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허여
【정견뉴스】
인류 역사상 일부 왕국이 사라지거나 문명이 훼멸된 것은 지금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다. 대표적인 것인 중국의 누란고성(樓蘭古城)과 전설의 아틀란티스 문명 등이다. 하지만 어떤 수련인은 공능을 통해 그들이 사라진 배후의 원인을 볼 수 있다.
누란고성이 사라진 이유
옛날 실크로드에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상인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던 누란이란 성이 있었다. 한나라의 역사가 사마천은 《/span>사기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누란, 고사읍에는 성곽이 있고 소금 호수가 있다. 누란에는 옥이 나며 쑥과 갈대, 특이한 버드나무, 백양나무 등 온갖 초목이 많고 백성들은 물풀을 따라 나귀, 말, 낙타 등을 기르는 목축에 종사한다.” 기원전 77년 누란 지역은 이미 서역에서 농업이 발달한 오아시스였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보리를 심고 소와 양을 키우며 하늘이 내려준 옥토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누란성은 4세기 이후 더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20세기 초 스웨덴의 탐험가 스벤 헤딘이 오늘날 신강의 파음곽릉(巴音郭楞 바인궈롱) 몽골족 자치주의 약강현(若羌縣) 북쪽 나포박(羅布泊) 서쪽, 공작하도(孔雀河道)의 남쪽 7킬로미터 밖에서 누란 왕국의 유적지를 발굴했다. 그렇다면 누란 왕국은 대체 어떻게 사라졌을까?
정견망에 발표된 한 수련인의 글에서 누란의 최후 시각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황사가 누란을 파묻는 것을 보았고 누란인은 도덕이 떨어져 이미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란이 사라지는 마지막을 본 것은 오직 나와 너뿐이다!”
우리 이 수련인을 따라 역사의 시공으로 들어가 보자. 313년 당시 누란성은 건축이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웠으며 사각형 연못이 있었다. 성 안의 건축 역시 반듯한 장방형이었으며 뾰족한 지붕이 있었다. 성 중앙에는 검은 천단(天壇)이 있었는데 5층천과 통해 천신(天神)을 모셨다. 또 지단이 있었는데 5층지로 통해 지신(地神)을 모셨다. 수신(水神) 라포(羅布)는 청결한 호수 중에 은신해 있고 이곳의 물과 흙을 윤택하게 하며 수초를 비옥하고 생기가 넘치게 했다.
이때 누란은 매우 부유했는데 젊은 국왕이 한 대신의 딸을 좋아했다. 그는 온갖 재산을 다 쓰며 호화로운 혼례를 올렸다.
결혼 후 국왕은 왕후를 몹시 사랑했다. 몇 년 후 왕후가 왕자를 낳자 이름을 내등(奈騰)이라 지었다. 7년 후 왕후는 또 아이를 가졌다. 아이가 생긴 지 5개월이 되었을 때 성안에서 동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가장 아름다운 공주님, 금색의 실, 가장 깨어있는 사람이 실을 보았네.” 동요는 날마다 퍼져나갔고 국왕과 왕후는 동요를 알고 갑갑했다. 하늘의 뜻은 사람들에게 왕후가 공주를 낳을 것을 알게 하는 것인가? 실크로드가 누란국을 더 부유하게 해줄 것인가?
국왕과 왕후는 꽤 법력이 있는 국사(國師) 누명(婁明)을 불렀다. 누명은 “동요가 3개월 정도 더 퍼져야 하니 두 분께선 국가를 위해 기도하고 예불을 열심히 하셔야합니다, 나태해지시면 안 됩니다.”
공주가 탄생하기 전 국사는 예불하다 부처님의 뜻을 알았다. ‘공주를 보호하고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하며 그녀의 평생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주가 탄생할 때 왕후는 온 집안 가득 향기를 맡았고 향기는 며칠이 지나서야 흩어졌다. 왕후는 공주에게 향가아(香可兒)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향가아는 점점 자라 국왕의 많은 총애를 받았다. 그녀는 큰 눈을 가졌고 긴 눈썹과 높은 코에 피부가 백옥 같았다. 용모는 뛰어났고 생글생글 웃으며 연한 향기가 났다. 국왕은 공주가 자란 후 누란국의 최고의 찬란한 진주가 될 거라고 했다.
국왕은 늘 향가아를 데리고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 그때마다 향가아의 경건함에 국사는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국사는 왕후에게 말했다. “저는 공주님이 순정한 마음으로 불전에 절을 하는데 공주님의 맑은 두 눈동자에서 천국의 빛을 보았습니다.”
공주가 13살 때 모후에게 말했다. “저는 출가해서 수행하고자 합니다.” 국왕이 듣고는 대노하여 향가아를 연금시켰다. 그러면서 3개월 안에 생각을 바꿔야 하며 마음을 바꾼다면 자유를 주겠노라고 했다. 왕후가 아무리 부탁해도 소용이 없었다. 국왕은 왕후와의 접견조차 거부했다.
당시 동방과 서방에서 성을 혼란케 하는 것들이 대량으로 와서 누란에 이미 신속히 전파되고 있었다. 누란인들의 도덕은 신속하게 떨어지고 있었고 많은 순박한 사람들이 타락하고 있었다. 누란 소녀들의 동정은 고가의 상품이 되었고 나라에는 이미 순결한 소녀가 드물 정도였다. 국왕도 간신 애호(艾虎)의 꼬드김에 빠져 썩은 장소에 드나들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욕망을 방종했다.
국왕의 변화에 왕후는 근심했다. 이미 오래 지켜오던 왕실의 비전에 근거하여 왕후는 자세히 연구하여 이전 여러 왕들이 남겨 놓은 비밀서찰을 이해했다. 서찰은 고대의 예언이었다. 비전에는 은밀한 방법으로 누란이 큰일을 겪을 거라고 교묘히 기술해놓았다. 마지막 누란왕은 황음에 빠져, 성결하지 못한 여인을 왕궁으로 데리고 들어와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다.
줄곧 공주를 노리고 있던 애호는 한편으로는 국왕을 미혹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독계를 써서 왕자를 독살시키려 했다. 국왕은 갈수록 혼돈해졌으며 하루 종일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술과 약물의 자극에 이끌려 방탕한 여인을 궁으로 데려왔다. 하지만 왕후에게 제지되었다.
누란에서는 국왕의 추문에 관한 소문이 점점 퍼졌다. 국왕과 대신의 아내와 딸이 관계를 가졌다. 국왕과 누란의 방탕한 여인이 함께 마시고 놀며 국왕이 남색을 한다. 국왕이 욕망에 빠져 방종하며 그는 왕후의 위치를 방탕한 여인에게 주었다. 그는 신과 부처를 불경하기 시작했고 외래의 사악한 영을 모셨다. 그래서 하늘의 진노를 불러왔고 누란에 겁난이 곧 도래할 것이다. 등등.
최종적으로 왕후는 공주와 왕자를 국사에게 부탁했다. 국왕은 또 다시 방탕한 여인을 왕궁에 데리고 들어왔을 때 왕후가 제지했으나 소용이 없자 왕후는 국왕 앞에서 자진했다. 국왕도 미쳤다. 황사에 누란 성은 점점 파묻혔다. 누란이 사라지는 것을 목도한 공주는 국사의 안배 하에 일부러 추하게 모습을 바꾼 후 여관의 하녀가 되었고 40세쯤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금생에 국사와 함께 세상에 와서 수련인이 되었다.
누란을 소멸한 뜻은 세인들에게 알려주는데 있다. 누란인이 사치하고 음욕에 빠져 있었으며 양성의 도덕 관계를 파괴했을 때 누란은 신의 보우를 잃었다. 또 사람이 신이 인간에게 정해준 준칙을 벗어났을 때 누란의 멸망은 피할 수 없었다.
아틀란티스 문명이 사라진 원인
2009년 12월 한 무리의 신원을 밝히지 않은 해저 고고학자들이 카리브해역에서 전설에 나오는 신비하게 사라진 아틀란티스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카리브 해저에서 찍은 사진을 공개해 발견의 진실성을 입증하려 했다. 이런 고고학자들은 사진 중의 해저 폐허 도시가 연대를 추적하면 이집트 피라미드 짓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여긴다. 피라미드는 기원전 2600년 전 후에 출현한 것이다.
사실상 신비한 아틀란티스 문명에 대한 조사는 최근까지 줄곧 멈추지 않았다. 지금 많은 과학자들의 공통 인식은 이렇다. 미국 동부와 유럽 사이에 원래 대륙이 있었다. 과학자들은 ‘대서주’라고 부른다. 아틀란티스는 그 중에 있다. 하지만 비록 꽤 많은 것이 발견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아틀란티스의 정확한 위치에 관해 정해진 결론은 없다.
아틀란티스에 관한 전설이 가장 일찍이 보이는 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책이다. 플라톤은 만년의 저서 ‘크리티아스’와 ‘티마이오스’ 두 책에 이같이 언급했다.
플라톤의 기술 중에 아틀란티스는 아름다운 섬에 위치한다. 그 문명은 상당히 발달했으며 기원전 370년까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아틀란티스에는 화려한 궁전과 신전이 있었고 제사를 지내는 거대한 신단이 있었다. 그것은 강대한 해상제국이었고 방대한 해상함대를 갖고 있었다. 아틀란티스 사람들이 가진 풍부한 재산은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애초 아틀란티스 사람들은 성실하고 선량했으며 천신(天神)을 독실하게 믿었다. 아울러 세속을 초탈한 지혜가 있었다. 그들은 매일 아무 걱정 없는 생활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틀란티스 사람들의 야심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군대를 파견해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섬 전체와 주변 일부분 통치했고 심지어 대양을 넘어 대륙 일부에까지 넓혔다. 이 외에도 거대한 아틀란티스 제국은 리비아 헤라클레스 기둥 내에 이집트 부근의 나라 티레니아(지중해 일부, 아페닌 반도, 시칠리, 코르시카 섬 사이)까지 관할했다. 거대한 권력 중심이 끊임없이 팽창하고 모이면서 주위 부족들이 하나씩 정복되었다. 해협 내의 전체가 모두 아틀란티스 세력의 통치범위에 들어갔다. 그것은 심지어 크레테 문명까지도 정복했다.
이와 동시에 아틀란티스 사람들의 생활은 점점 부패해져 갔다. 끝없는 사치와 도덕의 타락은 마침내 여러 신들을 격노시켰다. 어느 날 갑자기 해신 포세이돈이 지진과 홍수를 하루 밤새 내렸고 아틀란티스는 마침내 바다에 삼켜져 측량할 수 없는 깊은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고도로 발달했던 아틀란티스 문명이 이렇게 사라져 버렸다. 아틀란티스 사람들이 사방을 정복했고 자기 문명을 서방 세계에 전파했기 때문에 오늘날 사람들도 서방 문명 중에 그것의 일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9세기 미국의 에드가 케이시라는 영적인 능력자가 자기 최면상태에서 아틀란티스 문명을 투시했다. 아틀란티스 문명이 하루아침에 비참하게 사라졌다는 플라톤의 기술과는 달리 케이시는 아틀란티스가 3차례에 걸쳐 철저히 훼멸되었다고 말했다. 제1차는 기원전 5만 년 전 최초의 변이가 발생했다. 당시 아틀란티스는 비록 대륙의 일부분이 소실되었지만 여전히 번영한 문명이 지속되었다. 이어서 기원전 16,000년 전 2차 이변이 일어났다. 이때 대륙은 수많은 거대한 섬으로 나뉘어졌다. 민중들은 분분히 타향으로 이주했다. 기원전 10,000 년 경 최후의 변이가 발생했고 아틀란티스 문명은 철저히 해저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