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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춘추전국시기 과학기술 (2)

심연

【정견망】

“오행학설(五行學說)”의 확립

서주 말년에 이미 “오행”에 대한 인식이 나타났다. 《상서ㆍ홍범》은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 이 다섯 가지 물질을 “오행”이라 일컬었으며, 오행 중의 각 행은 모두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했다.

“수는 윤하(潤下)라 하고, 화는 염상(炎上)이라 하며, 목은 곡직(曲直)이라 하고, 금은 종혁(從革)이라 하며, 토는 가색(稼穡)이라 한다. 윤하는 짠맛을 만들고, 염상은 쓴맛을 만들며, 곡직은 신맛을 만들고, 종혁은 매운맛을 만들며, 가색은 단맛을 만든다”라고 여겼다. (서주 역사 참조)

또한 《국어ㆍ제어(齊語)》에서는 “토를 금, 목, 수, 화와 섞음으로써 만물을 이룬다”라고 여겼다. 전국시대에 오행학설은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음양학설과 결합했다. 오행학설은 각종 자연현상의 상호 대립과 연계를 반영하며, 후세의 과학기술 관념 및 의학, 연단술(煉丹術)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수학(數學)

춘추전국시대에는 우리나라 고대 최초의 수학 전문 서적인 《구장산술(九章算術)》이 출현했다. 유휘의 기록에 따르면, 《구장산술》은 선진 시대의 “구수(九數)”에서 발전한 것이다. 진나라의 분서갱유로 경전과 기술이 흩어지고 훼손되었다. 서한의 장창(張蒼 ?~기원전 152년), 경수창(耿壽昌 기원전 1세기)이 흩어진 글과 원고를 수집하여 삭제하고 보충하여 정리함으로써 《구장산술》을 편찬했다.

《구장산술(九章算術)》은 백여 조항에 달하는 일반적인 추상 공식과 해법, 246개의 응용 문제를 포함하고 있으며, 방전(方田), 속미(粟米), 쇠분(衰分), 소광(少廣), 상공(商功), 균수(均輸), 영부족(盈不足), 방정(方程), 구고(勾股)의 아홉 장으로 나뉜다.

그중 방전장에서는 각종 다각형, 원, 활꼴 등의 면적 공식을 제시했으며, 분수의 통분, 약분과 가감승제 사칙연산의 완전한 법칙을 제시했다. 후자는 유럽보다 1400여 년이나 빠르다. 소광장에서는 제곱근과 세제곱근을 구하는 방법을 소개했는데, 그 절차는 현재의 절차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법칙이다. 영부족(盈不足)장에서는 영부족, 영적족(盈適足)과 부족적족(不足適足), 양영(兩盈)과 양부족(兩不足)의 세 가지 유형의 영휴(盈虧) 문제 및 두 번의 가설을 통해 영부족 문제로 바꿀 수 있는 일반 문제의 해법을 제시했다. 이 역시 세계적으로 앞선 성과이며 서양으로 전해진 후 큰 영향을 미쳤다.

방정장에서는 계수를 분리하는 방법으로 선형 방정식 조를 표시했는데, 이는 현재의 행렬에 해당한다. 선형 방정식 조를 풀 때 사용하는 직제법(直除法)은 행렬의 기본 변환과 일치한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완전한 선형 방정식 조의 해법이다. 서양에서는 17세기가 되어서야 라이프니츠에 의해 완전한 선형 방정식의 해법 법칙이 제시되었다. 이 장에서는 또한 음수를 도입하여 사용했으며 정부술(正負術)──정부수(正負數 양수와 음수)의 가감 법칙을 제시했는데, 이는 현재 대수학의 법칙과 완전히 동일하다. 선형 방정식 조를 풀 때 실제로는 정부수의 승제법(乘除法 곱셈과 나눗셈)도 시행했다. 이는 세계 수학사에서 중대한 성취로, 처음으로 양수(正數)의 범위를 돌파하여 수계를 확장했다. 외국에서는 7세기 인도의 브라마굽타가 비로소 음수(負數)를 인식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수학을 도시 건축, 토지 측량과 부역 징수 등에 비교적 숙련되게 운용할 수 있었다. 기원전 510년(주경왕周敬王 10년), 각국 제후들이 주왕을 위해 성을 쌓을 때 공사를 시작하기 전 담당 관리가 “길이를 계산하고, 높낮이를 헤아리며, 두께를 측정하고, 해자를 살피며, 흙의 양을 재고, 거리를 의논하며, 공사 기간을 가늠하고, 인부를 계산하며, 자재 사용을 고려하고, 양식을 기록하여 제후들에게 부역을 명령했다.” 즉, 왕성의 길이나 너비, 높이와 해자를 포함한 토석량 및 인력, 자재, 심지어 각국 노동력의 왕복 거리와 필요한 식량의 수량까지 정밀하고 주도면밀하게 계산했으므로 공사가 기한보다 앞당겨 완성될 수 있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이미 상당히 광범위한 수학 지식을 파악하고 있었음을 설명한다. 기원전 548년(주영왕周靈王 24년), 초나라 사마 무엄(蕪掩)이 명을 받들어 군부(軍賦 군수물자 조달을 위한 세금)를 정비했다. 사마 무엄은 서로 다른 유형의 전답, 산림, 늪 등에 대해 정밀한 측량과 계산을 한 후 수입에 근거하여 군부의 액수를 확정했다.

천문

《춘추》라는 책은 일월(日月)에 대한 기록이 매우 상세하다. 242년 사이에 일식 37회를 기록했는데, 그중 30회는 이미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가장 이른 것은 노은공(魯隱公) 3년 2월 기사일(기원전 720년 2월 22일)의 개기일식으로, 서양 기록보다 135년 앞선다. 《춘추》 노문공(魯文公) 14년(기원전 613년) 가을 7월 기록에 “혜성이 북두칠성에 들어갔다”라고 했는데, 천문학자들은 이것이 “할리 혜성”에 대한 세계 최초의 기록임을 공인하며 유럽의 기재보다 670여 년 앞선다.

대략 주나라 초기에 이미 토규(土圭)를 사용하여 해 그림자를 관찰하고 동지와 하지의 시일을 측정할 줄 알았다. 《좌전》에는 두 차례의 일남지(日南至 동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한 번은 노희공 5년(기원전 655년)이고 한 번은 노소공 20년(기원전 522년)이다. 두 차례 간격은 133년이며 그 사이에 윤달 48회를 기록했고 윤달을 한 번 놓쳤으므로 합계 49회의 윤달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유명한 19년 7윤법이다. 이는 상대(商代) 역법보다 정밀할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이 역법을 응용한 것보다 160~170년 빠르다.

전국시대에 초나라 사람 감덕(甘德)과 위나라 사람 석신(石申)이 각각 천문학 저서를 썼으며, 후대 사람들이 합쳐서 《감석성경(甘石星經)》이라 불렀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학 저서다. 책에는 800개의 항성을 기록했는데 그중 121개의 위치가 측정되었다. 또한 5대 행성의 운행 상황도 기재되어 있다.

기계

기계 방면에서는 뛰어난 장인 공수반(公輸般)이 탁월한 공헌을 했다. 공수반은 춘추 말년 노나라 사람으로 성이 공수, 이름이 반기고 자는 약(若)이며 노나라 사람이기에 노반(魯班)이라고도 부른다. 이 민간 공예가는 “궁실과 누대”를 건설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공벌과 전쟁이 빈번하던 연대에 “운제(雲梯)”, “구강(勾強)” 등 성을 공격하고 배에서 싸우는 기계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대나무와 나무를 깎아 까치를 만들고” 바람의 힘을 빌려 비행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기관이 갖춰진” “목거마(木車馬)” 및 맷돌, 연자방아 등을 창조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기계의 성인(機械之聖)”이라 칭송했다. 노반은 후세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수천 년 동안 줄곧 목공, 석공, 미장이 등 공예 부문의 조상으로 공인받아 왔다.

춘추 시대에는 또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긷는 기계인 방아두레박(桔槔)이 나타났다. 공자의 제자 자공은 일찍이 “여기에 기계가 있어 하루에 백 이랑의 밭에 물을 대는데, 힘은 아주 적게 들면서 공은 많이 봅니다. 나무를 깎아 기계를 만드는데 뒤는 무겁고 앞은 가벼워 물을 긷는 것이 뽑아 올리는 듯하고 빠르기가 끓는 물과 같은데 그 이름이 방아두레박입니다”라고 말했다.

제작 방법은 우물가나 도랑가의 높은 기둥 위에 긴 나무를 가로로 지탱하고, 긴 나무 앞부분에는 긴 줄을 사용해 빈 양동이를 매달며 뒷부분에는 무거운 물건(돌 등)을 묶는다. 앞부분의 밧줄을 아래로 당기면 양동이가 물을 긷게 되고, 손을 놓으면 뒤가 무겁고 앞이 가벼운 까닭에 양동이가 위로 끌려 올라오게 된다. 이런 기계는 순전히 인력으로 물을 긷는 것보다 훨씬 수월했으므로 광범위하게 응용되었다. 근대 농촌에서도 여전히 방아두레박을 채용해 물을 긷는 경우가 있다.

저울[衡器]은 물체의 무게를 다는 기구로 발명이 비교적 빨랐다. 전설에 따르면 순제(舜帝) 시대에 이미 있었다고 한다. 저울에는 등비 저울(等臂秤 천평)과 부등비 저울(不等臂秤) 두 종류가 있다. 1954년 장사 좌가공산(左家公山)에서 출토된 전국 시대 나무 저울은 등비 저울이고, 안휘 수현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전국 시대의 “왕(王)” 동형(銅衡 구리 저울)은 아마도 부등비 저울일 것이다. 저울이 근거하는 원리는 양쪽의 모멘트가 같아 평형을 이루는 지레의 원리다.

등비 저울(천평)의 경우 추의 무게와 물체의 무게가 같으며, 부등비 저울의 경우 무거운 물체와 중비(重臂 물체에서 받침점까지의 거리)의 곱은 추와 역비(力臂 추에서 받침점까지의 거리)의 곱과 같다. 묵가 학파는 부등비 저울의 작동 원리를 서술했는데, 묵가는 중비를 “본(本)”이라 하고 역비를 “표(標)”라고 했다. 추가 물체보다 가벼울 때 묵가는 이런 저울이 “서로 평형을 이루려면” 반드시 “본은 짧고 표는 길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이를 통해 묵가가 이미 지레의 원리인 ‘무게 x 본 = 추 x 표’를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가 기원전 3세기에 지레의 원리를 발견한 것보다 한 세기 이상 앞선 것이다.

이외에도 춘추전국시대에는 도르래, 차축 등 지레 기계에 대한 이용도 나타났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공수반은 계강자(季康子)에게 그의 어머니를 안장하기 위해 회전 기관을 만들 것을 건의했는데, 이 회전 기관은 아마도 녹로(轆轤 물레)였을 것이다. 대야(大冶) 동록산(銅綠山) 옛 광산 유적에서도 녹로를 사용해 광석을 들어 올린 유적이 발견되었다.

건축

목구조의 광범위한 응용과 프레임식 구조의 고도 발전은 중국 고대 건축 기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어떤 목구조이든 부재는 주로 장부 맞춤(榫卯接合)으로 접합했다. 장사 전국 묘지 중 관곽(棺槨)의 각목 장부에는 삽입 장부, 은정(銀錠), 치형(齒形) 세 가지 형식이 있는데, 이는 이런 건축 구조가 중국 선인들의 독립적인 창조물임을 설명한다.

고대 건축의 웅장한 규모와 기술 진보는 도시의 건축과 계획에서 두드러지게 표현된다. 춘추전국시대 도성의 건축 규모는 더욱 웅장해졌다. 낙양의 주대(周代) 도읍은 불규칙한 사각형 모양으로 남북 길이가 3300미터, 북쪽 담장 길이가 거의 3000미터에 달하며, 주요 건축물은 중간부에서 약간 남쪽에 있는데 이는 《고공기(考工記)》의 “사방 9리”, “왕궁이 중앙에 거한다”라는 기술과 부합한다. 전국 시대의 성읍은 둘레가 천 장(丈)에 이르고 가구 수가 만 단위로 계산되었는데, 제나라 임치는 7만 가구가 있었으며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었다. 연나라의 연하도(燕下都) 역시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었으며 동서 길이 8300미터, 남북 길이 4000미터에 달했다. 주요 건축물은 성의 중축선(中軸線) 위에 배치되어 주종이 분명하고 좌우가 대칭되는 완전한 건축군을 이루었으며, 성안에는 능묘 구역, 수공업 작업장 구역 등도 있었다.

건축 재료의 발전은 건축 공사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춘추 시대 이후 가옥 건축에서 기와의 사용이 더욱 보편화되었다. 진(秦)나라에는 청동으로 주조한 “전강(全杠)”이 있어 대들보와 기둥의 결절점 및 장식용으로 쓰였다.

수리(水利)

춘추전국시대 수리는 유례없는 규모의 발전 고조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에 건설된 수리 시설은 크게 관개, 운하, 제방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대형 관개 공사의 건설은 춘추 말기에 시작되어 전국 시대에 가장 흥성했는데, 주요 공사로는 작피(芍陂), 장수 12거(漳水十二渠), 도강언(都江堰), 정국거(鄭國渠) 등이 있다.

작피는 고대의 대형 저수 관개 시설(오늘날의 저수지)로 안휘성 수현 안풍성 남쪽에 위치하며 안풍당(安豐塘)이라고도 불린다. 기원전 6세기 말 초나라 영윤 손숙오(孫叔敖)가 주관하여 축조했다. 작피의 설계는 매우 교묘하다. 현지의 동, 남, 서 세 면이 높고 북쪽이 낮은 지형적 특징을 적절히 이용하여 축조했는데, “작피에는 다섯 개의 문이 있어 냇물을 토해내고 받아들인다.” 작피의 둘레는 약 백 리이며 만 경(頃)에 가까운 밭에 물을 대어 백성들이 이로움을 얻었다.

장수 12거는 대형 농경지 관개 수로로 위나라 업 태수 서문표(西門豹)가 주관하여 건설했다. 각 수로에는 수량을 조절하는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역도원(酈道元)은 “하나의 근원이 열두 흐름으로 나뉘어 모두 수문을 달았다”고 했다.

도강언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형 관개 시설로 사천성 관현(灌縣)에 있다. 진소왕(秦昭王 기원전 306년~기원전 251년) 때 촉 수령 이빙(李氷)의 주관하여 건설한 것이다. 전체 공사는 분수어취(分水魚嘴), 보병구(寶瓶口), 비사언(飛沙堰) 세 부분으로 구성되며 관개와 방제의 작용을 한다. 도강언이 완공된 후 성도(成都) 평원의 약 300만 무(畝)에 달하는 양전(良田)이 물을 공급받게 되어 “가뭄과 장마를 사람이 다스리는” “천 리 기름진 들판”인 천부지국(天府之國 하늘이 내린 곳간의 나라)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그것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발휘하고 있다.

정국거는 기원전 246년 한나라의 수리 전문가 정국(鄭國)이 진(秦)나라를 위해 설계하여 굴착한 것이다. 그는 “경수를 끌어 중산 서쪽 저구로부터 수로를 만들어 북쪽으로 산동을 경유해 낙수까지 300여 리를 흐르게 하여… 소금기 있는 땅 4만여 경을 적시니 모두 한 종(鍾)의 수확을 거두었다.” 수로가 완성되자 “관중은 기름진 들판이 되어 흉년이 없었다.”

의학

후세에 중의의 망(望), 문(聞), 문(問), 절(切) “사진(四診)”의 진단 방법을 확립하여 “맥학(脈學)의 종조”로 받들어지는 의학자 편작이 바로 이 시대에 탄생했다.

편작은 본명이 진월인(秦越人)이며 제나라 사람이다. 《사기ㆍ편작창공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편작은 일찍이 한 객잔을 관리했는데 장상군(長桑君)이라는 사람이 이 객잔에 10여 년을 머물렀다. 그는 줄곧 편작을 관찰했으며 그들은 서로 상대방이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장상군이 늙었을 때 편작에게 의술을 전수하기로 결정했다.

장상군은 “그의 품속에서 약을 꺼내 편작에게 주며 ‘이것을 땅에 닿지 않은 물로 복용하면 30일 후에 사물을 알게 될 것이오’라고 했다. 이에 비방서를 모두 꺼내 편작에게 주었다.”

편작이 그의 말대로 30일 동안 약을 복용하자 “담장 저편의 사람을 보게 되었다. 이것으로 병을 보니 오장육부의 징결(症結)을 다 볼 수 있었으나 다만 진맥을 이름으로 내걸었을 뿐이다.”

즉 편작은 당시 담장 저편의 사람을 볼 수 있는 사물을 투시하는 특이공능을 갖추게 되었다. 이 공능으로 병을 볼 때 사람의 오장육부를 투시할 수 있었으며 병증이 어느 장부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때부터 편작은 제나라나 조나라에서 의술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진맥”을 이름으로 내걸었다.

그는 일찍이 “맥을 짚고, 색을 살피며, 소리를 듣고, 형상을 그리며” 침과 약을 병용하여 괵(虢)나라 태자를 기사회생시킨 적이 있다. 그는 질병의 진행 과정과 결과를 예지할 수 있었는데, 이는 그가 제환후(齊桓侯)에게 세 번 권고한 것과 조간자(趙簡子)를 치료한 의안에서 엿볼 수 있다. 사마천은 편작을 찬양하며 “편작이 의술을 말함에 그 법을 지킴이 정밀하고 밝으니 방술(方術)을 하는 자들의 종조라, 후세에 그 순서를 따름에 바꿀 수 없도다”라고 했다.

《신당서ㆍ예문지》의 기록에 따르면 편작은 《황제팔십일난경(黃帝八十一難經) 약칭 난경》 2권을 저술했다. 《난경》은 《황제내경》 중의 맥학, 경락, 장부, 질병, 수혈, 침법 등에 관한 문제를 해설한 저작이다. 전체 서적이 질문을 하고 어려움을 해결하는 형식으로 총 81난으로 나뉘는데 그중 제69난부터 81난까지는 주로 침법 및 보사법(補瀉法)의 운용을 토론한다. 《난경》은 《황제내경》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하여 후세 침구학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 밖에 기록에 보이는 유명한 의사로는 의완(醫緩)과 의화(醫和)가 있다. 두 사람 모두 진(秦)나라의 명의다. 의완은 일찍이 진경공(晉景公)의 병을 진찰했는데 경공의 병이 황(肓)의 위, 고(膏)의 아래에 있어 “(약물이) 공격할 수도 없고 도달할 수도 없다”라고 진단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공은 과연 사망했다. 나중에 진평공(晋平公)이 또 중병에 걸리자 의화가 진나라에 와서 진단한 후, 평공의 병은 음식으로 인한 것도 아니고 귀신이 붙은 것도 아니며 여색을 탐하고 종욕(縱欲)한 결과이므로 의약이 이미 효험이 없어 적게는 3년, 많게는 10년이면 반드시 죽어 구제할 수 없다고 확정했다. 10년 후 평공은 치료하지 못하고 죽었다. 완과 화는 모두 사람들로부터 “양의(良醫)”라고 칭송받았다. 병리 방면에서 의화는 “음이 넘치면 한질(寒疾), 양이 넘치면 열질(熱疾), 풍이 넘치면 말질(末疾), 비가 넘치면 복질(腹疾), 어둠이 넘치면 혹질(惑疾), 밝음이 넘치면 심질(心疾)이 생긴다”라는 육기(六氣)가 조절되지 않으면 병이 생긴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는 후세 의가들에게 큰 시사점을 주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