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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교육관: 지식 습득보다 ‘사람 되는 것’이 우선

수진(守真)

【정견뉴스】

오늘날 사람들은 교육을 이야기할 때 흔히 지식, 성적, 그리고 능력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성적이 뛰어나고 명문대학을 졸업했으며 온갖 재능을 갖추었음에도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고, 타인에 대해 성실함이 없으며, 일이 닥치면 오직 자신의 득실만 따진다면—그가 과연 진정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고인(古人)은 교육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그들 역시 독서와 재예(才藝)를 중시했지만, 그보다 더욱 본질적인 하나의 근본적인 물음에 주목했다. 바로 ‘장차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였다.

지식이 사람의 능력을 키워줄 수 있지만,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지까지 결정해주지는 못한다. 재능은 사람이 무언가를 성취하도록 도울 수 있지만, 그가 하는 일이 반드시 옳은 일임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전통 교육에서 ‘사람이 되는 것(做人)’은 지식을 구하는 근본이었고, 품격(品格)이 배움의 방향이었다.

학습은 우선 ‘사람 되는 법’을 배우는 것

《논어·학이(學而)》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제자가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경하며, 언행에 신중하고 믿음을 주며, 널리 대중을 사랑하되 어진 이와 친해야 한다. 행하고도 힘이 남거든 곧 글을 배운다(弟子入則孝,出則弟,謹而信,泛愛眾,而親仁。行有餘力,則以學文).”

‘입즉효(入則孝)’란 집안에서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고,
‘출즉제(出則弟)’란 밖에서 형과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며,
‘근이신(謹而信)’은 언행을 삼가고 타인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또한 ‘범애중(泛愛眾)’은 자신만을 돌보지 않고 타인에게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며,
‘친인(親仁)’은 어진 이를 가까이하는 것이다.

공자는 이 모든 도리를 행한 뒤에야 비로소 “힘이 남거든 글을 배운다”고 말했다.

이는 아이가 반드시 품격과 수양을 완벽하게 갖춘 뒤에야 비로소 책을 읽어야 한다거나, 지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독서와 지식을 구하는 것이 ‘사람이 되는 도리’와 떨어져선 안 됨을 강조한 것이다. 한 사람이 진정으로 학식이 있는지를 가늠할 때는 그가 얼마나 많은 글자를 외우고 있는지뿐만 아니라, 책 속의 도리가 그의 말과 행동에 스며들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

따라서 옛사람들이 말한 ‘배움[學]’의 범위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지식 습득’보다 훨씬 넓었다. 부모를 모시고, 어른을 공경하며, 말을 삼가고, 약속을 지키는 것 모두가 배움의 일부였다. 자신의 허물을 고치고, 욕심을 절제하며, 남의 어려움을 헤아리는 것 역시 배움의 일부에 속했다.

교육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이에게 단순히 지식을 쥐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비를 가려내고 스스로를 억제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지식이 사람에게 능력을 주지만, 품격이 방향을 결정

개인의 뛰어난 재능 그 자체는 행위의 선악을 결정해주지 못한다.

말을 잘하는 재주는 언어로 타인을 위로하고 선(善)으로 이끌 수도 있지만, 동시에 기만하고 상처를 주는 데 쓰일 수도 있다. 계획을 세우는 능력은 난관을 해결할 수도 있고, 매 순간 남을 음흉하게 계산하는 데 악용될 수도 있다. 기술을 지닌 이는 사회를 이롭게 할 수도 있으나, 자신의 재주를 오직 사익을 채우는 도구로만 쓸 수도 있다.

만약 품격이 결여된 채 지식만 있다면, 그 능력이 클수록 사회에 미치는 해악 또한 커질 수 있다. 그러므로 품격은 지식 바깥에 얹는 장식이 아니라, 지식을 제어하는 힘이며 사람의 본바탕이다.

옛사람들은 ‘입신(立身)’을 중시했다. 입신이란 사람이 이익 앞에서 원칙을 지킬 수 있는지, 곤경 속에서도 책임을 다할 수 있는지,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않을 수 있는지를 뜻한다. 재주와 재능은 사람을 일시적으로 주목받게 만들 수 있지만, 덕행(德行)은 그가 오랫동안 신뢰를 얻을 수 있을지를 결정한다.

그렇기에 교육은 반드시 인간의 능력에 앞서 올바른 방향을 정해주어야 한다. 아이는 단순히 ‘일을 어떻게 성취하는가’를 아는 것을 넘어, ‘무엇을 해야 마땅한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야 한다.

‘육덕(六德), 육행(六行), 육예(六藝)’

《주례·지관·대사도(大司徒))》에는 “향삼물(鄕三物)로 만민을 교화하고 이들을 천거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즉, “세 가지 품덕(三物)”으로 민중을 가르치고 그 가운데 현명한 인재를 발탁했다는 뜻이다.

1. 육덕(六德): 지(知), 인(仁), 성(聖), 의(義), 충(忠), 화(和)

2. 육행(六行): 효(孝), 우(友), 목(睦), 인(姻), 임(任), 휼(恤)

3. 육예(六藝):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

‘육덕’은 내면의 도덕적 품성을 기르는 것이고,
‘육행’은 그러한 품성이 인간관계 속에서 실천되는 양상이며,
‘육예’는 사람이 익혀야 할 예의, 문화, 그리고 기능이다.

육행 가운데 ‘효’는 부모를 공경하고 봉양하는 것이며, ‘우’는 형제간에 우애하고 돕는 것이다. ‘목’은 종족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고, ‘인’은 혼인을 통해 맺어진 친척들을 잘 대하는 것이다. ‘임(任)’은 친구를 사귈 때 신의를 지켜 상대가 믿고 의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휼(恤)’은 가난하고 환난에 처한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돕는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안에서부터 밖으로 점차 확장되는 질서다. 부모와 형제에서 시작해 종족, 인척, 친구로 나아가고, 마침내 사회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까지 미친다.

이처럼 덕행과 재학(才學)을 나란히 중시하고 덕(德)을 근본으로 삼는 것은 고대 전통 교육에서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이념이었다.

품격은 일상의 사소한 일에서 길러진다

말로는 아이에게 온갖 도리를 가르쳐줄 수 있지만, 참된 품격은 설명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주희(朱熹)의 《동몽수지(童蒙須知)》에 나타난 학습의 순서는 의복을 단정히 하는 것에서 시작해 언행과 걸음걸이, 방을 쓸고 닦는 청결함으로 이어지고, 그 후에야 비로소 독서와 글쓰기 및 기타 일상의 사무로 나아간다.

옛사람들은 어째서 옷 입는 법, 걷는 법, 말하는 법, 심지어 마당을 쓰는 법까지 가르쳤을까?

아이들이 정결함, 공경함, 책임감, 그리고 질서라는 개념을 처음 배우는 것은 추상적인 도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사소한 일들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의복을 단정히 하는 것은 자신을 바르게 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말을 온화하게 하는 것은 타인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물건을 쓰고 난 뒤 원래 자리에 갖다 놓는 것은 책임감을 배우는 것이며, 거처를 쓸고 닦는 것은 가정의 일에 동참하는 몫을 익히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 집중하고, 글씨를 대충 쓰지 않으며, 책을 아끼는 마음은 진지함과 경외심을 기르는 과정이다.

이러한 일들은 비록 작아 보이지만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습관으로 굳어진다. 그리고 그 습관은 점차 인간의 성정을 변화시켜, 외면적인 규범이 내면적인 자각으로 자리 잡게 만든다.

따라서 옛사람들의 품격 교육은 아득히 높은 곳에 매달려 있지 않았다. 그것은 아이가 밥을 먹는 방식, 말을 건네는 태도,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 그리고 사소한 과업 하나를 매듭짓는 그 일상 속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었다.

아이 교육이 부모 수양

《안씨가훈·교자(敎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모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애로우면, 자녀는 두려워하고 삼키면서도 자연히 효심을 내게 된다(父母威嚴而有慈,則子女畏慎而生孝矣).”

‘위엄이 있으면서 자애롭다’는 것은 가혹하고 엄격하기만 하거나 혹은 무조건 오냐오냐 감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모에게 자애로움과 동시에 원칙이 있을 것을 요구한다. 아이가 그릇된 행동을 했을 때는 엄정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하고, 아이가 발전했을 때는 진심으로 격려해야 한다. 과잉 사랑으로 방종과 교만을 키워주어서도 안 되고, 분노에 휩쓸려 무심코 아이에게 상처를 주어서도 안 된다.

사람의 습관은 어릴 때부터 길러져야 한다. 아이가 어린 시절에 형성한 언행 방식은 시간이 흐르면 마치 타고난 본성처럼 굳어진다. 부모는 아이의 첫 번째 스승이자 가장 가까운 거울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정직할 것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말과 행동에 신용이 없다면, 부모는 아이에게 웃어른을 공경하라고 다그치면서 타인을 대할 때는 거만하고 가벼운 태도를 보인다면, 부모는 이익을 탐하지 말라 가르치면서 정작 자기 일에는 잇속을 따져 셈한다면—아무리 입 아프게 훌륭한 도리를 늘어놓아도 아이는 진심으로 승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식을 가르치는 과정은 곧 부모 스스로를 구속하고 수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집안의 가풍(家風)이 대대로 이어지는 것은 단순히 가문에 몇 마디 훈계가 전해 내려와서가 아니라, 아이가 오랜 시간 동안 부모의 살아 있는 언행을 두 눈으로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가?

오늘날의 아이들은 과거의 그 어느 시대보다 방대한 지식을 배워야 하고, 훨씬 더 복잡한 사회를 마주하고 있다. 부모가 아이의 성적, 진학, 재능, 그리고 미래의 경쟁력에 마음을 쏟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들 앞뒤로 우리가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질문들이 있다.

* 아이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때 감사할 줄 아는가?

* 잘못을 저질렀을 때 기꺼이 인정하고 책임을 지려 하는가?

*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마주했을 때에도 여전히 존중을 유지하는가?

* 이익의 유혹 앞에서 원칙을 굳건히 지킬 수 있는가?

* 지식과 능력을 손에 쥔 이후에 그것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학교 성적표에 점수로 기록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물음들이 한 사람의 일생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지식은 사람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능력은 세상 속에서 무언가를 성취하게 해준다. 하지만 품격은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길지, 어떤 에너지를 선사할지를 결정한다. 옛사람들이 ‘사람이 되는 것’을 ‘지식을 구하는 것’보다 앞에 둔 것은 바로 교육의 가장 근본적인 나침반을 수호하기 위함이었다.

즉, 사람이 지혜와 재능을 키워나가는 동시에, 하늘의 이치를 두려워하고 인륜(人倫)을 지키며, 스스로를 단속하고 타인을 선하게 대할 줄 알도록 이끄는 것이다.

교육의 본질은 단순히 아이에게 세상에서 밥벌이할 재주를 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아이가 어떻게 인간으로 바로 서야 하는지 가르치는 데 있다. 마음에 시시비비의 기준이 곧고, 행동에 준칙이 있으며, 타인을 향한 선의(善意)를 품고, 가정과 사회에 책임을 다하며, 자신의 재능을 바른길에 쓰는 것—비로소 이럴 때 지식은 개인의 이익을 탐하는 도구를 넘어, 자신을 완성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참된 힘이 될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4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