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월(曉月)
【정견망】
송조(宋朝)의 한 무명 시인이 남긴 《오도시(悟道詩)–도를 깨달은 시》가 있다. 오늘 다시 보니 아마도 한 가지 문제를 활연히 깨달은 것 같은데 또 아주 괜찮았다.
하루 종일 봄을 찾아도 봄을 찾지 못하고,
짚신 신고 산과 구름 속 두루 다녔네.
돌아와서는 웃으며 매화나무 밑을 지나려니,
봄은 매화 가지에 이미 무르익었더라.
盡日尋春不見春
芒鞋踏遍隴頭雲
歸來笑拈梅花嗅
春在枝頭已十分
“하루 종일 봄을 찾아도 봄을 찾지 못하고,
짚신 신고 산과 구름 속 두루 다녔네.”
시인이 여기서 봄을 찾는다는 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동경을 가리키는데 속세의 그런 종류가 아니라 수도(修道)의 길을 말한다. 시인은 이를 위해 무수히 많은 높은 산과 큰 강을 두루 다녔다. 그러나 그 어디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
시인은 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을까? 사실 많은 명산에 어디나 수도인이 있지만 그들은 모두 공능(功能)이 있다. 그들은 아마 시인의 마음속 집착을 보았을 것이고, 그래서 시인을 만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가도(賈島)의 시에서 “소나무 밑에서 동자에게 물으니(松下問童子) 스승은 약초를 캐러 갔다고(言師采藥去)” 하는 구절과 같은 원인이다. 당신이 집착을 내려놓지 못했을 때 당신은 그런 고층차의 수도인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돌아와서는 웃으며 매화나무 밑을 지나려니,
봄은 매화 가지에 이미 무르익었더라.”
문득 뒤를 돌아보니 시인은 매화를 발견했다. 그 싱그러운 향기에 그는 단번에 진정한 도리를 깨달았다. 소위 수도란 바로 마음을 닦는 것이다. 마치 매화처럼 고결(高潔)한 존재가 되어 매화의 향기(인간 세상의 정의와 선량)를 인간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 시인이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이 전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원래 깊은 산에 들어가 수행하고 싶어 했지만 나중에 세간에서 남들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으로 변했다. 사실 동방삭이 일찍이 “큰 은자는 저자에 숨고, 작은 은자는 산림에 숨는다(大隱隱於市,小隱隱山林)”고 말했다시피 진정한 은사는 흔히 다 인간 세상에 있다.
대법이 전해지기 시작했을 때 산림에 있던 은사(隱士)들은 오히려 대법이 인간 세상에 퍼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들은 앞을 다퉈 수행을 위해 산에서 나왔다.
이렇게 본다면 시인의 행동은 문제가 없으며, 인간 세상에 문화를 개창해 오늘날 대법이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뭇 신[衆神]이 세상에 내려온 책임이다. 혼자 산림에 숨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행동을 고대 관점에서 본다면 다소 부족함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다시 본다면 오히려 정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