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7년—959년)
심연(心緣)
【정견망】
번화했던 성당(盛唐)은 후세에 휘황찬란한 문화를 남겨준 후, 역사 무대와 작별을 고했다. 당조 말기의 농민 기의(起義)로 인해 당나라가 토붕와해(土崩瓦解)된 후, 잡시 할거(割據) 시기로 들어섰으니 후세의 사가들은 이를 ‘오대(五代)와 십국(十國)’ 시기라 부른다. 오대십국(五代十國)은 907년 주온(朱溫)이 당을 멸하고 양(梁)을 건립한 때부터, 960년 조광윤(趙匡胤)이 주(周)를 멸하고 송을 건립할 때까지 전후 총 53년으로 이 기간에 8개 성씨, 14명의 황제가 교체되었다.
소위 오대란 황하 유역 지역에 잇따라 건립된 양(梁), 당(唐), 진(晉), 한(漢), 주(周) 5개 왕조를 가리키며,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왕조들과 구별하기 위해 흔히 후량(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라 부른다. 소위 십국(十國)이란 남방에 건립되어 북방의 5개 왕조와 병존했던 10개 할거 정권인 오(吳), 남당(南唐), 오월(吳越), 전촉(前蜀), 후촉(後蜀), 민(閩), 남한(南漢), 초(楚), 남평(南平) 및 산서의 북한(北漢)을 가리킨다. 십국 가운데 6개는 960년 이후에 멸망했고, 마지막으로 멸망한 북한이 979년에 멸망했다. 이 외에도 북방에는 요(遼)나라와 서하(西夏)가 있었다.
오대십국 시기는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사회가 혼란했던 시기로, 특히 5개 왕조는 위로는 폭군이 있고 아래로는 혹리(酷吏)가 있었으며, 여기에 연이은 전쟁과 계속되는 조세 징수가 더해져 역사적인 명성(名城)인 장안과 낙양이 모두 일찍이 파괴되었으므로 예전 사람들은 오대를 ‘오계(五季 역주: 여기서 季는 末의 의미)’, 즉 말대이자 가장 차(差)한 왕조라 불렀다. 훗날의 잔혹한 형벌인 ‘능지(凌遲)'(즉 천 번 포를 뜨는 형벌)가 바로 오대 시기에 나타났다. 북방 5개 왕조의 혼란에 비하여 남방의 여러 국가는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에 놓여 있어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계속 발전했다.
하지만 이 시기 인쇄술의 발전 및 문학에서 사(詞)의 출현은 모두 이 시대에 적지 않은 빛을 더해주었다.
《추배도》의 예언과 후량의 흥망(907~923)
당조의 유명한 《추배도》 제10상은 후량의 흥망에 대해 정확한 예측을 했다. 제10상의 그림은 두 산이 서로 끼워져 있고 옛길 중간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흉험(凶險)한 모습이다.
참(讖)에 가로되:
넓고 넓은 중원
팔우(八牛)를 막지 못하고
멱수(汨水) 아래를 씻어내니
피는 있고 머리는 없도다
蕩蕩中原
莫御八牛
汨水下滌
有血無頭
여기서 ‘팔우(八牛)’를 합치면 주(朱)가 되고, ‘멱수(汨水) 아래를 씻어내니 피는 있고 머리는 없도다[汨水下滌 有血無頭]’를 합치면 온(溫)이 된다. 이는 당조 말기 주온의 세력이 중원에서 견줄 자가 없음을 뜻한다. 주온은 전쟁을 치르며 수많은 사람을 죽여 피가 강을 이루게 했다.
송(頌)에 가로되:
한 황후(后)와 두 주(主)가 모두 승하하니
사해는 망망하고 모두가 한 집안이로다
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나를 죽이니
돌아서니 다시 이씨(李氏) 아이의 꽃이 있구나
一后二主盡升遐
四海茫茫總一家
不但我生還殺我
回頭還有李兒花
여기서 ‘일후이주’는 주온이 당조 말년의 하(何)황후, 소종(昭宗), 애종(哀宗) 3인을 죽인 것을 가리키며, 그 후 사해를 자신의 손안에 통일했다. 그러나 훗날 차남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세 번째 구절인 “내가 낳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나를 죽이니”에 응한다. “돌아서니 다시 이씨 아이의 꽃이 있구나”는 이존욱(李存勖)이 주씨의 양조(梁朝)를 멸하고 후당을 건립한 것을 가리킨다.
역사의 진실은 참으로 이와 같았다. 당말 선무(宣武)절도사 주전충(朱全忠 본명 주온)은 수많은 할거(割據) 세력을 소멸하고 황하 유역을 초보적으로 통일한 후, 907년 당 애제(哀帝)를 폐하고 스스로 서서 국호를 양이라 하고 개봉에 도읍을 정했으니 역사상 이를 ‘후량’이라 부른다.
후량이 건립된 후, 양 태조 주전충은 하동(河東) 사타인 이극용(李克用) 부자와 계속 패권을 다투었다. 연이은 전쟁으로 사회가 동요하고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912년 주전충이 그 아들에게 죽임을 당한 후 정국은 더욱 혼란해졌다. 이극용, 이존욱 부자가 기회를 틈타 양조를 멸하고 당조를 건립했으니 역사상 이를 후당이라 부른다. 후량의 통치는 총 17년이었다.
《추배도》의 예언과 후당의 흥망 (923~936)
《추배도》 제11상은 후당의 흥망을 예언했다. 제11상의 그림은 들판으로, 한 사람이 숲속 풀밭에서 죽어 있어 후당 황제 이존욱이 살해당한 역사적 사실을 암시한다.
참(讖)에 가로되:
다섯 사람이 함께 점을 치니
녹(祿)도 아니요 복(福)도 아니로다
겸하여 말하자면
희노애락이로다
五人同卜
非祿非福
兼而言之
喜怒哀樂
‘다섯 사람이 함께 점을 치니(五人同卜)’는 번체자 ‘종(從)’ 자가 되고, ‘겸하여 말한다(兼而言之)’는 ‘겸(謙)’ 자로서, 후당(後唐) 장종(莊宗)이 광대 곽종겸(郭從謙)을 총애했음을 암시한다. 이 글의 의미는 곽종겸이 후당 장종 앞에서 일시에 분장을 바꾸어 황제를 기쁘게도 하고 울게도 하고 성내게도 하고 즐겁게도 했으나, 이것은 결코 황제의 복이 아니라는 말이다.
송(頌)에 가로되:
용과 뱀이 서로 싸운 지 삼십 년
어느 날 동광(同光)이 곧장 하늘로 올라가네
천당에 올라가 놀기 좋아하더니
동쪽 병사 백만이 진천(秦川)으로 들어오네
龍蛇相鬥叄十年
一日同光直上天
上得天堂好遊戲
東兵百萬入秦川
“용과 뱀이 서로 싸운 지 삼십 년 어느 날 동광(同光)이 곧장 하늘로 올라가네”는 후당 장종 이존욱이 30년 동안 전장을 누비며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랐음을 가리킨다. 뒤의 두 구절은 그가 황제가 된 후 아낄 줄을 모르고 한 번의 유희 때 광대 곽종겸에게 화살을 맞아 들판에서 죽고 이사원(李嗣源)의 군대가 진천(秦川)을 공격해 오게 만들었음을 말한다.
역사의 진실 역시 이러했다.
923년 4월,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이 후량을 멸한 후 스스로 황제라 칭하니 이가 장종이며 국호를 당이라 하고 낙양에 수도를 건립했으니 역사상 이를 ‘후당’이라 부른다.
926년 위주(魏州 하북 대명大名 동남쪽)에서 병변이 발생해 장종이 광대의 눈먼 화살에 맞아 죽고, 이극용의 양자 이사원이 낙양에 들어가 제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명종(明宗)이다. 당 명종은 장종 때의 일부 폐정을 개혁하고 전쟁을 줄이며 농업 생산을 장려해 백성들이 짧은 숨돌릴 시기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명종이 재위 7년 만에 죽자 후당 내부에 내란이 발생하여 오래지 않아 후진(後晉)에 의해 멸망했다. 후당의 통치 기간은 14년이었다.
《추배도》의 예언과 후진의 흥망 (936~947)
《추배도》 제12상은 후진의 흥망에 대해 정확한 예언을 했다. 제12상의 그림에는 소수민족 복장을 한 사람이 그려져 있고, 다른 돌 하나가 그의 발 아래 있어 석경당이 외족 침략자의 발아래 엎드렸음을 암시한다.
참(讖)에 가로되:
덩그러니 돌(石) 하나가
타인을 아버지라 부르네
16개 주를 다스리니
이미 당의 땅이 아니로다
塊然一石
謂他人父
統二八州
已非唐土
앞의 두 구절은 석경당(石敬瑭)이 거란의 야율덕광(耶律德光)을 아버지라 부르고 스스로 아들이라 칭했음을 말한다. 뒤의 두 구절은 석경당이 거란 병력에 의지해 후당을 소멸하고 후진을 건립했으나 삭주, 계주, 유주 등 16주를 거란에 떼어주었으므로 “16주를 다스리니 이미 당의 땅이 아니로다”라고 한 것이다.
송(頌)에 가로되:
반역의 징조는 먼저 입(口)이 많아지니
들고 남에 모두 주인이 없도다
방울을 단 자가 스스로 방울을 풀리니
아버지가 죽고 아들도 또한 죽으리라
反兆先多口
出入皆無主
系鈴自解鈴
父亡子亦死
뜻인즉 거란인이 석경당을 도와 후당을 멸하고 후진을 건립했으나 훗날 거란인이 다시 후진을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역사의 진실은 이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936년, 후당의 하동절도사였던 석경당(사타인)이 유운(幽雲) 16주(지금의 하북, 산서 북부와 내몽골의 일부)를 떼어주고 매년 비단 30만 필을 공물로 바치며 요나라 군주 야율덕광을 부황으로 섬긴다는 등의 조건을 내걸고 요나라 군사의 원조를 얻어 후당을 뒤엎고 정권을 건립했다. 국호를 진(晉)이라 하고 개봉으로 도읍을 옮겨 역사상 ‘후진’이라 부른다.
후진이 건립된 이후 요나라 군사는 유운 16주를 남하해 중원을 침략하는 기지로 삼아 여러 차례 남하했으므로 북방 지역의 사회 경제가 심각한 파괴를 당했다. 947년 초, 요나라 군사가 개봉을 침입해 후진을 멸했다. 후진은 총 12년 동안 존속했다.
《추배도》의 예언과 후한의 흥망
《추배도》 제13상은 후한의 흥망을 정확히 예언했다. 제13상의 그림 속 성벽 위에 참새 한 마리가 서 있고 성 아래 물 위에 수백 마리의 참새가 날아다니고 있어 후주 곽위(郭威)가 후한을 멸하고 후한 왕조를 세우는 것을 암시한다. 곽위는 세상에서 곽작아(郭雀兒 곽참새)라 불렸으므로 참새로 비유한 것이다.
참(讖)에 가로되:
한수(漢水)가 마르고 참새(雀)가 높이 나니
날아오고 날아가며 머무는 곳 어디인가
높은 산은 미치지 못하고 성곽(郭)은 낮도다
漢水竭 雀高飛
飛來飛去何所止
高山不及城郭低
‘한수가 마른다’는 것은 후한의 멸망을 가리키고 ‘참새가 높이 난다’는 것은 곽위가 후주를 건립한느 것을 가리킨다. 뒤의 두 구절은 곽위가 몇 차례의 우여곡절을 거쳐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음을 뜻한다.
송(頌)에 가로되:
백 마리 참새가 물 위를 나는데
아흔아홉 마리는 산서(山西)를 넘었네
오직 한 마리만이 발을 딛고 서서
높은 곳에 깃들어 홀로 깃털을 고르네
百個雀兒水上飛
九十九個過山西
惟有一個踏破足
高棲獨自理毛衣
황제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참새처럼 많았으나 대부분 해가 서산으로 지듯 실패했고 오직 곽위만이 성공을 거두었음을 뜻한다.
역사의 진실한 상황은 이러했다. 요나라 군사가 개봉으로 침입해 후진을 멸했을 때, 후진의 하동절도사였던 유지원(劉知遠 사타인)이 진양(晉陽 지금의 태원)에서 황제(고조)라 칭하고 여전히 후진의 천복(天福) 연호를 사용하며 후진의 옛 신하들이 귀부하기를 도모했다. 요나라 군사가 북쪽으로 물러난 후, 그는 신속히 낙양과 개봉으로 들어가 개봉에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한(漢)이라 하니 역사상 ‘후한’이라 부른다.
후한 고조는 황제 자리에 있은 지 11개월 만에 죽었고, 그 조카 유승균(劉承釣 은제隱帝)이 즉위한 후 대신들을 함부로 죽였다. 천웅(天雄)절도사 곽위가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일으켜 한 조정에 반기를 들자 은제가 살해당했다. 후한은 겨우 4년만에 멸망했다.
《추배도》의 예언과 후주의 흥망 (951~959)
《추배도》 제14상은 후주의 흥망을 정확히 예언했다. 제14상의 그림에는 땔나무 한 묶음이 그려져 있고 땔나무 위에 새싹 한 가지가 자라고 있다. ‘땔나무(柴)’는 주 세종 시영(柴榮) 부자를 암시하고, 새싹은 조광윤을 가리켜 조씨의 송조가 후주를 대체함을 암시한다.
참(讖)에 가로되:
오얏 나무에서 뿌리와 싹을 얻고
석류(石榴)가 흐드러지게 꽃을 피우네
마른나무가 봄을 만남은 한순간일 뿐이니
그에게 천하를 넘겨주어 영화를 다투게 하라
李樹得根芽
石榴漫放花
枯木逢春只一瞬
讓他天下競榮華
앞의 두 구절은 오얏나무와 석류가 번창함을 이용해 시영의 이름을 은유했다. 세 번째 구절인 “마른나무가 봄을 만남은 한순간일 뿐이니”는 시영이 재위한 시간이 매우 짧아 죽은 후 황위를 일곱 살 난 아들 시종훈(柴宗訓)에게 전했음을 뜻한다. 시종훈이 다시 황위를 조광윤에게 전하여 송조가 300여 년 동안 국운을 누렸으므로 “그에게 천하를 넘겨주어 영화를 다투게 하라”고 한 것이다.
송(頌)에 가로되:
금목수화토가 이미 끝났으니
열세 명의 동자와 다섯 명의 왕공이로다
영명함을 다시 보아 태평한 날이 오니
오십삼 년의 운수는 통하지 않으리라
金木水火土已終
十叄童子五王公
英明重見太平日
五十叄參運不通
처음 두 구절은 오대를 종결한 것으로, 다섯 왕공은 오대(五代)를 가리키고 13 동자는 오대의 13명 황제를 가리킨다. 뒤의 두 구절은 후주 세종(시영)이 출현하여 천하가 다시 태평을 볼 희망이 생겼으나 하늘이 정한 오대는 단지 53년의 운수밖에 없어 세종의 천하 역시 아들에 이르러 끝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역사의 진실은 이러했다. 951년 정월, 곽위가 군사를 일으켜 후한을 멸하고 개봉에서 황제(태조)라 칭하니 국호를 주라 하는데 역사상 이를 ‘후주’라 부른다.
주 태조는 빈한한 가문 출신으로 민간의 고초를 잘 알았기에 제위에 오른 후 겸손히 간언을 받아들이고 생활이 검소했다. 그는 앞선 4대(代) 왕조가 무장을 너무 신임했던 교훈을 흡수하여 인재에 마음을 두고 폐정을 혁파하고자 힘쓰며, 탐관오리를 엄벌하고 생산을 장려하며 가혹한 잡세를 폐지하고 소 임대료를 면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 농민의 생산 적극성을 높이고 사회 생산을 발전시켰다. 그러다 954년 태조가 사망하자 처조카이자 양자인 곽영(郭榮, 원래 이름은 시영)이 즉위하니 이가 세종이다.
시영은 역사서에 “외모가 영특히고 기이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으며 서사(書史)와 황로(黃老)에 대략 통달했고 성품이 침중하고 말수가 적었다”고 기록하였으니 오대 난세 속의 뛰어난 정치가였다.
세종은 즉위한 후 태조의 개혁을 바탕으로 혁신을 계속했다. 그는 먼저 기강을 정돈하고 탐관을 엄벌했다. 동시에 현행 법률을 정리하여 번잡함을 없애고 간소화하여 《대주형통(大周刑統)》을 편찬해 전국적으로 통일된 법률을 준수하게 했다. 경제 방면에서는 개간을 장려하고 균전 제도를 실시했다.
그는 또한 수리(水利)를 일으켜 개봉을 중심으로 하는 수로 교통망을 회복했다. 예컨대 먼저 재상 이곡(李穀)을 파견하여 황하 제방을 순시하게 하고 6만 명의 성인 남자 징발해 30일 동안 제방을 견고히 수리하게 했으며, 2만 명을 원무(原武 지금의 하남 원양原陽)로 보내 황하 제방이 터진 곳을 막아 수재를 줄였다. 956년과 959년에는 변하(汴河)와 오장하(五丈河)를 준설해 제수(濟水)와 연결함으로써 산동의 배가 바로 개봉에 도달할 수 있게 했다.
이어 변하(汴河) 남단 및 산양독(山陽瀆)을 준설해 황하에서 양자강에 이르는 물길을 다시 통하게 했고, 또 채하(蔡河)를 준설해 수도인 개봉에서 남쪽으로 수주(壽州)에 도달하게 했다. 이로부터 산동과 강회(江淮)의 식량이나 화물이 모두 물길을 통해 바로 경성(京城 지금의 개봉)에 도달할 수 있게 되어 개봉이 번영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그는 군대를 훈련하고 통일 전쟁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재위 기간 중 멸불(滅佛) 조치를 취했으니 이는 ‘삼무(三武 북위 태무제, 북주 무제, 당 무종) 멸불’의 뒤를 이은 또 한 차례 대규모의 억불 운동이었다. 역사상 다른 멸불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주 세종은 재위 5년 후인 959년 병으로 사망하니 향년 겨우 39세였다. 이는 신앙에 대해 억압을 실시한 사람은 모두 하늘의 벌을 받게 됨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시영이 죽은 후 황위는 일곱 살 난 어린 아들 시종훈에게 전해졌다. 이듬해 귀덕(歸德)절도사 겸 금군 수령,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 조광윤이 진교병변(陳橋兵變)을 일으켜 황포를 몸에 두르고, 이어 시종훈을 협박해 퇴위시킨 후 송조를 건립했다. 후주는 겨우 8년 동안 존재한 후 멸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