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본선생
【정견망】
반도원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은 수련계의 신선들에게도 속속들이 알려졌다. 그리하여 많은 신선이 요진을 위로하러 곤륜산을 찾았으나, 요진은 누구도 만나지 않고 침전에서 홀로 누워 지냈다.
그 며칠 동안 사법천신부 밖에서는 탄식하는 신선들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오늘 마침 도하산인(渡河散人)과 여암진인(呂岩真人), 그리고 몇몇 신선이 사법천신 밖에서 만났다.
여암진인은 두 동강 났다 겨우 이어 붙여진 ‘사법천신부’ 현판을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요진의 자책이 참으로 깊겠구나!”
도하산인도 비통하게 말했다.
“내가 천목(天目)으로 그날의 일을 살펴보았으나, 결코 요진의 잘못이 아니었소.”
이어 그의 눈에 분노와 서글픔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누가 그랬는지 아오만….”
말을 아끼던 그는 무거운 한숨을 뱉었다.
“주봉(周峰)이 이미 온전치 못하게 되었으니, 누구를 탓하겠소? 그저 하늘의 재앙일 뿐….”
이때 청란과 희화가 나와 신선들을 안으로 청했다.
도하산인이 사양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선자님들. 당신들 주인께 전해주시오. 너무 슬퍼하지 마시라고, 결코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이오. 삼계는 여전히 그녀의 수호가 필요하며, 우리도 그녀가 반도원을 재건하기를 기다리고 있겠소.”
신선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기처럼 사라졌다.
요진은 수일째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침상에만 누워 있었다. 신체(神體)는 굶어 죽지 않는다 해도 야위기 마련이라, 요진의 모습은 며칠 새 몰라보게 수척해졌다.
어느 날, 청란이 다급하게 침전으로 뛰어 들어왔다.
“어서 일어나! 여와(女媧) 낭랑께서 사자를 보내셨어! 계속 누워 있으면 대불경죄야!”
비몽사몽 중에도 ‘여와 낭랑’이라는 이름에 요진은 몸을 일으켰다. 시녀들이 서둘러 머리를 빗기고 얼굴을 닦아주었다.
요진이 멍하니 물었다.
“여와 낭랑께서 어찌하여 나에게 사자를 보내셨단 말이냐?”
며칠 만에 처음 내뱉은 목소리였다.
청란이 재촉했다. “모르겠어, 어서 나가보자!”
의관을 정제한 요진이 당(堂)으로 나가니, 두 선리(仙使)가 구름 위에 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하얀 비단으로 덮인 물건이 들려 있었다.
요진이 예를 갖추자 선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와 낭랑께서 사법천신이 최근 신체(神體)가 불편하고 심사가 어지럽다 하시기에 선침(仙枕, 신선 베개) 하나를 내리셨습니다. 이 베개는 정신을 편안히 하고 숙면을 돕는 신묘한 효능이 있으니, 베고 잠들면 근래의 모든 번뇌가 씻은 듯 사라집니다.”
사자들이 사라지고 요진이 비단을 걷어보니, 아주 귀여운 새끼 백호(小白虎) 모양의 베개였다. 청란이 웃으며 말했다.
“이 아기 호랑이 베개, 너랑 참 닮았다!”
요진은 수척해진 얼굴로 베개를 안고 다시 침전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녀는 감로(甘露)를 몇 모금 마신 뒤 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다. 신선은 보통 꿈을 꾸지 않지만, 때로 다른 시공의 정경을 보는 깊은 ‘몽경(夢境)’에 빠지기도 한다. 이 베개는 정말 신기했다. 잠들자마자 요진을 상상치도 못한 기억 속으로 인도했다.
“혜희(慧曦)! 혜희!…..“
익숙하면서도 낯선 부름과 함께 요진은 한 흰옷 입은 소녀가 우주의 까마득한 심연에서 끝없이 추락하는 것을 보았다. 툭, 하고 삼계로 떨어지려던 찰나, 크고 부드러운 손 하나가 그녀를 받쳐 들었다.
거대한 손 위에 앉은 소녀가 눈을 뜨니, 자비롭기 그지없는 얼굴이 보였다. 푸르디푸른 머리카락, 순백의 가사, 자비롭고 상화(祥和)한 미소….
소녀가 물었다. “여기가 어디죠? 저는 누구죠?”
남색 머리의 부처님이 깊고 자비로운 음성으로 대답하셨다.
“이곳은 삼계이고, 너는 내 아이란다.”
이어서, 장면이 바뀌었다. 서너 살쯤 된 어린 공주가 땅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고, 곁에서 스승이 나무 막대기로 땅에 글자를 쓰고 있었다. ‘羊(양)’이란 글자였다.
“창힐(倉頡) 선생님, 이건 무슨 글자인가요?“
창힐이 인자하게 대답했다.
“전하, 이것은 ‘양’이란 글자입니다.” 그는 두 손가락을 머리 위에 대고 양 흉내를 내며 말했다. “메~ 하고 우는 양이지요. 선생님을 따라 읽어보세요. 양~.”
공주가 앳된 목소리로 따라 했다. “양~.” 요진은 문득 소녀의 인중 부분에 가물가물한 매화 무늬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이때 대여섯 살 된 어린 세자가 다친 양 한 마리를 안고 다가왔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공주는 가부좌를 풀고 달려갔다.
창힐이 “전하께선 참으로 개구쟁이십니다…” 하며 뒤따랐다.
창힐이 남자 아이를 보고 “태자 전하”라며 예를 올렸다.
어린 태자도 예를 갖추며 말했다.
“창힐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공주가 다친 양을 살피며 물었다.
“누가 양을 다치게 했어요?”
태자가 대답했다.
“숲속의 맹수겠지.”
어린 공주는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막대기를 들고 창힐에게 말했다.
“선생님, 양은 이렇게 쓰면 안 돼요. 뿔을 하나 더 그려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해야 해요!”
공주는 ‘양(羊)’자에 뿔 하나를 더해 삐뚤삐뚤하게 ‘羌(강)’자를 써 내려갔다.
그때 창힐이 듣고는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니 복희제가 보여 황급히 예를 올렸다.
어린 공주는 복희제를 보고 작은 팔을 벌리고 “아바마마, 안아주세요!” 하며 달려갔고, 복희제는 한 팔로 공주를 안고 다른 팔로 세자를 번쩍 안아 들고 곤륜산 정상에 올랐다.
복희제가 어린 공주에게 말했다.
“보아라, 저곳이 남주(南洲) 인간 세상이란다. 그곳의 생명들은 어린 양처럼 착하지만, 또 어린 양처럼 늘 상처를 입는단다.“
공주가 말했다.
“아바마마! 저들이 다치게 하지 마세요!”
복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버지가 나중에 인간 세상에 내려가 법을 전해 착한 양들이 다시는 다치지 않게 하마. 너도 나를 도와주겠느냐?“
어린 공주가 천진한 얼굴로 태양을 바라보며 당차게 말했다.
“네! 태양이 비치는 곳이라면 그 어디서도 사악함이 선량함을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
복희 대제가 허허 웃으며 세자에게 물었다.
“네 누이는 태양이 비치는 곳을 지키겠다는데, 오라버니의 뜻은 어떠하냐?”
어린 태자도 태양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소자는 저 태양이 되겠습니다!”
복희대제가 대견한 듯 크게 웃으며 말했다.
“좋구나!”
이때 선풍도골의 노인이 다가와 예를 갖추었다. 복희제가 태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거라, 가서 홍균(鴻鈞) 선생님과 공부해야지.”
어린 태자는 인사를 올린 후 홍균을 따라나섰다.
어린 공주가 다시 창힐과 글자 공부를 시작하자, 복희 대제가 땅에 씌어진 ‘강(羌)’이란 글자를 한참 보라보다 말했다.
“창힐, 이 글자를 만들어라.”
창힐이 예를 올리며 “성지를 받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요진이 흐릿한 눈을 뜨며 꿈에서 깨어났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아이들은 복희 대제와 여와 낭랑의 자녀, 즉 어린 시절의 동왕공과 서왕모였구나. 혜희라는 소녀는 어린 서왕모와 너무 닮았어. 그리고 복희 대제의 모습은 동궁 밀실에서 본 초상화와 똑같아…. 설마 복희 대제, 황제, 그리고 남색 머리의 부처님이 모두 한 분이신 걸까? 그런데 이 꿈이 나와 무슨 상관이지?’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려 요진은 다시 베개에 머리를 댔다.
곧이어 다시 꿈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여와 낭랑이 아기 호랑이 베개 두 개를 들고 자식들을 어루만지며 미소 짓고 있었다.
“어머니가 너희를 위해 베개를 만들었단다. 하나씩 나누어 가지렴.”
남매는 베개를 안고 무척 기뻐하며 매일 밤 그것을 베고 잠이 들었다.
점점 시간이 흘러 요진(瑤眞)은 그들 둘이 자란 것을 보았다. 그들은 복희(伏羲)와 여와(女媧)의 자식으로서 천지의 음양(陰陽)을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 있었기에,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부부의 연을 맺어야 했다.
이것은 성대하고 융중(隆重)한 혼례였다. 삼계(三界)의 수많은 신(神)이 참석했고 혼례장 밖에는 천병천장(天兵天將)이 수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진이 보기에 여러 신은 단지 축하하러 온 것만이 아니라 어떤 중요한 대사를 완성하러 온 듯했다. 신들의 장중한 표정을 보니 이 혼례가 결코 간단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혼례가 시작되자 요진은 한 신관(神官)이 힘차게 외치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하늘의 아들과 땅의 딸이 부부의 연을 맺어 천지의 음양을 바로잡노라. 음양이 서로 화합하니 만물이 법도에 따르고, 음양이 서로 의지하니 만사가 질서를 갖추게 되었으며….”
신관의 말이 끝난 후 비로소 두 사람은 배당(拜堂)의 예법을 행하기 시작했다.
요진은 꿈속에서 생각했다.
‘방금 서왕모(西王母)와 동왕공(東王公)이 성장한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그들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해야겠다.’
그리하여 요진은 꿈속에서 너울너울 신부 옆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신부의 붉은 면사포를 들추었다.
신부가 요진을 향해 살며시 미소 짓자 요진은 순간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알고 보니 네가 바로 나였구나!”
요진이 또 급히 고개를 돌리자 신랑 역시 그녀를 향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요진은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아택! 아택!”
“천신님, 천신님, 깨어나세요. 무슨 일이십니까?”
한 어린 시녀가 요진의 꿈을 깨웠다.
요진이 눈을 번쩍 뜨자 시녀가 급히 감로(甘露) 한 잔을 따랐다. 요진은 일어나 앉아 잔을 받아들더니 잔에 담긴 물을 자신의 얼굴에 뿌리며 어서 정신을 차리려 했다. 시녀들이 서둘러 얼굴을 닦아주자 요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설마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어.”
시녀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천신님, 왜 그러세요? 무엇이 아니라는 말씀이세요?”
요진은 의아해하면서도 걱정하는 시녀의 눈빛을 보더니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는 먼저 나가 있거라. 내가 좀 더 쉬어야겠다.”
요진은 다시 아기 호랑이 베개에 머리를 얹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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