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섬(纖纖)
【정견망】
대나무 밑 소나무 뿌리에 익숙해진 적막,
감히 복숭아꽃과 오얏꽃 따라 아첨하는 무리들처럼 굴겠는가.
높은 이름은 《이소》 책을 압도하지만,
《이소》에 들지 않아도 스스로 더 고결하네.
竹底松根慣寂寥,肯隨桃李媚兒曹。
高名壓盡《離騷》卷,不入《離騷》更自高。
허비는 자가 침부(忱夫) 혹은 침부(枕父)이고, 호는 매옥(梅屋)이며, 해염(海鹽) 사람이다. 출생과 사망 연도는 미상인데 대략 남송 이종(理宗) 시기에 살았다. 가희(嘉熙) 연간에 진계(秦溪)에 은거했고, 계곡 북쪽에 작은 집을 지었으며, 집 주위에 매화나무를 두루 심었기에 자호를 ‘매옥’이라 했다.
허비는 《매옥시고(梅屋詩稿)》, 《융춘소철(融春小綴)》, 《매옥삼고(梅屋三稿)》, 《매옥사고(梅屋四稿)》, 《잡저(雜著)》, 《초담(樵談)》, 《헌추집(獻醜集)》 등을 저술했다.
이 시 《난꽃》은 영물시(詠物詩)인 동시에 자신의 뜻을 기탁한 깨달음의 시이기도 하다. 시인은 표면적으로는 난꽃을 찬미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난꽃이 산림에 그윽이 거처하며 세속에 아첨하지 않는 품격을 빌려, 명예와 이익을 담담히 여기고 번잡한 세상을 멀리하는 자신의 인생 태도를 표현하고 있다.
“대나무 밑 소나무 뿌리에 익숙해진 적막,
감히 복숭아꽃과 오얏꽃 따라 아첨하는 무리들처럼 굴겠는가.”
난꽃은 대나무 숲 아래와 소나무 뿌리 곁에서 자라나 이미 산야 속의 청유(淸幽)함과 적막함에 익숙해져 있는데, 어찌 감히 복숭아꽃이나 오얏꽃처럼 봄날을 다투어 뽐내며 화려한 색깔로 세속의 사람들을 기쁘게 하겠는가?
난꽃이 진정으로 의도적으로 소나무와 대나무를 벗으로 선택한 것은 아니겠지만, 시인의 붓 아래에서는 식물도 자신만의 품격과 지조를 지니게 된다. 소나무·대나무·난꽃은 똑같이 그윽하고 고요한 곳에 함께 처하여 서로를 비추어주니, 모두 맑고 우아하며 고결하고 적막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질을 띠고 있다. 복숭아꽃과 오얏꽃은 비록 아름답고 눈부시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다투어 피어나며 세속에 영합하는 모습을 쉽게 연상케 한다. 시인은 이를 비교해 세속에 아첨하지 않고 총애를 다투지 않는 난꽃의 품격을 찬미한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사물은 같은 류끼리 모이고, 사람은 무리로 나뉜다(物以類聚, 人以群分)”고 말한다. 시인의 눈에 비친 난꽃이 대나무 아래와 소나무 뿌리에 난 까닭은, 마치 서로 뜻이 잘 맞기 때문인 듯하다. 모두 적막을 견딜 수 있고, 또한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얻고자 자신을 바꾸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쓴 것은 물론 난꽃뿐만이 아니며, 바로 시인 자신을 쓴 것이다. 그가 은거를 선택하고 산수에 마음을 기탁한 것은, 관직에 나아갈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기 싫었으며, 더욱이 세속에 영합하는 방식을 빌려 공명을 바꾸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높은 이름은 《이소》 책을 압도하지만,
《이소》에 들지 않아도 스스로 더 고결하네.”
굴원(屈原)은 《이소(離騷)》에서 거듭 향초를 읊으며 난꽃으로 고결한 품격을 상징했다. 수천 년 동안 난꽃은 또 《이소》의 찬송 덕분에 천하에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허비는 한 층 더 나아가 뒤집어 말한다. 난꽃의 고결함은 《이소》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며, 설령 《이소》가 그것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그윽한 향기를 스스로 지키며 품격이 고결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소》에 들지 않아도 스스로 더 고결하다”는 것은 《이소》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난꽃의 가치는 바로 그 자체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유명한 문학 작품이 난꽃의 아름다운 이름을 드날려 줄 수 있을지언정, 난꽃에게 고결한 본질을 부여해 줄 수는 없다. 난꽃은 굴원의 찬미를 받았다고 해서 귀해지는 것도 아니고, 아무도 시를 짓지 않는다고 해서 향기를 잃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제갈량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이들은 유비가 삼고초려(三顧草廬)했기에 제갈량을 성취시켰다고 여길지 모른다. 사실 제갈량은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이미 천하를 가슴에 품는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유비의 예우는 그의 재능이 발휘되도록 만들었고 그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게 만들었을 뿐, 유비가 그의 재능과 가치를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제갈량이 세상에 나온 것은 그만의 사명이 있었고, 그가 반드시 완수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를 예로 든 것은 오직 한 사람의 진정한 재능과 품격이란 외적인 명성과 지위에 의해 조성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난꽃이 본래부터 고결한 것이 《이소》에 들어갔기 때문에 군자의 꽃이 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허비가 난꽃을 추앙한 것은 비단 난꽃의 그윽한 향기와 자태를 감상한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신이 배우고 지향하는 본보기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가 그윽한 은거 생활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공명을 위해 세속에 영합하고 싶지 않았고, 외부의 찬양에 기대어 자신을 증명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외적인 명칭을 빌려 자신의 몸값을 높일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유명한 스승을 찾곤 하는데, 이는 진심으로 학문을 구하고 자신을 향상시키려 함이 아니라 스승의 명성을 빌려 자신에게 광채를 더하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지위를 쫓는데, 이 역시 책임을 담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직분을 통해 다른 사람의 존중을 얻으려 희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들의 이면에는 모두 명(名)에 대한 집착이 도사리고 있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끊임없이 인생의 의미를 사유해 왔다. 어떤 이들은 인생의 가치가 공을 성취해 명성을 얻고 조상을 빛내며 재산을 축적하는 데 있다고 여긴다. 또 어떤 이들은 명예와 이익, 부귀란 그저 뜬구름 같은 것일 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마음의 청정함과 자재로움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오늘날 대법(大法)이 널리 전해진 후에야 비로소 사람이 세상에 온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밝혀졌다. 즉 사람은 법을 얻고 수련해서 원만(圓滿)을 이루어, 최종에는 자신이 진정으로 온 천국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법을 얻기를 기다리는 기나긴 과정 속에서 사람은 선념(善念)을 지키고 양심을 유지해야 하며, 명리의 유혹으로 인해 자신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물론 명리를 초연하게 본다고 해서 반드시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마땅히 자신에게 속해야 할 것이라면 억지로 거부할 필요가 없고,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이 아닌 경우에도 억지로 탐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을 순리대로 자연스러움에 맡기고 평화로운 마음가짐으로 얻고 잃음을 대하는 것이야말로 더욱 이성적인 선택이다.
허비가 이 시 《난꽃》에서 표현한 것은 다툼을 멀리하고 명예와 이익을 초연히 지키며 스스로를 지키는 일종의 인생 지향이다. 시인의 선택에는 비록 개인의 처지와 성격상의 한계가 깃들어 있을지라도, 그의 내면세계를 진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난꽃은 그윽한 골짜기에서 자라나 아무도 감상해주지 않아도 여전히 향기를 뿜어낸다. 복숭아꽃이나 오얏꽃과 봄을 다투지 않고, 《이소》에 의지해 신분을 높이지도 않는다. 사람이 만약 난꽃처럼 명리에 좌우되지 않고, 아무도 칭찬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의 착한 마음과 절개를 바꾸지 않는다면, 명예를 담담히 여기고 자신을 지키는 이런 마음가짐은 여전히 사람들이 배울 가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