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천년 윤회 속세의 인연

글/ 고도(古道)

【정견망】

SNS로 사귄 일본의 한 화인(華人) 동수가 있는데 주(周)나라 때 나는 무왕의 그녀와 주(紂)왕을 토벌한 인연이 있었다.

2014년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 법회에서 그녀를 만나 다음과 같은 역사를 알게 되었다.

고대 중국에서 나는 일찍이 그녀에게 《천유문촉찬역(天諭文囑撰譯)》이란 고서를 주었고 나중에 그녀가 주(紂)왕을 토벌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중국에 존재한다.

《천유문촉찬역》은 현대문으로 번역한 것이며 고문자는 이렇게 쓰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서주(西周)시기 문자에는 그것의 문자 함의와 쓰는 방법이 있었다.

원래 책은 가죽으로 썼는데 연대가 오래되자 표지가 낡고 내용도 일부 파손되었다. 세 차례 특수한 수정을 거쳐 죽편(竹片)으로 다시 만들었고 특수한 먹으로 새기고, 겉에는 방부제와 같은 식물성 액을 발라 제작했다. 나와 같은 계통에 있거나 인연이 깊은 사람들은 그 문장을 해독할 수 있으며 수련에 소질이 있는 사람은 내포를 알 수 있다. 나는 매번 전생할 때마다 모두 인연을 따라 나라를 개창한 이 책을 얻어 그것을 소장하거나 관련 인연이 있는 사람에게 전해주곤 했다.

《천유문촉찬역》은 결코 《육도(六韜)》가 아니다. 하지만 보존 제작 방식은 같은데 나중에 중국 역사에 죽편에 먹을 새겨 넣어 수천 년 동안 썩지 않게 할 수 있는 문서 보존 기술이 있게 되었다.


고서의 개략적인 모습

일반적으로 중국에서 가장 이른 서적은 상(商)나라 때 거북이 등껍질이나 동물 뼈에 새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부터 약 3000~3600년 전이다.

보존을 위해 갑골을 끈으로 묶었는데 이것이 초기 서적의 제본 형식이다.

상나라 후기부터 점점 청동기에 명문(銘文)으로 제작하는 방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주에 이르면 명문 공예로 비교적 많은 문자를 새겨 넣을 수 있었다. 죽간(竹簡)은 대략 서주 후기부터 시작되었고 서기 약 4세기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죽간은 종이를 발명하기 전 가장 대표적인 서적 제작법이었다. 그것은 문장의 장단에 근거하여 죽간의 숫자를 임의로 조정하며 마지막에는 아래위 두 갈래 끈에 꿰어 보존했다. 또 갈대 잎이나 비단으로 책을 만드는 법이 있었다. 깊이 연구하는 사람들은 직물로 주머니를 기워 그 속에 넣었다.

서주 이후의 문자는 상대(商代)문자에 비해 해독하기 더 좋은 조건이 있다. 세상에 전해진 고서 역시 점차 많아졌고 더 나중에 나온 문자일수록 비교할 수 있는 문헌이 더욱 많아졌다. 하지만 고고학자에게 있어 아무리 간단한 고문자의 해석이라도 그리 간단한 대조와 비교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형(字形)과 후세 글자의 형태를 비교해야 할뿐만 아니라 그 편방의 뜻을 분석해야 한다. 이를 통해 전반 문자체계 중에서 당시 글자의 뜻에 부합해야 하며 때로는 독음 방면의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천유문촉찬역》 고서의 내용은 함의가 넓고 깊으며 더욱이 경신(敬神), 전략, 치국(治國) 등 모든 문제에 관련되어 있으며 《육도》의 내함과 거의 동일한 체계에서 내원한다.

《천유문촉찬역》은 일찍이 무왕이 주나라 강산을 다지는데 사용되었다. 천유(天喻)란 경신(敬神), 치국, 전략, 생활, 법조(法條), 치수, 점성술, 지맥 관측 등 천인합일에 부합하는 고전 백과사전이다. 중공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신의 도움을 받아 돈화(敦化)로부터 보호되어 조남(洮南)을 거쳐 산서, 안휘 서쪽으로 갔다. 가는 길에 작은 도관이나 절(아직도 존재한다) 같은 것이 있는데 그 속에 암실 장서각이 있다. 오직 그 주지만이 이 암실을 알고 있었다. 그 속에 직경 2척의 오래된 기둥(용이 새겨진) 6개 중 왼쪽에서 세 번째 기둥 아래를 파면 이 치국전서를 얻을 수 있다. 8장(약 24미터)이나 파야 천유를 얻을 수 있는데 인연이 있는 사람만이 볼 수 있으며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무왕이 주를 토벌한 목야 전투가 있기 1년 전, 상나라 조야와 교외에서 무왕과 호위대를 만나 무왕을 뵙고 책을 전했다. 그 과정에서 수호대가 가로막은 자세한 내용을 말할 필요가 없다. 필경 수호하는 사람은 보통사람이며 수련하여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가까이 갈 수 없다. 당시 수호대는 5필의 말의 거리 이내만큼만 내 몸에 가까이 올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주무왕의 안전 범위 안으로 접근할 수 있었고 몇 마디 말을 한 후 그에게 이 책을 전한 후 떠났다.

그때 수련인의 신분은 하남 낙양인(洛陽人) 오기(吳祈)였다. 역사에는 이 방면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필경 역사의 안배는 사서에 기록하지 않았으며 당시 오직 무왕을 수호했던 사람들만 이 일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중국 대륙에서 민간 야사 중에 기록이 있거나 혹은 민요가 되어 ‘오기송천유(吳祈送天喻)’, ‘무왕제상주(武王除商紂) 등의 민간전설로 전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왕은 상나라를 멸한 후 인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친민(親民)시정과 경제정책을 시행했으며 결과적으로 민심을 재빨리 안정시키고 인정받았다. 무왕은 또 주나라 백성들의 생계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토지 관리를 재조정하고 주나라 개국 공신들에 대해 대대적인 분봉(分封)을 실시했다.

예를 들면 강상(姜尙 강자아)은 제(齊)에 봉하고 주공 단(旦)을 노(魯)에 봉했으며 소공(召公) 석(奭)을 연(燕)에 봉하고 숙선(叔鮮)을 관(管)에 봉하며 숙도(叔度)는 채(蔡)에 봉하는 등이다. 이것은 모두 신이 전한 천인합일의 치국 고서(古書)인 《천유문촉찬역》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나중에 여러 제후들이 무왕에게 신하를 칭한 건국 전략을 다진 것이다.

이 여동수와는 서주 시기부터 3천년 역사를 지난 지금에 와서야 재차 조사정법(助師正法)의 일을 만났다. 이 과정 중에 인간 세상에서 무수한 차례 전생했다. 하지만 서주보다 더 이른 시기에 연을 맺었고 아울러 다른 동수와는 황제(黃帝)시대부터 줄곧 중화민국 시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전생해왔다. 금생에 법을 얻어 수련하는 중에 대법이 먼지에 봉인된 기억을 조금씩 열어주었다.

더 깊은 과거로 가면 화면은 호한하고 금빛 찬란한 별나라의 대전(大殿)에 고정된다. 부동한 체계에서 온 최고의 주(主)와 왕(王)이 모두 창세성왕(創世聖王)의 주변을 여러 겹으로 둘러싸고 만(卍)자를 형성했다. 성왕의 가르침을 직접 보고 듣는 가운데 법음(法音)이 내 마음 속에 전달 되어왔다. 법육(法毓), 금화(金鏵), 혜진(惠塵), 문일(文逸), 서신(徐鯓), 여엄(麗嚴), 정매(正梅), 웅석(熊釋), 보경(寶慶)… 등 수많은 주와 왕들이 창세성왕의 수중으로부터 두 손으로 서약을 수기한 법인(法印)을 받고 각자 체계의 방대한 중생의 미래를 짊어지고 창세성왕을 따라 각 층차 대궁에서 아래로 내려갔으며 다시 각 천체 체계로 들어가 아래로 층층 내려갔다.

각층 천체 중에서 나는 일부 변화를 보았는데 이런 변화는 중간에서 일부 신불(神佛)이 각 층차의 왕과 서약한 사자(使者)가 되었고, 이 사자들이 각 층차의 신들로 하여금 서약을 맺게 했다. 아래로 삼계 내 각층 공간에 진입한 후에는 다시 각층 공간 부동한 층차의 신(神)・천인(天人)과 연을 맺었으며, 줄곧 인간 이 층 공간에 이르러 다시 두 개 지구를 거치며 전생해 중국 각 조대로 진입한 후 다시 보도(寶島)의 역사를 연역했다. 이 위대한 역사시기에 인간세상 매 조대(朝代)의 단련은 5천년 신이 인간에게 전한 도덕문화를 다지기 위한 것이자 또한 오늘날 법을 얻어 돌아갈 인연을 육성하기 위함이었다.

대법이 널리 전해지고 조사정법하는 오늘날 대법제자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하지만 어느 부분이든 법을 얻었다면 역시 사명과 책임이 있으며 모두 꼭 “법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무수히 많은 날들을 창세주께서 돌아오시길 기다려왔는데 말세에 이르러 창세주께서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신은 미혹 속의 당신을 일깨우고 있으며 우리 역시 당신을 위해 왔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9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