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희(雲熙)
【정견망】
제단 가의 소나무는 그대로인데 학의 둥지는 비어 있고,
흰 사슴만이 옛 오솔길을 한가로이 거니네.
생전에 직접 심은 붉은 복숭아꽃 천 그루가 피어났건만,
꽃 만발한 산은 주인 없이 봄바람에 맡겨졌구나
壇邊松在鶴巢空
白鹿閑行舊徑中
手植紅桃千樹發
滿山無主任春風
유우석(劉禹錫, 772년-842년)은 자가 몽득(夢得)이고, 본관은 하남 낙양(洛陽)이며 정주 형양에서 태어났다. 한(漢) 중산정왕의 후예다. 당대(唐代)의 유명한 문학가이자 철학가로, ‘시호(詩豪)’라 일컬어진다.
이 시 《상도원설도사(傷桃源薛道士)–도원 설도사를 잃고》는 유우석이 벗인 설도사가 세상을 떠난 후, 고인을 추억하며 지은 한 편의 애도 시다.
“제단 가의 소나무는 그대로인데 학의 둥지는 비어 있고,
흰 사슴만이 옛 오솔길을 한가로이 거니네.”
소나무는 그대로인데 학의 둥지는 비어 있으니, 벗이 학을 타고 서방으로 떠나간 듯한 뜻이 담겨 있다. 백록(흰 사슴)은 여전히 익숙한 오솔길 사이를 한가로이 거닐고 있으니, 산속의 모든 것은 일찍이 변하지 않은 듯하여 마치 고인이 여전히 그사이에 있어 결코 진정으로 떠나지 않은 것 같다.
이때 시인의 심정은 아마도 복잡하고 심오했을 것이다. 고인이 떠난 실의도 있겠지만, 또한 담담한 흔쾌함과 축원도 있었을 것이다. 설도사는 어쨌든 수도인이었기에, 시인은 아마도 벗이 진정으로 소멸한 것이 아니라 이미 도를 얻어 멀리 떠나 더욱 높고 먼 경지로 돌아갔다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생전에 직접 심은 붉은 복숭아꽃 천 그루가 피어났건만,
꽃 만발한 산은 주인 없어 봄바람에 맡겨졌구나.”
생전에 벗이 손수 심었던 복숭아나무는 이제 무성한 숲을 이루었다. 봄바람은 의구하게 온 산에 불어오건만, 복숭아 숲의 주인은 이미 인간 세상에 없다.
이 구절에서 서글픈 느낌이 더욱 간절하다. 복숭아꽃은 여전히 해마다 흐드러지게 피고 자연은 여전히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일찍이 나무를 심었던 사람은 이미 떠났다. 사람과 풍경 사이에 강렬한 대조가 형성되어 인생무상과 세상사가 꿈과 같음을 더욱 드러낸다.
그러나 시 속의 슬픔은 무겁거나 절망적이지 않다. 시인이 그리워하는 대상은 명리에 집착하거나 진세(塵世 티끌 세상)를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수도인이기 때문이다. 수도하는 사람은 본래 지향하는 바가 인간 세상의 번화함에 있지 않고, 공명이나 이록(利祿)에 갇히지 않으며, 생사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인의 슬픔 속에는 사실 일종의 이해와 달관이 담겨 있다.
벗의 떠남은 매우 평온해 보인다. 성대한 장례식도 없고 시끄러운 인세의 비환(悲歡)도 없다. 제단도 그대로이고 소나무도 그대로이며, 백록도 그대로이고 복숭아숲도 그대로다. 마치 그는 단지 조용히 진세를 떠난 듯하며, 봄바람처럼 소리도 흔적도 없다.
아마도 시인이 다시 옛곳을 찾았을 때에야 산바람과 복숭아꽃 사이에서 다시 옛날의 세월을 기억해낼 것이다.
청청백백하게 왔다가 깨끗하게 떠나간다.
이러한 담담함은 어떤 의미에서 생사를 내려놓은 것이기도 하다.
사람은 흔히 생사를 지극히 무겁게 보는데, 사람이 세간에 살며 늘 정(情), 리(利), 득실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반드시 사망 그 자체는 아니며, 생명의 진정한 방향을 잃는 것이다.
생명은 무엇을 위해 왔는가? 이것은 예부터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사고해 온 문제다. 인간 세상은 아마 본래 여관과 같아서 만남과 헤어짐 모두 과정일 뿐이다. 떠남 또한 반드시 진정한 종결은 아니다. 어떤 이는 아마 윤회 전생할 것이고, 어떤 이는 아마 수행하여 원만(圓滿)에 도달해 진정으로 자신이 속한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진정으로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유한한 인생 속에서 생명의 의의를 명백히 알 수 있고, 선량과 정념(正念)을 지키며 욕망과 원한에 휩싸이지 않는 것이다.
아마 이때의 유우석도 바로 복숭아꽃과 봄바람 사이에서 이러한 것들을 감개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시인이 도대체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결국 시인 자신만이 알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설도사와 같은 수도인이 추구한 것은 결코 인간 세상의 명리에 있지 않고, 더욱 높고 멀며 더욱 순결한 귀숙(歸宿)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미 그러하다면 어찌 이별의 슬픔에 과도하게 빠져들 필요가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