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본선생
【정견망】
다음 날 아침, 풀더미 속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난 혜혜는 기지개를 켜며 비몽사몽간에 외쳤다.
“정아, 오늘 아침엔 어째서 훈향을 피우지 않았니? 방 안에서 흙냄새가 진동하는구나. 어서 향 수건을 가져오너라!”
정아는 잠이 덜 깬 아가씨를 보며 말했다.
“아가씨, 여기는 집안과 달라서 향 수건이 어디 있겠어요? 지금은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침대 삼아 지내시는데 당연히 흙냄새가 나지요.”
혜혜는 그제야 정신이 들어 몸을 일으켰다. 입구에서는 아도와 아묵이 여전히 단잠에 빠져 있었으나 장우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물었다.
“장우인은 어디 갔니?”
정아가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 보이지 않았어요.”
혜혜는 한참을 기다려도 그가 나타나지 않자 아도와 아묵을 깨웠고, 그들은 함께 장우인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사방을 샅샅이 뒤져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혜혜가 말했다.
“그날 업해흑령(業海黑靈)들이 장우인을 죽이려던 것을 내가 하나하나 소멸시켰는데, 혹시 남은 무리가 있어 장우인을 다시 잡아간 게 아닐까?”
아도와 아묵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놈들이 늘 말썽을 부리니 공자님께서 붙잡혀 가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혜혜가 초조하게 물었다.
“너희는 업해흑령의 소굴이 어디인지 아느냐?”
“압니다. 동쪽으로 머지 않은 곳에 있는 명자기사(冥皉棋社)입니다.”
아도가 대답했다.
“좋아, 너희는 먼저 돌아가 있거라. 내가 가서 보마.”
그리하여 혜혜는 말을 타고 동쪽으로 향했다.
혜혜는 길을 가며 생각했다.
‘그런 도적 떼의 소굴 이름이 기사(棋社)라니 참으로 이상하구나.’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새 말발굽은 명자기사라고 적힌 현판 아래에 닿아 있었다.
혜혜가 천천히 대당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은 매우 고요했다. 앞뜰에는 찻상 하나만 놓여 있을 뿐 사람도 없었고 바둑판 하나 차려져 있지 않았다.
“게 아무도 없느냐?”
안쪽에서 흰 수염의 노인이 걸어 나왔는데, 인상이 꽤 선해 보였다.
혜혜가 물었다.
“어르신,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장우인이 이곳에 있습니까?”
“장우인이 당신과 어떤 사이인가?”
노인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혜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했다.
“그분이 제 낭군입니다.”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가 당신의 낭군이라는데, 그는 수련하는데 당신은 왜 수련하지 않소?”
혜혜가 다시 물었다.
“장우인이 이곳에 있긴 한가요?”
노인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
“그는 이미 내 곁을 떠났지만, 당신은 아직 내 곁에 있소.”
혜혜는 장우인이 없다는 말을 듣자마자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그런데 문이 휙 하고 닫히더니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이왕 왔으니 서둘러 가지 말고 네 바둑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한번 보고 가시게!”
혜혜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장가만은 곳곳에 현기(玄機)가 숨어 있으니, 여기서 한번 살펴보는 것도 나쁠 건 없겠지.’
혜혜는 몸을 돌려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했다.
노인이 몸을 돌려 두 팔을 휘두르자, 갑자기 대당의 삼면 벽 위로 방들이 층층이 나타났다. 방들은 다닥다닥 붙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 노인이 입으로 중얼거렸다.
“양혜혜라, 양혜혜가 어디 있더라…… 오, 찾았군. 여기 있네!”
노인이 방 하나를 지목하고 손을 휘두르자 ‘탁’ 하고 문이 열렸다. 노인이 말했다.
“허! 나쁘지 않군. 백돌(白子)이 꽤 많아.”
혜혜가 보니 그 방 안에는 바둑판 하나가 있고 공중에 흑백의 바둑알들이 떠 있었는데, 흑돌은 적고 백돌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리로 와서 한판 두자꾸나. 자네가 백을 잡고 내가 흑을 잡지.”
혜혜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저는 남의 덕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어르신 바둑알이 저렇게 적으니 제가 몇 수 양보해 드리겠습니다.”
“하하, 그럴 필요 없네. 다 자네 것이네.” 노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혜혜는 노인과 대국을 시작했다. 대국이라고는 하나 두 사람의 수법은 매우 기괴했다.
혜혜는 처음 온 곳이라 상대의 실력과 수법을 파악하지 못해 공격하지 못하고 수비만 했다. 그런데 노인은 더 이상했다. 그는 공격도 수비도 하지 않고, 마치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아이가 옆에 돌을 늘어놓는 것처럼 두었다.
두 사람 모두 공격하지 않으니 바둑판 위에는 마치 서로 간섭하지 않는 두 개의 작은 나라가 형성된 듯했다.
혜혜는 이 기이한 수법을 보며 생각했다.
‘바둑이란 게 결국 포석을 짜고 함정을 파고 땅을 넓혀 성을 공격하는 것이지. 두고 봐도 결국 그런 것들일 텐데 시간만 낭비하는구나.’
이 노인이 어떤 미궁을 짜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누가 이기든 지든 상관하지 말고 빨리 끝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혜혜가 공격을 시작했으나 노인은 여전히 공격도 하지 않고 수비도 하지 않았다. 간단히 몇 수를 둔 뒤 혜혜는 바둑알 하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포위 섬멸입니다.”
노인의 흑돌 일곱 알을 빽빽하게 에워싸고 고개를 들었다.
노인은 바둑판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고맙군.”
혜혜가 의아해하며 다시 바둑판을 보니, 놀랍게도 그녀의 백돌들이 하나둘 흑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백돌 일곱 알이 모두 검게 변하고서야 변화가 멈췄다.
혜혜가 다시 고개를 들고 말했다.
“이것은 세간의 바둑 규칙이 아니군요. 저 같은 ‘세간 사람’이 이런 ‘출세간(出世間)’의 바둑을 두러 왔으니, 어찌 둘 줄 알겠으며 어찌 이길 수 있겠습니까?”
노인이 찬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성(悟性)이 좋구나!”
말을 마친 노인은 다시 묵묵히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이 출세간의 바둑 규칙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녀에게 알려줄 기색이 없었다.
혜혜도 묵묵히 바둑판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영감이 떠올랐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몇 수의 ‘반대되는 수’를 두었다. 어떤 방식인가 하면, 백돌이 공격과 수비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발적으로 흑돌 진영으로 들어가는 식이었다. 흑돌은 백돌을 한 알이라도 먹을까 봐 담을 허물며 요리조리 피하기 바빴다.
하지만 결국 흑돌이 미처 피하지 못하자, 혜혜는 바둑알 하나를 집어 들고 바둑판에 내려놓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맞보내기입니다.”
세간의 바둑 규칙으로 보자면 지금의 국면은 백돌이 흑돌에 스물여덟 알이나 먹혀 이미 패배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이 흑돌들이 천천히 흰색으로 변하기 시작하더니 스물여덟 알 모두가 백색이 되고서야 멈추었다. 이제 바둑판 위에는 온통 백돌뿐이었다.
“하하하! 아가씨의 근기와 오성이 이와 같으니 내가 선물을 하나 주지!”
노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졌고, ‘탁’ 소리와 함께 방 문이 닫혔다. 공중에 떠 있는 흑백 바둑알들과 함께 혜혜만 방 안에 남겨졌다.
갑자기 흑돌들이 순식간에 온갖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변하더니 혜혜에게 달려들었다!
혜혜는 크게 놀라 소리쳤다.
“업해흑령이다!”
손에 아무런 무기도 없던 혜혜는 방 안에 갇힌 채 공포에 질려 머리를 감싸고 구석으로 숨었다.
한 흑령(黑靈)이 그녀를 비웃었다.
“하하하! 이 커다란 바보 같으니! 양씨네 대바보! 하하하…….”
또 다른 흑령이 욕설을 퍼부었다.
“사람 같지도 않은 개 같은 것! 머리는 왜 감싸고 있어! 이 개 같은 것…….”
혜혜가 눈을 뜨고 보니 험악한 흑령들이 달려들어 그녀를 할퀴고 물어뜯으며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다.
혜혜는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흑령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고, 몽롱한 시야 속에서 자신을 에워싼 백돌들이 보였다. 그녀는 서서히 벽을 짚고 일어났다.
갑자기 벽 너머 구석에 숨어 있던 흑령 하나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 흑령은 흉측한 토끼 머리를 하고 손에는 활과 화살을 든 채 혜혜를 노려보며 표독스럽게 말했다.
“네가 정(情) 때문에 나를 죽였지. 내게는 아직 키워야 할 자식이 셋이나 남았다는 걸 네가 알기나 해? 오늘 기어이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화살 한 발이 혜혜의 왼쪽 가슴에 꽂혔고, 혜혜는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이 무렵 정아와 아도, 아묵은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도가 위층으로 올라가 보니 공자가 이미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아도가 말했다.
“공자님, 돌아오셨으면 말씀을 하시지 그랬습니까? 저희는 나쁜 사람들에게 잡혀가신 줄 알았습니다! 부인께서 기사로 찾으러 가셨단 말입니다!”
장우인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도는 고개를 저으며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정아는 줄곧 아가씨의 안위가 걱정되어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아가씨가 분명 전생에 저분에게 빚을 졌나 봐요……. 이번엔 또 어떤 험한 일을 당하실지……. 하느님 맙소사, 우리 아가씨는 순진하고 착하니 제발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세요…….”
한참을 기다려 날이 저물었는데도 아가씨가 돌아오지 않자, 정아는 문가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새벽이슬의 서늘함에 정아가 몸을 떨며 깼을 때, 갑자기 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정아가 고개를 들어 보니 창목의 등 위에 혜혜가 타고 있었는데, 그녀는 말 등에 엎드린 채 가슴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악! 사람 살려! 사람 살려요!” 정아의 비명에 놀란 아도와 아목이 황급히 집 밖으로 뛰어 나왔다.
사람들이 서둘러 혜혜를 말 위에서 내렸을 때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그들은 급히 그녀를 침대로 옮겼다.
혜혜의 가슴에는 화살이 박힌 채 그대로였다. 정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빨리 의원을 불러오세요. 안 그러면 아가씨가 죽고 말 거예요!”
아도와 아묵은 허둥지둥 의원을 찾아 달려 나갔다. 이때 혜혜가 정신을 차렸다. 온몸의 상처로 인한 고통을 견디며 그녀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그는 명자기사에…… 없었어.”
정아가 울며 말했다.
“아가씨, 이제 제발 그분을 상관하지 마세요, 네? 그분은 아묵 일도 없이 벌써 집에 돌아와 있었단 말이에요. 아가씨는 생명이 위태로운데 그분은 위층에 편안히 앉아만 있어요. 그런 사람을 아가씨가 왜 챙기시는 거예요?”
고통 속에 있던 혜혜는 “당신은 생명이 위태로운데 그는 위층에 편안히 앉아 있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위장이 뒤틀리는 통증을 느끼며 선혈 한 모금을 더 토해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웃음을 지었다. 웃으며 눈물을 흘리더니 서서히 눈을 감았다. 정아가 아무리 불러도 그녀는 다시 눈을 뜨려 하지 않았고,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5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