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석방행
【정견망】
북경의 자금성(紫禁城)을 말하자면 천하인들이 다 중국 고대사회에서 마지막까지 가장 휘황했던 곳임을 알고 있다. 만일 북경을 요, 금, 원, 명, 청의 도성이라 한다면 자금성은 바로 도성의 중심이며 모든 정권의 정치 및 문화의 핵심이다.
지금의 자금성은 명나라 성조(成祖 영락제)가 원나라 때 황궁(皇宮)의 기초 위에 지은 것이다. 자금성은 주로 명청(明淸)시기 제왕 및 후비들(后妃)의 처소였다.
자금성의 건축은 기본적으로 중화 전통문화 중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이념에 따라 지은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정견망이나 대기원 등에서 관련 문장을 참고할 수 있으니 여기서는 간략히 언급한다.
자금성은 건설 후 여러 차례 화재와 병란을 겪었고 많은 부분이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2016년 폭우에도 고궁의 배수계통이 아주 우수해서 또 다른 경치를 만들어 냈다. (상세한 것은 정견망의 《북경의 폭우에도 고궁에 물이 고이지 않아 600년 배수계통이 칭찬을 받다(北京暴雨故宮未積水 600年排水系統受誇贊)》라는 문장을 참조)
영락제를 언급한 김에 우리는 건문제(建文帝)를 말해보자. 건문제가 집권할 때 어진 정치로 백성을 사랑하는 정책을 펼쳤다. 나중에 번왕의 세력을 제거하려다 발생한 정난(靖難)의 변(變)으로 성조 주체(朱棣 영락제)가 정권을 잡았다. 이 과정에서 묘연해진 건문제의 행방은 중국 역사상 줄곧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사실 건문제의 부원신 중 한 분이 불타(佛陀)였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비교적 인자했다. 하지만 그가 정권을 잃는 일은 역시 역사에서 진작 배치된 일이었다. 극본이 잘 짜여 있었고 어느 시기가 되면 이렇게 연출된 것이다. 왜냐하면 정난의 변이 있었기 때문에 북경은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전국적인 수도와 중심이 된 것이다.
당초 원나라 때 북경은 한편으로는 수도로 된 시간이 비교적 짧았고 다른 한편 원나라는 필경 몽골 사람들이 건립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수많은 한인(漢人)들은 마음속으로 이 수도에 대한 인정이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아울러 당초 북경의 발전 정도도 한계가 있었다. 비록 마르코 폴로가의 《동방견문록》에서 북경을 천당처럼 묘사해놓긴 했지만 이는 북경을 서역이나 유럽의 일부 도시국가와 비교한 것에 불과하다. 당시의 북경은 강남의 부유한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또 하나는 이곳의 문화문제와 관련되는데 몽골문화와 한(漢)문화는 비록 둘 다 중화문화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일부이긴 하지만 도성으로 말하자면 어느 부분의 문화를 위주로 오늘날 사람에게 남겨놓는가 이것 역시 신이 잘 안배한 것이다.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원에 들어온 것을 포함하는데, 만주족의 문화 중에도 사실 몽골문화가 녹아 있는데 청나라 시기 통치자들이 자금성에 갖고 들어왔다.
여기까지 쓰고 나서 나는 갑자기 한 장면을 보았다. 청나라 만주족의 만몽(滿蒙)문화는 동북에 위치해 있다. 북경에서 대명(大明) 왕조 역시 한문화(漢文化)의 선진적이고 성숙한 특징을 융합해 들어갔기 때문에 2~300년에 동안 북경 자금성의 끊임없는 융합을 거쳤다. 이는 바로 중화 신전문화의 미래가 걸어가야 할 길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이는 또한 동북의 성인(聖人)이 중화문화(한, 청, 몽 등 다른 형제 민족의 문화를 모두 포함한 개념)를 모두 하나로 융합시켜 다시 휘황을 만들어낼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만약 헌원(軒轅)황제가 5천년 중화 신전문화를 개창하고 염제, 치우 등 부락과의 교전 중에서 민족의 융합을 촉진해서 중국 경계 내 각 민족의 시조가 되었다면 2천여 년을 지속한 왕조시대가 막을 내릴 때 이 최후왕조는 자연히 대통일의 특징인 민족융합과 영토확장을 지닐 것이며 또한 동북에서 왔다. 그럼 무엇 때문에 동북에서 오는가? 왜냐하면 다음 한걸음 역사의 큰 연극은 역사적으로 비교적 개발이 느렸던 동북에서 있을 것인데 다시 말해 개발 잠재력이 있는 지방에서 공연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대만은 중화 신전문화의 정화(精華)가 피난하는 장소가 된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일본의 동북 침략은 최종적으로 중공이 동북에서 먼저 커지게 했고 최종적으로 문화와 행정상으로 중토를 식민화했다. 이것은 이해하기 쉬운데 중공 정권을 잡은 자들이 외래에서 온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의 서방 공산 사악주의 이론으로 중국의 일을 지도했는데 이게 식민화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동북은 대청(大淸)의 발상지이자 일본의 중국 침략 기지였으며 중공이 가장 먼저 식민지로 만든 땅이자 더욱이 파룬따파(法輪大法)의 발상지다. 그 사이의 일체 정면적이거나 부면적인 표현은 모두 오늘날 대법을 전하는데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너무 멀리까진 말하지 않겠다. 남경이 함락되었을 때 궁궐 내에 큰 화재가 일어났는데 건문제는 분장을 하여 궁을 빠져나갔다. 이 역시 다른 신의 호위 하에 출가 수행한 것이다.
영락제는 당시 건문제의 죽음을 믿지 않았고 나중에 삼보태감(三寶太監) 정화(鄭和)를 서양에 파견했는데 그 목적 중 하나는 바로 건문제를 찾는 것이었다.
그 외의 목적은 대명(大明)의 국위를 선양하는 것이다. 근본목적은 도달하는 나라마다 중토의 문화를 앙모하게 하고 장래 창세주가 중토에서 널리 전하실 중생을 구도할 대법을 더욱 잘 인식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과정 중에서 중국인들은 가는 곳의 국가나 부락과 상업 교류 및 문화 교류를 하는 외에도 소수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현지인과 결혼해서 후손을 퍼뜨려 중화문화를 사방에 뿌리내리게 했으며 그곳 사람들이 중화문화와 더욱 깊은 구도의 연을 맺게 하기 위함이었다.
건문제를 말하니 우리 간략하게 순치(順治)황제를 말해보자. 순치제는 만주가 청나라 중원으로 들어온 후 첫 번째 황제다. 재주와 지략이 웅대하고 컸으며 천문지리에 통달했다고 하는데 자신과 후손들을 위해 풍수가 좋은 묘터를 (청동릉) 정해 놓았다고 한다. 나중에 어느 비(妃)가 세상을 뜨자 우울하여 슬퍼했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가 정에 이끌린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 전혀 그런 일이 아니다. 비가 세상을 떠난 후 그가 괴로워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그가 아직 전생에 빚진 정이었을 뿐이다. 다 갚은 후 그는 아무것도 얽매이지 않았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가 출가했다고 하거나 혹은 자금성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 있다. 사실 그 비가 젊어서 세상을 떠난 것은 순치에게 ‘인생무상’이란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그가 진정하게 입장을 바꾸어 이런 것을 느꼈을 때 그는 이미 철저히 깨달은 인생이었다.
사람들은 늘 수련에 대해 큰 오해를 하는데 한 사람이 인생에서 큰 좌절을 겪어서야 비로소 승려나 도사의 길에서 정신적인 안위를 구할 수 있다고 본다. 사실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소위 좌절이란 것은 일종의 ‘유인’으로 생명 깊은 곳의 그런 불성(佛性)을 격발시켜 이로부터 진리를 찾는 길을 걷게 할 뿐이다.
청나라 황족들은 일반적으로 다 불교를 믿었고 모두 아주 좋은 불연(佛緣)이 있었다. 순치제는 내원과 오성이 매우 높아서 이 일체가 모두 무상한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순조롭게 수행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대청 황실로서는 황제가 황위마저 버리고 출가 수행한다는 이것은 체면상 지나칠 수 없는 일이고 황실의 위엄에 손실이 되기에 순치제가 자금성에서 붕어했다고 말한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먼저 한무제의 한 가지 이야기로 머리말로 삼기로 하자 《한무제 내전》에 기록되기를 서왕모가 곤륜산에서 한무제의 궁전에 와서 연회가 끝나고 나중에 한무제에게 복숭아를 권한 일이 있었다.
“…… 시녀에게 명해 복숭아를 가져오게 했다. 잠시 후 쟁반에 복숭아 7개를 가져왔는데 큰 것은 오리알만하고 둥글고 푸른색이었다. 왕모는 그중 4개를 무제에게 주고 3개는 자기가 먹었다. 복숭아 맛이 매우 달콤하고 입안에 향기가 가득했다. 무제는 다 먹고 나서 복숭아 씨앗을 감추었다. 왕모가 ‘뭘 하려고 그러십니까?’하고 묻자, 무제는 ‘심어볼까 합니다.’라고 했다. 왕모는 ‘이 복숭아는 3천년에 한번 열매가 맺히는데 이곳의 땅은 척박하여 심어도 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제가 그만 두었다.”
작자는 서왕모의 말을 통해 선도(仙桃)의 평범하지 않는 경력을 말했다. 이게 끝이 아니다. 한무제는 비록 복숭아씨를 남겨 심지는 않았지만 기념으로 남겨두었다. 나중에 《완위여편(宛委餘編)》이란 책에서는 “(명나라) 홍무제 시기 원나라 내고(內庫 황실내부 창고)에 수장되어 있던 반도복숭아의 씨앗이 나왔는데 길이가 오촌에 폭이 4촌 7푼이나 되었고 거기에 ‘서왕모가 승화전에서 무제에게 먹으라고 내려준 반도복숭아(西王母賜食武帝蟠桃於承華殿)’ 라는 14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는 서왕모나 서왕모와 유관한 역사적 사적 중 마지막으로 나온 것으로 이후로는 서왕모에 관한 어떤 기록도 없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 고서적의 기록을 인용하는가? 내가 오늘 이 복숭아 씨앗이야기를 계속해서 말하려 하기 때문이다.
명나라 때 수행하느라 시집가지 않은 공주가 한명 있었다. 이 공주는 명나라 제 7대 황제 경태제의 딸인데 나중 사람은 그녀의 생몰 연대를 모르며 단지 시집가지 않고 수행으로 들어섰다는 것만 알고 있다. 오늘 우리 그녀를 말해보자.
이 공주는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사람과 달랐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좋아했는데 이 공주는 이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고 조용히 있기를 좋아했다. 당시 어느 늙은 하인이 늘 그녀를 돌보았다. 하인은 늘 그녀에게 고대의 수행에 관한 일을 말해주었다. 당시 궁이 비교적 혼란하여 황제는 늘 정무에 바빴고 국가도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녀는 이런 것에 상관하지 않고 오직 일심으로 수행만 생각하며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나중에 창고에 서왕모가 한무제에게 준 복숭아 씨앗(몇 개)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걸 꺼내보고 싶어 했다. 부황은 처음에는 응낙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재삼 간구하자 그렇게 해주겠다고 답했다.
그녀가 복숭아 씨앗 한 개를 수중에 넣었을 때 무의식중에 씨앗에게 말했다.
“서왕모님 당신은 어디 계시나요? 저도 이제 수행하고 싶어요!”
뜻밖에 그 복숭아 씨앗에서 어린 동자의 음성이 나와 말했다.
“나 여기는 서역의 곤륜산이야, 우리 이 군체에는 현재 120명이 수행하고 있단다(온 전체 곤륜산에 오직 이런 사람만이 수행한다는 뜻이 아님). 가장 연장자는 80대고 나는 가장 어려서 6살이야.”
공주는 좀 놀랐다. 머리를 들어 주위의 궁녀와 태감들을 쳐다보았는데 그녀들은 이 음성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아마 자기가 복숭아와 연분이 있으며 다른 사람은 듣지 못했는가보다 생각했다. 그래서 씨앗을 자기의 방에 가져가서 문을 닫고 복숭아 씨앗을 꺼내 상대에게 말했다. (사상을 사용하고 입을 사용하지 않음) 공주는 나이가 좀 많은 수행인과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 사람이 좀 더 많이 알테니.
그래서 복숭아 씨앗에게 말했다.
“그 쪽에 나이 많은 수행인과 이야기 좀 하게 해줘봐.”
그쪽에서 노수행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무엇을 알고 싶은가?”
공주는 호기심이 나서 물었다.
“그 어린 수행자가 말하기를 당신들 여기에는 120인이 수행한다고 했는데 그들의 이름을 좀 말해줄 수 있어요?”
그 수도인이 말했다.
“붓과 종이를 가져오게.”
공주가 붓과 종이를 가져왔다. 그 나이 든 수도인은 그 120인의 이름을 일일이 말해주었다. 공주는 이름을 받아쓰면서 매우 놀랐는데 그 이름 중에 자신이 아는 사람이 셋 있었다.
마지막에 그 사람은 공주에게 부탁했다.
“세상에 온 사명을 잊지 말아라!” 하고는 음성은 사라졌다.
공주는 여러 번 복숭아 씨앗을 꺼내어 다시 그와 대화를 하려고 했으나 더 이상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수행의 방법을 조용히 생각해보았다.
말로 하면 이상하지만 공주가 복숭아 씨앗으로 곤륜산 수행인과 소통한 후 얼마 후 그녀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장면과 일부 일의 연유를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황궁에서 놀러 다니다가 남쪽에서 운반해온 고급목재를 보면 그 목재는 무슨 신이 배치한 것인지, 무슨 특징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궁전 바닥 기초에서부터 처마, 화랑, 병풍 등 모든 것이 천상 어디서 온 품격의 표현인지 또는 어떤 재주 있는 장인이 건설하는 과정 중에 어느 신선이 지혜를 주었는지 등등. 다시 궁전 내의 각종 장식, 탁자, 의자, 등걸이 병풍, 가구, 도자기, 자수 등등을 보면 신의 지혜가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음을 볼 수 있었다. 한번은 각종 용(龍) 조각 도안을 보는데 그녀의 눈앞에 각종 용이 모인 화면이 나타났다. 각종 형태의 용이 함께 모여 연회를 하고 있으며 어떤 용은 춤을 추며 흥을 돋우고 있었고 검무를 추는 것도 있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용은 생김새가 같지 않으며 능력과 직책에서 모두 구별이 있는 것을 알았다. 인간의 일부 장인은 신의 안배 하에 이런 ‘공예품’을 만들어 낸다.(자금성 내에 있는 사람이 만든 모든 것을 포함) 표면적으로는 중화 전통문화의 천인합일의 사상과 이념에 부합한다.
이런 아름다운 것을 보고 공주는 생각했다. ‘신이 이 모든 것을 배치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설마 사람들이 신의 지혜와 능력을 경외하기 위한 것이며 더 다른 깊은 뜻이 없는 것일까?’ 그녀는 이 일에 때문에 궁 안의 유명한 도사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누구도 만족스런 답을 해주지 못했다. 어느 날 남쪽에서 진귀한 과일을 조공으로 바쳤다. 황제는 왕실 사람들에게 맛보라고 주었다. 공주가 손에 들었을 때 갑자기 한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어느 위대한 신이 손에 몇 개 씨앗이 들고 말했다.
“너희들은 인간 세상에 내려가면 반드시 창세주(創世主)께서 인간 세상에 와서 대법을 전하실 그날까지 견뎌야 한다. 그때가 되면 너희들도 구도받을 수 있다.” 그러면서 이 씨앗을 인간세상에 뿌렸다. 인간세상에서 이 종자는 성장하는 과정 중에 당시 환경과 기후 병충 야수 등의 제한을 받아 자라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자기 그 신선의 말을 잘 새기고 완강하게 살았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것들의 과실이 먹으면 매우 맛있고 달콤함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주거나 황제에게 진상하여 이 과실이 사방으로 퍼지게 되었다. 그것들은 원래 매우 큰 영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식객들과 인연을 맺는 과정 중 만일 정말 연이 있는 자를 만나거나 오성이 좋은 생명을 만나면 그것들이 전달하는 정보와 의의를 알 수 있다. 공주가 바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공주는 이 모든 것을 알고 나서 원래 이 모든 것은 장래 창세주께서 인간세상에 와서 대법을 전하는 길을 깔기 위한 것임을 알았다. 그럼 문제는 어떻게 창세주와 인연을 맺느냐? 때가 되어 어떻게 창제세주를 찾느냐 였다. 그녀는 또 자리에서 엎치락뒤치락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그녀 앞을 지나갈 때 늘 중얼거리는 것을 보았다.
“몸에 복이 있어도 복을 모르는 구나.” 몇 차례나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으나 나중에 갑자기 알았다. ‘현재 나의 몸이 창세주가 개창한 문화 환경 중에 있는게 아닐까, 이런 신전 문화의 대해 숭경과 앙모를 유지하고 있는 자체가 창세주와 연을 맺는 것이 아닐까? 내가 구태여 밖으로 찾을 필요가 있을까?’
이 모든 것을 알았을 때 그녀 앞에 서왕모가 나타나서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 한무제를 점화하기 위해서 그의 앞에 나타나서 복숭아 씨앗을 남겼고 나중에 연분을 이었다. 이번 조에 복숭아 씨앗으로 공주와의 연분을 이어가기가 정말 쉽지 않구나. 장래 너(공주)는 반드시 창세주께서 친히 전하시는 도를 얻을 것이며 또 북경에 있을 것이다. 또 이 명나라 사람들은 때가 되면 다른 나라에 가서 태어날 텐데 너는 장차 다른 나라에서 자기 가족을 위해 호소하고 분주히 뛰어다닐 것이다.”
공주는 자세한 것을 물어보려고 했으나 서왕모는 미소를 지으며 사라져갔다.
이 공주는 이런 것을 알고 수행하기로 결심했으며 장래 진정 창세주가 친히 전하는 도를 얻기 위해 문화와 인연을 다지기로 했다.
금조(今朝)에 공주의 부친은 파룬따파 창시인이 북경에서 일찍이 법을 전한 초기 수련생 중의 한명이 되었다. 나중에는 보도원이 되었다. 99년 7월 장쩌민이 중공사당과 함께 대법을 박해한 후 부친은 중형을 판결 받았다. 이때 그녀는 미국에 있었는데 부친과 중국 대륙에서 박해받는 파룬따파 수련인들을 위해 분주히 호소하며 다녔다. 나중에 16년이 지나서야 부친은 석방 되었으나 국내를 떠나려고 할 때 국경에서 출국 금지를 당했으며 현재 그들 부녀는 해외에서 만났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녀의 부친이 안전하길 희망한다.
바로 다음 시와 같았다.
수행의 선한 인연이 도핵과 연결되니영화부귀가 눈에 보이지 않누나.한마음으로 귀진으로 돌아가려 하나니금조에 법을 얻어 이전 소원 실현하누나.
수행선연도핵견(修行善緣桃核牽)영화부귀불입안(榮華富貴不入眼)일심지위귀진부(一心只爲歸真赴)금조득법태전원(今朝得法兌前願)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27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