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6년—1368년)
심연(心緣)
【정견망】
확대된 유라시아 교류
몽골 대군은 칭기스칸 때부터의 세 차례 원정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다. 쿠빌라이가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여 강력한 왕조를 건립했을 때에 이르러 이 제국은 전성기에 도달했다. 비록 이 제국에 속했던 네 개의 칸국은 통일된 경제 기반이 부족해 차례대로 독립된 국가로 되긴 했지만 그것들은 원나라의 유라시아를 향한 교류와 경제 문화의 교류 방면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발휘했다.
첫째로, 이 독립 칸국들은 여전히 원 황제를 대칸으로 공경해 “모든 몽골 군주의 군주”라 칭하였고 원조 황제를 그들의 종주(宗主)로 승인하였으며 그들은 원조의 “종번지국(宗藩之國)”이었다. 그러므로 이들 칸국의 칸들은 마땅히 원 황제(대칸)의 인정을 받아야 했으며 게다가 서로 사신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서양 사신과 상인들이 중국으로 향할 때도 모두 이들 칸국을 거쳐야 했다. 몇몇 도시는 동서양 왕래의 교통 허브가 되었다. 1240년부터 1340년까지의 100년 사이는 중국과 유럽이 직접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는데 왜냐하면 이 전후로 아랍과 투르크인들이 어느 정도 동서양의 교류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둘째로, 몽골의 세 차례 서정 과정에서 모두 대량의 외국 관료와 장인(工匠)들이 잡혀 동쪽으로 왔고 그 후에는 또 대량의 중앙아시아 상인, 여행가들이 잇달아 원조에 도래했는데 그들 중에는 회회인(回回人), 서역인, 대식인(大食人) 등이 있었다. 그들은 원조에서 정사(政事)를 보고 장사를 하였으며 아랍의 과학과 문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전체 원조 시기에 걸쳐 페르시아, 아랍의 천문학, 수학, 의학, 사학 등의 서적이 대량으로 중국에 유입되었다.
이와 동시에 일부 몽골인과 한인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다. 당시 중국은 기술 면에서 다른 세계를 1,000년이나 앞서 있었다. 화약, 지폐, 인쇄술, 도자기, 의약, 예술 등이 이때 아랍을 거쳐 유럽으로 유입되어 유럽의 역사 진로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에 중국에 온 상인들은 매우 많았을 것이나 글자 자료를 남긴 이는 이탈리아 사람 마르코 폴로뿐이다. 비록 일부 사람들이 그의 여행기의 진실성을 의심하나 시간이 그를 위해 증명해 주었다. 그의 책 속에 기록된 노선과 원조에 관한 수많은 기술들은 모두 실존하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이렇게 확대된 유라시아 교류는 한편으로는 동서양 문화의 융합을 촉진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인구의 이동으로 인해 인종의 혼잡이 또한 점차 늘어나게 되었으며 이렇게 하여 후손들이 점점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볼 수 없게 만들었고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방향을 잃어버리게 만들기도 했다.
쿠빌라이 이후의 제위 다툼
1294년 원세조 쿠빌라이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손자인 테무르(鐵穆耳)가 즉위했으니 곧 원 성종(成宗)이다. 그의 재위 기간은 후대의 다른 황제들보다 길어 13년(1295년~1307년)이었다. 테무르는 수성의 군주로 기본적으로 원세조의 기존 정책을 집행했으며 이렇다 할 큰 업적은 없었다.
성종이 사망한 후 몽골인의 중국 통치는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뒤이은 26년 동안 원조는 총 7명의 황제를 바꾸었다. 성종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조카인 카이산(海山)이 계승했으니 이가 바로 무종(武宗)이다. 무종은 약 4년(1307년~1311년) 재위했고 후에 그의 동생 아유르바르바다가 뒤를 이으니 이가 곧 인종(仁宗)이다. 인종은 9년(1311년~1320년)정도 재위했고 죽은 후 아들인 영종(英宗)에게 전위했다. 영종 통치 시기에 내부 모순이 매우 첨예하였고 황권 다툼과 권신간의 파벌 다툼이 매우 격렬해 정국이 불안정했다. 어사대부 철실(鐵失)을 우두머리로 하는 한 파의 권신들이 여러 왕 및 귀족들과 결탁해 정변을 일으켰으니 상도의 남쪽 30리 지점에 있는 남파(南坡)에서 영종을 암살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남파의 변(變)”이라 부른다. 그들은 쿠빌라이의 손자이자 진왕(晉王)인 예순테무르(也孫鐵木耳)를 황제로 추대했으니 곧 태정제(泰定帝)이다.
그리고 태정제가 죽은 후 5년 사이에 5명의 황제가 교체되었다. 태정제의 아들 천순제(天順帝)는 재위 두 달도 되지 않아 무종의 차남 툭 테무르(圖帖睦爾)에게 쫓겨났다. 이가 바로 문종인데 문종은 즉위한 지 1년 만에 형세를 못 이겨 또 막북 군사를 총괄하는 이모형제인 명종(明宗) 쿠살라에게 양위했다. 명종은 1월에 화녕(和寧) 북쪽에서 즉위한 때로부터 8월에 이르기까지 권신 엘테무르(燕鐵木兒)와 문종의 모략에 의해 살해당하였고 문종이 다시 복위했다. 문종이 재위한 지 4년 만에 죽은 후 문종의 황후와 엘테무르 등에 의해 명종의 겨우 7세 된 차남을 황제로 세우니 이가 바로 영종(寧宗)이다. 그러나 영종은 10월에 즉위하여 11월에 죽었다. 엘테무르와 문종의 황후는 다시 명종의 장자 토곤 테무르(妥懽帖睦爾)를 황제로 세웠으니 이가 바로 원조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이다. 그는 권신들 간의 모순을 이용해 30여 년간 통치를 유지했다.
원조 멸망에 관한 예언
《추배도》 제26상은 원조의 멸망을 예언했다. 제26상의 그림 속에는 한 명의 승려가 그려져 있고 뒤에는 몇 명의 미녀들이 따르고 있다. 암시적으로 원순제가 승려에게 미혹되어 방중술을 맹신해 온종일 여색에 빠져 있음을 가리킨다.
참(讖)에 가로되:
시간에 밤이 없고
해에 쌀이 없도다
꽃은 꽃이 아니요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네
時無夜 年無米
花不花 賊四起
첫째 구절은 원순제가 티베트 승려와 온종일 쾌락에 빠져 밤낮을 가리지 않으니 농작물이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집에 끼니를 이을 곡식이 없음을 가리킨다. 백성들은 살아갈 길이 없어 사방에서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으나 원순제는 도리어 이 방면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송(頌)에 가로되:
중원이 가마솥 끓듯 하는데 목목(木木)이 오고
사방에서 경보가 변방 해안에서 일어나네
방중에 스스로 장생술이 있으니
도성 문이 밤새 열려 있어도 괴이하게 여기지 마라
鼎沸中原木木來
四方警報起邊垓
房中自有長生術
莫怪都城澈夜開
여기서 ‘목목(木木)’을 합치면 임(林) 자가 되는데 홍건군을 세운 황제 한림아(韓林兒)를 가리킨다. 즉 중원에 홍건군이 일어나 한림아가 이미 경성 부근에 다가왔으며 사방팔방에서 모두 경보가 울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순제는 방중에 장생술이 있다고 믿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궁궐 안에서 음란하게 즐겼다.
원조 말년의 천재(天災)와 원조의 멸망
원조의 마지막 황제 순제는 35년(1333년~1368년)을 재위했다. 그는 황음무도했기 때문에 그가 재위한 기간은 원조 역사상 역병이 가장 많이 유행한 시기로 사서에 기록된 것만 12차례나 달한다. 평균 3년에 한 번꼴로 역병이 발생했다. 역병은 순제 지정(至正) 후기에 특히 집중되어 거의 매년 역병이 크게 일어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정 12년(1352년) 이후 대역병이 연달아 폭발하자 사회 질서가 혼란스러웠다. 이 해 정월에 익주(翼州), 보덕주(保德州)에 대역병이 발생했다. 여름이 되자 용흥(龍興)에서 대역병이 발생했다.
지정 13년(1353년) 황주(黃州), 요주(饒州)에 대역병이 돌았다. 12월에 대동로(大同路)에 대역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려 죽었는데 문서에는 “죽은 자가 대반(大半)”이라고 기록되었다.
지정 14년(1354년) 4월 강서, 호광(湖廣)에 먼저 큰 기근이 닥쳤고 뒤이어 “백성들 중에 역병에 걸린 자가 매우 많다”고 했다. 10월에 경사(京師 지금의 북경)에 먼저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 중에 부자가 서로 잡아먹는 자가 있었고” 역병이 또 뒤를 이어 닥쳤다.
지정 16년 봄에 하남에 대역병이 유행했다.
지정 17년(1357년) 6월 창주(菖州) 몽양현(蒙陽縣)에 대역병이 돌았다.
지정 18년(1358년) 6월 분주(汾州)에 대역병이 돌았다. 이 시기에 중원에서 농민 기의(起義)가 사방에서 일어나 정부는 군사를 보내 토벌하러 갔으나 “두 하천 지역의 병화를 입은 백성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경사로 흘러들었고 기근과 역병이 겹쳐 죽은 자가 시체를 쌓을 정도였다.” 환관 박불화(樸不花)가 사람을 고용해 시체를 거두어 묻게 하였는데 지정 20년 4월에 이르기까지 누적해서 묻은 사람이 20여 만 명에 달했다. 이 경사 대역병은 2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지정 19년(1359년) 봄과 여름에 거주(莒州)의 기수(沂水)와 일조(日照) 두 현과 광동 난웅로(南雄路)에 대역병이 돌았다. 이 해 2월 금릉(金陵 지금의 남경)에 정권을 세운 주원장(朱元璋)이 군사를 보내 돌연 항주를 급습했고 항주는 성문을 닫은 지 3달이나 되었다. 성문이 포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성 안의 식량은 바닥이 났고 사방의 교통이 끊긴 탓에 식량을 성 안으로 운반할 수 없었다. “성 안의 사람들 중에 굶어 죽은 자가 10명 중 6, 7명이었다.” 주원장의 군사가 물러간 후 오송강(吳淞江)에서 온 쌀 운반선이 잇달아 도착하였고 사람들은 겨우 살 수 있겠다고 여겼으나 전염병이 번지기 시작해 절반 이상 사망했다.
지정 20년(1360년) 여름에 남방의 몇몇 지역에 역병이 유행하였는데 그중 소흥로(紹興路)의 산음(山陰), 회계(會稽) 두 현의 역병이 가장 심각했다.
2년 뒤의 봄과 여름 사이 소흥로에서 또 한차례 대역병이 나타났다.
역사 무대에서 이미 퇴장한 다른 조대와 마찬가지로 몽골인들이 창조한 제국과 왕조가 붕괴한 근본 원인은 통치자가 어리석고 무도(無道)함에 있었다.
원조 말년 통치는 암흑이었고 경제는 붕괴되었으며 황하는 범람하였고 재앙이 해마다 이어졌으나 순제는 이에 대해 듣고도 못들은 척 방탕한 짓을 계속했다. 정치의 부패, 군사비의 무한한 확장, 황제와 귀족 및 관료들은 오직 향락만을 알고 백성들을 압박하여 각종 모순은 이미 격화되기에 이른 지경이었다. 비록 중국 백성들이 줄곧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으나 마치 온주(溫州), 태주(台州) 백성들의 깃발에 쓴 “하늘은 높고 황제는 멀며 백성은 적고 나으리는 많으니 하루에 세 번씩 두들겨 맞는데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어찌하리오?”와 같았다.
또 《취태평소령(醉太平小令)》에서 묘사한 것과 같았다.
“당당한 대원(大元)은 간신배가 권력을 잡고,
하천을 파고 지폐를 바꾸니 화근의 근원이라,
홍건적 수만 명을 불러일으켰도다.
관에서 법을 남발하고 형벌이 무거우니 백성이 원망하도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곡하는 것은 봤어도,
돈으로 돈을 사고파는 꼴을 일찍이 본 적이 있는가?
도적이 관리가 되고 관리가 도적이 되어
현우(賢愚)를 뒤섞으니 아 슬프고 가련하다!”
그리하여 쌓인 원한이 포화 상태에 도달했을 때 분출해 나오게 되었다. 원조 말년 세기적인 규모의 농민 기의가 폭발했다. 그중 가장 먼저 군사를 일으킨 방국진(方國珍)은 먼저 절강 연해에서 관선을 습격했다. 그 후 백련교(白蓮敎)가 반원(反元)의 중심이 되어 한산동(韓山童)을 우두머리로 삼아 밀모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나중에 계획이 누설되어 살해당했다! 한산동이 죽은 후 유복통(劉福通)이 그의 아들 한림아를 황제로 세워 홍건군을 조직했다. 또 홍건 남파라 자칭한 서수휘(徐壽輝), 진우량(陳友諒), 방국진 등이 있었고 홍건에 속하지 않는 장사성(張士誠)이 있었다.
주원장은 상대적으로 말해 뒤늦게 나타난 뛰어난 인물로 그는 먼저 곽자흥(郭子興)에게 의지했고 곽자흥이 죽은 뒤 남은 장수들이 주원장에게 귀의하면서 세력이 강해졌다. 그 후 겉으로는 한림아를 북방의 방패로 받들면서 차례대로 남방의 진우량, 장사성, 방국진을 격파했다. 대세가 이미 정해지자 주원장은 응천부(應天府 지금의 남경)에서 즉위해 명 태조가 되었고 연호를 ‘홍무(洪武)’로 고쳤다. 1367년 주원장은 원조를 토벌하자는 토원문고(討元文告)를 발표해 장수 서달(徐達), 상우춘(常遇春)에게 북벌을 명했고 다음 해 수도인 대도(大都)를 함락시킴으로써 원조는 멸망했다.
몽골인이 건립한 원조의 중국 통치는 마침내 종말을 고하게 되었으며 중원에 들어선 지 겨우 90년 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