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룬궁 창시인 리훙쯔 선생 인터뷰 2
팡웨이(方偉)
【정견뉴스】
최근 서방의 한 매체가 션윈(神韻)과 파룬궁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선생의 축재 의혹을 제기해 기자는 따로 리훙쯔 선생을 인터뷰하며 자세한 설명을 해달라고 요청했다(앞 기사 참조). 하지만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공사(氣功師)로 명성을 떨쳤고 나중에 파룬따파(法輪大法) 창시인이 된 리 선생이 어떤 길을 걸어왔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우리가 솔직하게 호기심을 말하자 리 선생은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들려주었다.
1992년 중국 지린성 창춘(長春)에서 열린 한 기공 토론회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리훙쯔 선생은 모두들 한창 토론 중이던 문제에 대해 몇 마디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참가자들이 모두 놀라 “와! 당신이 누구길래 뜻밖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렇게 몇몇 기공 매니아들이 그에게 아이디어를 주었다.
“당신은 기공반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장소를 찾도록 도와주었고 곧 창춘 제5중학교 강당에서 첫 기공반이 열렸다.
당시 기공반은 ‘대공보고(帶功報告)’라고도 불렀는데, 좀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병을 치료해 주는 수업이었다. 그날 많은 환자들이 “아야! 아야!”하면서 수액을 꽂고 들어왔는데 모두 그 기공 매니아들이 데려온 사람들이었다.
리 선생이 말했다.
“내가 가서 그들을 일일이 치료해주었습니다. 불과 몇 초 만에 반신불수로 아예 일어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포함해 전부 일어났습니다.”
리 선생이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이제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 환자들이 걷기 시작했다.
그런 후 리 선생이 그들에게 “이제는 뛰어도 됩니다.”라고 말하자 이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달릴 수 있었다! 모두 깜짝 놀랐는데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창춘 제5중학교의 기공반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곧 멈출 수 없게 되었고 리 선생은 도처에서 그의 기공을 전수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파룬궁(法輪功)의 시작이었고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를 존칭해 ‘리대사(李大師)’라 불렀다.
이때 누군가 리 대사에게 중국 국가기공협회에 가서 감정을 받으면 앞으로 어디든 가서 (기공반을) 개최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주었다.
리훙쯔 선생은 이에 베이징에 있는 중국기공협회(中國氣功協會)를 찾아갔다. 그들은 첫눈에 깜짝 놀랐다. “어, 이렇게 젊은 사람이라니, 본 적도 없는데! 좋아, 한번 감정해 봅시다.”
소위 감정이란 대공보고(帶功報告)를 하는 것으로 그들은 전문적으로 다른 기공에서 치료하지 못한 만성병과 고질병을 지닌 사람들을 다수 불러다 수업을 듣게 했다. 결국 리 선생이 에너지를 발산하자마자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증상이 개선되거나 또는 완전히 치료되었고, 현장 분위기가 완전히 달아올랐다!
40대 초반에 불과한 리 대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비범한 영향력을 지닌 이유는, 그가 강연에서 기공 매니아들이 알고 싶어도 똑똑히 알 수 없었던 기공에 대한 수많은 이치를 분명히 밝혀 주었기 때문이다.
이 기공 강좌 이후 중국기공협회는 곧바로 리훙쯔 선생과 마주 앉아 “당신은 떠나지 말고 베이징에 남으세요, 우리 밑에 있으면 전국 각지에서 강좌를 열 수 있습니다.”라고 제안했다.
당시 중국기공협회는 정부에서 크게 인정을 받아 국가체육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국가체육위원회 주임 우사오주(伍紹祖)가 장전환(張震寰) 장군에게 중국기공협회 책임을 맡겼고 배후에는 첸쉐썬(錢學森 역주: 중국의 저명한 과학자로 로켓 및 핵개발 등에 기여해 마오쩌둥의 신임을 받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변연과학(邊緣科學 역주; 여러 분과에 걸친 다학제 과학이란 의미)’이었다.
리훙쯔 선생은 그때부터 파룬궁을 전수하는 일을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조건이 아주 어려웠다. 왜냐하면 리 선생은 파룬궁을 최대한 널리 보급하고 싶었기 때문에 수강료를 많이 받으려 하지 않았고 9일 강좌에 겨우 20여 위안[역주: 우리 돈으로 약 4천 원]만 받았기 때문이다. 이 돈으로 스태프들의 기차표, 식사, 자료 인쇄 등에 쓰고 나면 학습반을 마친 후 남는 돈은 그야말로 얼마 되지 않았다.
당시 기공을 가르치러 외지로 갈 때면 기차를 타야 했지만, 침대칸을 살 형편이 안 돼 딱딱한 일반석이 기본이었고, 《기공소개(氣功簡介)》와 같은 소책자와 라면을 담은 마대 자루를 들고 다녀야 했다. 평소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고, 가끔 생활 수준 향상을 위해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사 먹는 정도였다. 2년 동안 무려 54차례나 학습반을 진행했으니 스태프들은 라면에 질릴 정도였다. 당시 리 선생은 자신을 따르는 스태프들에게 “당신들이 나를 따라다니면 바로 고생입니다”라고 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녹음을 근거로 학습반에서 한 내용을 정리해 《중국파룬궁(中國法輪功)》을 정리했지만 책을 출판할 돈이 없었다. 나중에 한 인연 있는 사람이 나타나 5,000위안[역주: 우리 돈 약 100만원]을 빌려주어 마침내 책을 출판할 수 있었다. 리 선생은 책을 출판한 후 인세를 받자마자 가장 먼저 그를 찾아가 돈을 갚았다. 나중에 상황이 좀 좋아지자 파룬궁 주요 저서 《전법륜》를 출판했다. 그 이후 제자들 중에서 경제적인 조건이 좋은 이들이 나타나 리 대사가 책을 출간하고 각지에서 공법을 가르치는 학습반을 열고 여행하는 조건이 겨우 개선되었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4년 동안 파룬궁은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기적적인 공법의 효과, 저렴한 수강료 및 리훙쯔 대사가 강조한 ‘진선인(真善忍)’ 공리(功理)가 강력한 공명을 일으키면서 중국대륙에서 신속히 퍼져나갔고 수련자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당시 베이징 창안제(長安街) 양쪽에는 아침 일찍 파룬궁을 연공하는 사람들로 긴 줄이 늘어서곤 했다. 베이징은 중공 고위층이 있는 곳이라 당시 극권 통치 아래 있던 중국에서 이러한 현상은 자연스레 최고 권력자의 시기를 불러일으켰다.
리훙쯔 선생은 당시 그들이 자신을 다스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했다. 왜냐하면 첫째, 돈이 없었고 둘째, 여자 문제가 없었으며 셋째, 심지어 집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리 대사는 비록 이미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지만, 앞뒤로 많은 인원들에 둘러싸여 떼돈을 벌던 그런 소위 대기공사(大氣功師)들과 비교하면 리 대사는 베이징 군사 박물관 옆에 있던 동생 집에 거주했기 때문에 다스릴 구실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당국에서 또 마지막 카드를 들이밀었다. 1996년 어느 날 상무부의 한 사장(司長 역주: 우리나라의 국장에 해당)이 리훙쯔 선생과 저녁 식사 약속을 잡았다. 리 선생은 여느 때와 같은 식사 자리라 생각해 식사를 빙자한 병 치료 부탁이라 생각하고 나갔지만, 결국 자리에 앉자마자 상대방이 직접 카드를 내밀었다.
“당신은 지금 중국에서 영향력이 너무 크니 중국을 떠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리 대사가 중국을 떠난 원인인데, 중국대륙 제자들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중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명성과 수많은 포상 때문에 미국에서 뛰어난 인재에 한해 영주권을 주는 이민 수속이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곧 미국의 승인을 받았다.
1998년 리 선생은 이렇게 아내 및 딸과 함께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처음에 캘리포니아에 갔지만 정착할 여건이 되지 않아 애틀랜타로 가서 현지에서 집을 알아 보았다. 12만 달러에 나온 2층 건물이 있었지만 집을 살 돈이 없었고 또 집이 도로에서 너무 가까워 교통 소음이 심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애틀랜타를 떠나 뉴욕으로 옮겼다.
뉴욕에 도착했을 때 처음에는 한 제자가 내준 원룸에서 온 가족이 함께 살았다. 이 아파트가 있던 건물은 나중에 중공 특무들이 사진을 찍어 “리훙쯔의 건물”이라 불렸다.
나중에 한 제자의 도움으로 플러싱에 있는 소박한 타운하우스로 이사했다. 하지만 주변이 여전히 시끄러워 다시 뉴저지에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했는데, 이는 한 제자가 사부님께 사드린 것이다. 이 단독주택은 3,000평방피트(역주: 약 280평)로 비교적 큰 규모였지만 사실 미국에선 평범한 집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집도 나중에 중공 특무들이 사진을 찍어 ‘리훙쯔의 또 다른 호화주택’으로 선전되었다.
나중에 박해가 갈수록 더 심각해지고 상황도 점점 더 위험해지자 리훙쯔 선생은 가족을 이 집에서 나와 한 제자가 제공한 뉴저지의 다른 임시 거처로 옮겼다. 리 선생은 가족을 잘 배치한 후 중공이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직접 차를 몰고 미국 전역을 다녔는데, 이렇게 1년이 넘도록 정처 없이 다녀야 했다.
2000년, 한 제자가 맨해튼에서 차로 약 2시간 정도 떨어진 뉴욕주에 산지(山地)를 구매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용천사(龍泉寺)가 자리 잡은 곳이다. 당시에는 작은 방갈로 외에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이었지만 리훙쯔 선생이 몇몇 제자들과 함께 이주했다. 처음에는 이 방갈로에 같이 살다 나중에 조금씩 건설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돈이 없어서 참여한 제자들이 각자 돈을 냈고, 부족한 도구는 직접 구입 했으며, 대부분 수작업으로 건설을 시작했다. 이렇게 몇 년 동안 자발적으로 노동하고 헌신했다. 나중에 션윈(神韻)이 시작되고 몇 년이 지나서야 조금씩 수입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때 모두 한 달에 200달러씩 보조했고 나중에는 300달러, 더 나중에는 1000달러씩 보조했으며 나중에 션윈이 서서히 자리를 잡은 후에야 상황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한편, 많은 제자들이 사부님에 대한 존경심으로 많은 차(茶)를 보내오자, 산 위에 찻집을 만들어 차를 마시며 사람들을 접대하고 간식을 제공했다. 원래 어떤 사람들이 돈을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리훙쯔 선생은 찻집에서 돈을 받지 못하게 했다. 왜냐하면 차를 마시러 오는 사람들은 모두 산에 일하러 온 자원봉사자들이고 또 아주 고생스럽게 일하는데 그들에게 어떻게 돈을 받을 수 있겠는가? 리훙쯔 선생은 나중에 산 아래 제자들이 보낸 많은 음식을 이곳에 보내 모두 나눠 먹게 했다.
우리는 20년 넘게 리훙쯔 선생을 수행한 한 조수에게 사부님에 대한 인상을 물어보았다. 그는 “사부님의 생활은 아주 소박하세요. 아침 일찍 일어나시고 아주 늦게야 잠자리에 드십니다. 아침 일찍 손수 손빨래를 해서 직접 말리시는 것을 포함해 무슨 일이든 스스로 하십니다. 용천사에 계시든, 션윈예술단 순회공연을 함께 하시든 늘 이렇게 하십니다. 사부님은 비록 예술에 대한 안목은 아주 뛰어나시지만 당신은 늘 소박하게 입으시는데 셔츠에 청바지를 즐겨 입으십니다.”
리훙쯔 선생의 인생 이야기 취재가 끝난 후 기자는 리 선생이 어떻게 션윈예술단의 젊은 예술가들과 페이톈대학 학생들을 이끌었을지 궁금해졌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상세히 보도할 예정이다.
(에포크타임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43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