 우리 본문에서 막부(幕府)의 한 장군과 그의 어린 사촌 여동생이 법을 찾고 신을 향한 이야기를 말해보자.

아마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애정 내용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본문에서 쓰려는 반대로 애정과 조금도 관계가 없고 두 사람이 함께 신을 찾고 구도하는 법을 찾는 경험이다.

이 막부 장군은 거의 50세에 가깝고 성격이 비교적 고집스러워 일반인은 불복하고 문제를 처리하는 데 충동적인 면이 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길어지자 조야에서 죄를 얻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연합하여 그를 파면시켰다. 그는 비록 성격이 퉁명스럽지만 사람됨이 좋아 사람들은 그의 권력을 빼앗긴 했지만 그를 크게 괴롭히진 않았고 군복을 벗겨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는 반평생을 군대에 있었는데 이 때 그는 편안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원래 아내와 식구를 데리고 함께 고향을 돌아가려고 했는데 아내가 갑자기 병이 들어 죽어 버렸다. 그는 아직 자녀가 없었고 그 주변에 그를 돌봐줄 친척이 없었다. 바로 이때 그의 친척이 멀리서 그의 어린 사촌 여동생을 (16세) 데리고 와서 그의 생활을 돌보도록 해주겠다고 했다. 사실은 그더러 후처로 맞아들이라는 뜻이었다. 그는 원래 아내를 생각하여 후처를 맞을 생각이 없었고 그저 친척 동생을 딸로 삼아 대했다.

이것은 큐슈 섬에 있는 장군의 고향(어느 반도)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느 날 두 사람이 할 일 없이 한가하게 집안일을 이야기 하다가 여동생이 자신이 11살 때 중국에서 왔다는 도사를 만난 이야기를 했다. 그가 “너는 어느 매우 큰 신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너는 금생에 오빠나 아버지 같은 사람을 만날 것인데 너희들이 함께 그 신을 찾을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장군은 그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한참 만에 말했다.

“그럼 우리 함께 찾아가 보자. 비록 이때 우리가 찾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특징이 있는 신인지 모르지만 신을 찾는 것이 나쁜 점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짐을 싸서 몇 명의 집안사람들을 데리고 그 생에서 찾기를 시작했다.

그들은 함께 혼슈우 섬에서 큐슈로 도착했고 여기서 2년 정도 머물렀다. 2년의 시간 동안 그들은 이 도서의 많은 지방을 돌아다니며 물었다. 당시 사람들은 다 모른다,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당신들은 찾으면 반드시 돌아와서 우리에게 한마디 알려달라고 했다.

그들이 함께 찾아다닌 일은 사실 매우 고생스러웠다. 늘 비바람 맞으며 몇 차례 지진과 태풍을 만났다. 그들이 지진이나 태풍이 지나간 후 부서진 갈라진 건물 도로의 잔해를 보았을 때 사람의 취약함과 무상함을 더욱 느꼈다.

큐슈의 남단 가고시마(鹿儿岛) 만의 사타(佐多 지명)에서 어느 날 저녁 해변을 산보하다가 맞은편에서 한 투명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비록 옷을 입고 있었지만 앞에서 그의 몸 뒤를 볼 수 있었고 내장도 투명했다. 그들은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이 투명인이 그들 앞에 와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들 나의 이 모양이 아주 괴상하지요? 나는 일부러 당신들 앞에 보여준 겁니다. 생명은 모두 부동한 표현 상태가 있으며 당신들이 일상적으로 보는 상황 범위 내에 국한되지 않음을 당신들에게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여동생이 얼른 말했다. “그럼 당신께선 장래에 능력이 아주 큰 신인(神人)이 출현하시는 것을 아시나요? 저희가 어디로 가야 그분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 투명인이 말했다.

“때가 되면 그분이 그분의 방식으로 당신들을 찾아오실 겁니다. 다만 지금은 당신들이 반드시 그분을 찾아서 먼저 이 연분을 이어야 합니다.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당신들이 세도나이카이(濑户内海)에 가서 그곳의 큰 사찰에서 물어보세요.”

말을 마치고 투명인은 ‘증발’하듯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장군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서 즉시 세도나이카이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눈이 머리가 좀 어지러웠고 자칫하면 졸도할 뻔 했다. 다행히 식구가 제 때에 와서 그를 부축해주었다. “아마 장군께서 요즘 너무 피로하셨나 봅니다. 일단 좀 쉬시고 나중에 다시 찾으러 가도 늦지 않아요.”

장군 역시 오랜 여행에 병이 되어 매우 심하게 앓았다. 이곳에는 좋은 의원이 없었다. 어린 사촌은 매우 걱정하여 하루 종일 세심하게 그를 돌보는 동시에 끊임없이 장군의 병이 빨리 낫기를 기도했다. 장군이 금생에 아직 그 신이 어디에 올지 알아보지 못했는데 그녀는 심지어 장군을 대신해서 병을 감당할 생각까지 했다. 말하자니 신기하게 그녀는 원래 건강하던 몸이 기도한 후 이틀이 지나 아프기 시작하며 일어나지 못했다. 식구들이 매우 놀랐으며 그들은 뜻밖의 변고에 두려워했다.

더욱 공교로운 것은 여기서 큰비가 삼일 밤낮을 내렸으며 그들이 가져온 양식이 다 떨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탄식하며 내일을 어떻게 지낼지 걱정했다. 바로 이때 문이 갑자기 바람에 열리더니 1미터 반 정도의 용이 기어들어왔다. 이 용은 매우 위엄 있게 생겼으며 면상도 흉악하지 않았다.

식구들은 진짜 용을 본적이 없었기에 모두 놀라 얼굴이 흙빛이 되어 놀라 바닥에 엎드려 감히 머리를 들지 못했다.

문득 용이 장군의 침상 앞으로 기어가더니 입에서 아이들이 과거에 가지고 놀던 완구 같은 유리구슬을 토해내 아직도 혼미한 장군의 입을 열고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어서 용은 사촌의 침대 앞으로 가서 그녀의 사지를 살그머니 잡아당기고 그녀의 머리를 향해 한숨을 후 불었다. 그리고 조용히 떠나갔다.

용이 떠난 후 식구들은 비로소 모여들어 장군과 동생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려고 했다. 얼마 후 장군이 천천히 깨어났다. 장군은 눈을 뜨더니 “방금 꿈을 하나 꾸었는데 신선이 사자를 파견해 환약 한 알을 주어 나를 구했다.”라고 말했다. 식구들은 비로소 용이 집안에 들어와 장군 일행들에게 한 행동을 말해주었다.

한 가족이 말했다. “보아하니 우리가 이번에 신을 찾으러 나온 것이 잘한 일 같습니다. 세간에는 정말 신이 계시네요.” 사촌 동생도 곧 깨어났는데 깨어난 후 좀 피곤한 것만 느꼈고 별다른 장애가 없었다.

장군은 용의 치료를 받은 후 곧바로 회복되었다. 밖의 비는 언제인지 모르게 그쳤다. 며칠이 지나 주위의 사람들은 장군이 여기 있다는 말을 듣고 모두 양식이나 채소들을 가져와 방문했다.

장군과 사촌은 왜 이곳에 왔는지 자기의 직접 경험 등을 방문한 사람에게 들려주었고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만약 인연이 있다면 그들도 함께 그 신을 찾고 싶다고 했다. 아울러 그들이 여기에 보름동안 더 머물도록 만류했다.

그들이 시코쿠 섬에 도착했을 때 먼저 어느 부잣집에 머물렀다. 다음날 어느 학발동안(鶴髮童顔 머리는 백발인데 얼굴은 동안)인 노선생이 와서 맞이하며 그들이 이곳에서 놀다 가라고 했다. 그들이 노인을 따라 세도나이카이 해변에 왔을 때 노인이 손으로 가리켰다. “내 집은 바로 바다 한가운데 있다네. 당신들이 용감히 나를 따라오겠는가?” 그들은 오는 길에 내내 많은 기인(奇人)기사(奇事)를 만났으므로 이번에 또 무엇을 만날지 몰랐다. 하지만 마음 깊이 그들은 신이 보호함을 알았으므로 노인을 따라 바다 속으로 들어가 놀러 가보기로 응낙했다.

문득 노인이 외투를 벗고 물에 놓고는 그들을 함께 그 외투 위에 서라고 했다. 그러자 잠시 후 바다 중간에 도착했다. (바다 해면 위가 아니었고 해저도 아니었다) 여기에 도착하자 그들은 매우 큰 궁전과 건축을 보았는데 그 위에는 주안상이 이미 차려져 있었다. 노인이 먼저 자리를 잡고는 그들에게 마주 앉으라고 권했다.

앉은 후 노인이 말했다. “나는 이곳(세도나이카이)을 맡은 해신(海神)입니다. 당신들이 아주 높은 층차의 그 신과 연분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금생에 당신들이 그분을 찾고 연분을 이어갈 것입니다. 내가 두 분에게 부탁하려는 것은 당신들이 만일 그분을 찾는다면 제발 나와의 이번 연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 역시 그 신의 구도를 얻고 싶습니다.”

이때 사촌동생이 이 상황을 보고 장난조로 말했다.

“그때에 당신이 사람이라면 좋겠지만 만약 다른 곳에 가서 무슨 해신이 되어 있다면 우리가 어디에 가서 당신을 찾고 알려줍니까?”

노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때가 되어 당신들이 나를 생각하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것은 안배가 있을 겁니다.” 장군은 “그때가 되면 우리가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식사를 마친 후 노인은 그들을 원래 장소로 돌려보내주고 그들은 식구를 데리고 키이수도(纪伊水道)를 거쳐 오사카(大阪)와 나라(奈良)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고적을 보고 매우 큰 감촉을 받았다. 또 이곳의 절에 도착해 몇 번을 물어보아도 그 신이 어디 계시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때문에 사촌동생은 그 투명인이 한 말에 대해 약간의 실망을 금치 못했다. 장군은 사촌동생과 가족들을 생각하며 말했다. “내 생각에 그 투명인이 우리에게 어디서 그 신을 만날 수 있는지 명확히 말해주지 않은 것 같다. 단지 우리에게 근접한 지방만 말해주었을 것이다. 이 때 우리 역시 반드시 그 신인을 찾아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나중에 그들은 나고야(名古屋)에 도착했고 후지산(富士山)을 거쳐 요코하마(横滨)로 갔다. 가는 길에 벚꽃이 예쁘게 핀 것을 보았다. 후지산에서 그들은 한 젊은 여자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녀는 말했다. “어느 신이 최근에 도쿄에 간다고 들었는데 그곳에 한번 가보세요.” 그래서 그들은 즉시 요코하마를 거쳐 도쿄로 갔다. 도쿄 교외에서 그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그 신이 여기에 오시는지 물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 모른다고 했다.

다음날 그들이 도쿄성에 도착했고 이곳에 한 사찰이 있었다. 이곳은 중국 수당(隋唐)시기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신전문화의 요소가 비교적 더 농후했다. 그들은 이곳의 조각상을 보고 마음속에서 희열이 일어났다. 그 신이 만약 나타나신다면 중국에서부터 그의 법리를 전하기 시작할 것이며 또 중국 전통문화와 일맥으로 서로 계승할 거라고 느꼈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한 젊은 승려가 내당에서 나와 주지스님께서 그들더러 잠시 들어오시라고 청한다고 말했다.

필경 장군이 한때 권력을 장악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비록 지금은 시골로 쫓겨나 집에 있지만 많은 이들이 그를 알아보았다. 그가 내당으로 들어가자 주지가 단정하게 차를 내어와 맛보게 했다.

그들이 한잔을 마신 후에 주지가 말했다.

“어젯밤 꿈에 당신들이 이곳에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신인이 제게 말씀하시길 당신들이 이곳에 온 후 당신들에게 장차 그 신인이 큰 바다 맞은편 대륙(중국의 북방)에서 생명이 구원받을 대법을 널리 전하기 시작하실 텐데 때가 되면 당신들 얻은 후 수행에 노력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울러 수행의 길에서 많은 곤란에 봉착할 것인데 당신들이 모두 일일이 극복해야 합니다.”

사촌동생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감동했다. ‘이렇게 긴 시간 찾은 끝에 마침내 결과를 얻었구나.’ 하지만 생각을 돌려보니 장차 장군과의 연분은 어떻게 될까? 사촌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주지 스님이 문득 말했다. “앞으로 ‘사촌 여동생’이란 이 명사가 마치 당신들 간의 연분을 잇는 매개체 일뿐입니다. 당신들 사이의 연분은 과거에 정말 매우 컸습니다. 하지만 그 일생은 또 안개 속에서 벚꽃이 후지산을 바라보는 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당신들이 만약 이미 법을 얻었다면 수행의 길을 잘 걸어가야 합니다. 이 단락의 경험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 당부를 기억했다.

나중에 장군 일행은 또 원래 왔던 길로 돌아가 자신이 신을 찾은 일을 주변 사람들에게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사람들은 매우 기뻤다. 나중에 장군일행은 집에서 줄곧 남매사이로 늙어갔다. 이런 것은 일일이 말하지 않는다.

금생에 사촌 여동생은 대륙에서 태어났는데 일본어를 배웠고 또 일본에 갔다. 법을 얻은 후에도 그녀는 순진하고 선량한 본성을 유지했다. 또 중공 사당이 파룬따파를 박해하는 세월동안 수많은 마난을 겪었다. 심지어 다년간 불법 판결을 받아 투옥되기도 했다. 지금은 마땅히 자유를 얻었을 텐데 그녀에게 모든 게 다 평안하기를 희망한다.

장군 역시 이미 법을 얻었다. 그들은 비록 매우 먼 거리에 떨어져 있지만 재미있는 것은 여러해 전 사촌 여동생이 우연히 편지(그 속에는 어린 사촌 여동생이라는 몇 글자와 단지 그와 인연이 있음을 느낀다는 언급만 있을 뿐)를 받았는데 그들 사이에서 금생의 연분을 연결해 주었다. 나중의 일은 정말로 그 주지스님이 말한 대로 “안개 속에서 벚꽃이 후지산을 바라보는 것”처럼 서로 이메일을 통해 한동안 격려만 할뿐 내왕이 전혀 없었으며 또 지금껏 만난 적도 없다.

세도나이카이를 관리하던 그 해신은 금생에 해남도(海南岛)의 바다에서 임무를 맡고 있다. 작년에 내가 해남도에 갔을 때 그에게 반드시 종전의 서약과 인간 세상에 온 근본 목적을 기억하라고 알려주었다.

또 그들에게 길을 알려준 여자와 사원의 주지 및 그 생의 몇몇 가족 등은 금생에 기본적으로 모두 일본에 태어났고 모두 이미 법을 얻었다.

특히 위안이 되는 것은 일본민족이 이번 세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미 법을 얻었고 견실하게 반본귀진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다음과 같았다.

富士神山櫻花豔(부사신산앵화염)找尋歸途路漫漫(조심귀도로만만)真心感動天和地(진심감동천화지)今朝得法群仙羨(금조득법군선선)

후지 신산의 어여쁜 벚꽃귀로를 찾는 길 느리고 느렸구나.진심(眞心)으로 하늘과 땅을 감동시키니금조(今朝)에 법을 얻어 뭇 신선 부러워하네!

주: 일본 야마토 민족(大和民族)이 법을 찾으러 다닌 윤회 이야기는 아직 많고도 많다. 하지만 개인의 정력과 시간의 한계로 일일이 쓰지는 않는다. 독자 여러분, 특히 일본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를 바란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