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0년—1279년)
심연(心緣)
【정견망】

곽희의 <조춘도(早春圖)>
회화 편
선진(先秦) 시기가 중국 회화의 남상(濫觴, 시초) 시대이고, 한대(漢代)가 중국 회화사의 기초를 다진 시대이며, 당대(唐代)가 그 창성한 발전 시대였다고 말한다면, 송조 회화는 중국 회화사상의 첫 번째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및 그 뒤를 이은 원대(元代)는 중국 회화의 찬란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송나라 회화의 발전은 사실적 스타일의 궁정 화원화(畫院畫), 자아 표현을 중시하는 ‘문인화(文人畵)’ 스타일, 그리고 산수에 마음을 붙이고 서예를 회화에 접목하여 시ㆍ서ㆍ화가 결합된 산수화(山水畵)의 단계를 거쳐 발전했다.
북송 건국 초기에 궁정에는 한림도화원(翰林圖畫院)이 설치되었고, 대다수의 화가들을 화원에 불러들여 궁정을 위해 복무하게 했다. 송휘종(宋徽宗) 때에 이르러 화원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송휘종은 비록 어리석은 망국의 군주이긴 했으나 서화에 푹 빠진 일류 서화가(書畵家)이기도 했다. 그는 회화 방면에서 못하는 것이 없었으나 화조화(花鳥畫)를 가장 으뜸으로 쳤다. 그가 그린 <유아로안도(柳鴉蘆雁圖)>와 <부용금계도(芙蓉錦雞圖)>는 모두 정련된 붓과 먹을 사용하여 형신(形神)이 모두 절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송조의 인물화는 이전 시대 화가들의 기초 위에서 또다시 새로운 발전을 이루었다. 예를 들어 이공린(李公麟)의 담호경묵(淡毫輕墨, 붓을 가볍게 하고 먹을 엷게 씀)의 백묘법(白描法)과 양해(梁楷)의 조필박묵(粗筆潑墨 거칠고 굵은 붓질과 먹을 시원스럽게 쏟아붓듯 거침없이 구사하는 회화 기법)의 감필법(減筆法)이 있다.
북송 중기의 이공린은 북송의 가장 탁월한 현실주의 예술 대가였다. 그의 그림은 선이 굳세고 빼어나면서도 굵고 가늘거나 짙고 옅은 변화가 있었으며, 구도가 견고하고 안정적이면서도 생생하고 자연스러웠고, 화면이 간결하고 정련되었으나 변화가 풍부했다. 소재는 인물, 안마(鞍馬), 산수, 화조에까지 두루 미쳤고, 사실감이 있는 동시에 문인의 취향을 지녔으며, 게다가 그린 것 모두에 채색을 하지 않아 ‘백묘대가(白描大師)’라 불렸다.
이공린은 비록 진사(進士) 출신이었음에도 승진이나 녹봉에는 열중하지 않고 서화 기예에 푹 빠져 있어, 늘 황실의 마원(馬苑)에 가서 명마를 구경하거나 술을 싣고 유람하며 사생(寫生 스케치)하고 경치를 감상했다. 수십 년 동안 그는 단 하루도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을 잊지 않았다. 이공린은 또 고개지(顧愷之), 오도자(吳道子), 무종원(武宗元) 등의 선(線) 사용 기법을 능숙하게 흡수하여 맑고 홀가분하면서도 단단하고 응축되어 있으며 신운(神韻)이 내면으로 갈무리되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이 때문에 그린 것이 비록 옅은 털과 가벼운 먹을 썼을지라도 빛나고 감동적이었다.
나중에 그는 주요 정력을 종교화와 인물고사화(人物故事畫)를 그리는 데 쏟았으며, 특히 후자가 가장 출중했다. 예컨대 그가 그린 <유마연교도(維摩演教圖)>, <임위언목방도(臨韋偃牧放圖)> 등은 모두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뜻을 전하고, 생동감 넘치며 마음을 울렸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말년에 병이 깊어져 침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손가락으로 이불 위를 긁적거리곤 했다고 하니, 진정 회화에 독실하여 죽을 때까지 변치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비교적 저명한 인물 화가로 양해(梁楷)가 있다. 그는 젊은 시절 이공린의 ‘백묘’를 오롯이 임모(臨摹)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으며, 중년 이후에는 선을 베끼는 방식을 버리고 대신 간단한 붓놀림과 거칠고 시원스러운 기세, 그리고 충격력 있는 짙은 먹을 사용하여 인물의 정신과 형체를 표현했다. 그의 대표작은 <이백행음도(李白行吟圖)>이다. 양해는 이백의 성격 특징 중에서 정신을 전해주는 순간을 포착하여, 몇 줄기 안 되는 붓질만으로도 이백의 시혼(詩魂)과 기풍을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그의 화풍은 중국 회화 중 인물화의 ‘유형전신(遺形傳神, 형체를 남겨 정신을 전함)’의 표현 경계를 확장했다.
남송 시대의 인물 화가로는 이숭(李嵩), 유송년(劉松年) 등이 가장 유명하다.
산수화는 송조 회화가 도달한 최고 경지이다. 중국 회화사에서 산수화는 비록 비교적 늦게 출현하기는 했으나 유럽의 풍경화보다는 1천 년 이상 앞섰다. 한조(漢朝) 때 산수는 단지 인물의 배경으로만 나타났다가 위진남북조 시기에 이르러 산수화는 더욱 크게 발전했으나 기법은 여전히 성숙하지 못했다. 수당(隋唐)의 산수화에 이르러 성숙기에 들어가 ‘청록산수파(青綠山水派)’와 ‘수묵산수파(水墨山水派)’가 출현했다. 송조에 이르러 산수화는 전성기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송조의 유명한 산수 화가로는 북송의 이성(李成), 범관(範寬), 곽희(郭熙), 미불(米芾) 부자, 남송의 유송년(劉松年), 이당(李唐), 마원(馬遠), 하규(夏圭) 등이 있다.
대체로 말해 북송이 변경(汴京)에 도읍을 두었기 때문에 북송 산수화는 황하 양쪽 관락(關洛) 일대의 산수 형상을 웅강(雄强)하고 꼿꼿하게 빚어내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 외에도 미불 부자가 그린 강남의 산수화가 있었다. 남송 시기에는 항주에 도읍을 두었기 때문에 화풍이 북송의 웅강하고 두터운 것에서 맑고 허전하며 빼어나고 아름다움, 성긴 숲에 비치는 저녁 햇살(疏林晚照)로 변화했다.
북송의 이성은 거문고, 바둑, 서예, 그림(琴棋書畵)에 모두 통달했다. 그는 처음에 관동(關仝)을 스승으로 섬겼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으며, 먹 아끼기를 금같이 하였고 직찰지준법(直擦之皴法)을 즐겨 사용해 평원(平遠)의 한림(寒林, 겨울 숲)을 그렸는데, 그 나무들은 마디가 지는 곳에 먹 동그라미를 쓰지 않고 큰 점 하나를 찍었으며 온몸을 淡墨으로 비워 두었다. 그가 그린 설경(雪景)은 산봉우리와 숲속 집들이 모두 옅은 먹을 사용하였고 물과 하늘의 빈 곳은 온통 호분(胡粉)으로 채워 넣었으니, 평론하는 이들이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당시 그는 이미 원근 투시의 법리를 깨달아 산 위의 정관(亭館)에 날아갈 듯한 처마를 올려 그렸으니, 이는 송조 때 원근법과 명암법 등에 대해 상당한 발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성 畫派의 맥을 이은 이로는 허도녕(許道寧), 이종성(李宗成), 적원심(翟院深) 세 사람이 있다. 허도녕은 이성의 기세를 얻었고, 이종성은 이성의 형체를 얻었으며, 적원심은 이성의 풍도를 얻었다. 허도녕은 처음에는 삼가고 신중함을 숭상했으나 늙어서는 붓놀림이 간결하고 빨라져 봉우리들이 깎아지른 듯 우뚝하고 숲의 나무들이 굳세고 단단하여 별도의 일가를 이뤘다.
범관은 북송 전기의 화가로 성품이 술과 도(道)를 좋아했다. 산수화를 잘 그리기 위해 산속에 들어가 살면서 산수 이경(異景)과 기관(奇觀)을 두루 유람하여 그것을 붓과 먹으로 표현해냄으로써, 기세가 웅장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고풍스러우며), 필묵(筆墨)이 두텁고 힘한 특징을 형성했다. 대표작은 <계산행려도(溪山行旅圖)>이다.
곽희는 북송 중기의 산수화 대가이다. 그는 처음에 이성을 배웠으나 여러 가(家)의 장점을 모은 후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높은 산과 긴 고개들로, 웅장하고 기이한 속에 생생한 뜻이 담겨 있었으며, 동시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나타나는 맑고 아름다운 풍경을 그린 평원소경(平遠小景)도 있었다. 대표작으로는 <조춘도(早春圖)>와 <남산춘설도(藍山春雪圖)> 등이 있다.
남송 시기의 화가 마원은 산수화의 구도에 능하여 산수의 전모(全貌)나 정면(正面)을 표현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풍부한 특징을 지닌 산수의 한 모퉁이를 부각하여 그림의 경계를 확장시켰다. 대표작은 <답가도(踏歌圖)>이다.
반면 하규는 산수의 국부나 또는 절반으로 주체의 정서와 생각을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화풍이 평이하고 담백하며 전아(典雅)하면서도 청랑(淸朗)했다. 대표작은 <계산청원도(溪山清遠圖)>이다.
이당은 긴 두루마리와 큰 병풍 그림을 잘 그렸으며, 스타일이 웅대하고 기세가 있었다. 그가 산수화를 그릴 때는 먼저 먹빛을 칠한 뒤에 청록색을 입혔는데, 그의 이러한 화풍은 남송 시대 산수 화가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송조 회화는 인물화, 산수화, 화조화 외에도 도시와 농촌 생활을 묘사한 사회 풍속화가 출현했다. 북송 말년에서 남송 초기에 살았던 장택단(張擇端)이 그린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는 그중 가장 우수하고 유명한 작품이다. <청명상하도>는 북송의 수도인 동경(東京, 지금의 개봉) 변하(汴河) 양쪽의 청명절 전후 풍모를 묘사했다.
<청명상하도>는 개봉 변하 연변의 가게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고 시민들이 왕래하는 번잡한 장면을 묘사하여, 송대의 상업, 운송 및 계급 관계의 일부 측면을 반영하였으며 매우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청명상하도>는 현재 북경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긴 두루마리는 총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은 아침 햇살 아래 교외의 강가에서 무거운 짐을 실은 나귀 무리가 천천히 나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두 번째 부분은 변하의 교통이 번잡한 광경을 묘사했는데, 특히 무지개처럼 변하 양안을 가로지른 ‘홍교(虹橋)’가 눈길을 사로잡으며 다리 위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수레와 말이 붐벼 매우 북적거린다. 세 번째 부분은 시가지의 거리 풍경을 그려 온갖 업종이 총망라되어 있으며 거리의 행인들이 오고 간다. 전체 그림은 폭 25.5센티미터, 길이 525센티미터이며, 그 안에 온갖 인물 800여 명, 가축 94마리, 나무 170여 그루를 그려 넣었다.
이 그림은 변경 교외의 채소밭 풍광, 변하 위의 운송, 거리의 매매 상황, 길가 가옥의 건축 특징, 뱃사공들의 긴장된 노동, 사대부들의 유유자적, 웅장한 홍교, 우뚝 솟은 성루 및 수레, 가마, 낙타를 하나하나 매우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 그림은 감동력이 강하고 감상 가치가 높아 사람들에게 두루 사랑을 받아왔으며 많은 화가들에 의해 모방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