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여(劉如)
【정견망】
【원문】
子曰:“巧言(1)令色(2),鮮(3)矣仁。”
【주석】
(1) 교언(巧言): 의도적으로 꾸미고, 남의 환심을 사거나 비위를 맞추는 말.
(2) 영색(令色): 영(令)은 아름다움을 뜻하며, 고의로 마음에 들게 꾸민 낯빛이나 태도를 지어내어 타인의 호감을 사려는 것.
(3) 선(鮮): 적다, 드물다.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말을 교묘하게 하고 낯빛을 보기 좋게 꾸미는 이들 중에 진정한 인(仁)을 지닌 사람은 드물다.”
【본장 요지】
덕(德)은 진(真)을 귀하게 여기며, 위선(僞善)을 경계한다.
진정한 인덕(仁德)은 진심에 있으며, 교언영색은 위선으로 덕을 닦는 길에서 가장 쉽게 나타나는 문제이므로 분명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해설】
제1장은 덕을 세우고, 제2장은 덕을 행하며, 제3장은 진(真)을 지킨다
《학이》편 맨 앞 세 장은 사실 완벽하고 질서 정연한 한 갈래 수신(修身)의 길을 보여준다.
제1장은 사람들에게 배움의 목적이 덕을 닦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음을 알려준다.
제2장은 덕을 닦는 첫걸음이 가정에서 효도와 공경을 실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됨을 알려준다. 제3장에서 공자는 곧바로 제자들에게 경고한다. 덕을 닦는 길에서 가장 큰 위험은 무지(無知)가 아니라 거짓 인(假仁)과 거짓 선(僞善)이며, 진실함을 잃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장에서는 딱 네 글자만 분별하면 한다. 바로 ‘진짜 덕과 가짜 덕[眞假之德]’이다.
공자는 왜 맨 처음부터 ‘교언영색’을 말했을까?
많은 이들은 공자가 단순히 사람들에게 말을 교묘하게 하지 말라고 권한 것이라 여긴다. 만약 그저 그런 정도라면, 이 구절을 《학이》 제3장에 배치한 것은 너무 가볍다.
앞의 두 장에서 막 수덕을 이야기한 뒤, 제3장에서는 곧바로 경고한다. 수덕에 있어 가장 쉽게 곁길로 빠지는 곳은 바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신경 쓰기 시작할 때라는 것이다. 사람이 도리를 조금 배우면 다른 이들이 자신을 덕(德)이 있다고 칭찬해 주기를 바라기 쉽고, 선행을 조금 베풀어도 다른 이들이 자신이 선하다는 것을 곧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덕’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겉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공자는 교묘한 말이 반드시 악(惡)이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낯빛을 보기 좋게 꾸미는 것이 반드시 거짓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가 경고한 것은 만약 말과 표정이 남을 기쁘게 하고 명성을 얻기 위한 것이어서, 이기적인 사심(私心)에서 비롯된 것이지 남을 위하는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인(仁)은 이미 변질되어 떠나버렸다는 점이다.
교언영색은 단순히 말뿐만이 아니라, 사람으로 살아가는 태도이다
‘교언’은 언어를 꾸미는 것이고, ‘영색’은 표정을 꾸미는 것이다. 하나는 말을 꾸미고 다른 하나는 안색을 꾸미니, 꾸미는 것은 실로 겉모습뿐이다. 공자는 늘 인을 말하면서도 한결같이 내면과 본심을 이야기했다.
인(仁)은 마음에 있는 것이고 언어는 마음의 발로일 뿐이며, 덕은 안에 있는 것이고 안색은 덕의 겉으로의 드러남일 뿐이다. 내면은 변하지 않은 채 오직 겉모습을 인자하고 겸손하며 부드럽게 보이도록 애쓴다면,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제1장에서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고 한 것은 마음을 닦는 것[修心]이다. 제3장에서 경고하는 바는 마음을 닦는 것을 겉모습을 꾸미는 것으로 바꾸지 말라는 것이다. 진정한 인은 굳이 애써 연기할 필요가 없다. 진정으로 인덕이 있는 사람은 말이 저절로 성실하고 태도가 저절로 온화하다. 그의 선은 연출해 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이다. 마치 나무의 뿌리가 깊으면 가지와 잎이 저절로 무성해지는 것과 같다. 뿌리가 없는데 잎사귀들을 조각조각 갖다 붙여봐야 결국 시들어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제2장에서 “근본이 서야 도가 생겨난다”고 했으니, 제3장은 사람들에게 가지와 잎사귀를 근본으로 삼지 말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덕행의 가장 큰 유혹은 명예(名)이다
공자는 왜 ‘교언영색’을 이토록 앞부분에 배치했을 뿐만 아니라, ‘효제(孝悌)’ 뒤에 바짝 붙여 놓았을까? 덕을 닦음에 있어 가장 쉽게 저지르는 잘못이 바로 덕을 구하는 것을 명예를 구하는 것으로 여기는 데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덕을 닦기 시작한 후 가장 큰 유혹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덕이 있다고 여겨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도리를 조금 배우면 다른 이들이 자신의 수양을 칭찬해 주기를 바라고, 선행을 조금 하면 다른 이들이 자신이 선하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효도를 조금 하면 다른 이들이 자신이 효자임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고, 인의의 말을 조금 하면 다른 이들이 자신이 정직하고 경지가 높다고 여겨주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본래 자신을 닦던 것이 서서히 자신을 뽐내는 것으로 변해버린다.
교언영색이 가장 은폐되어 있는 곳이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효제(孝悌)를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그것이 꼭 고의로 남을 속이려 한 것도 아니고 뚜렷한 명예나 이익을 꾀하려 한 것도 아닐 수 있다. 대개는 사람이 점점 타인의 시선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불효하거나 불충하다는 비난을 들을까 두렵고, 인정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꾸미기 시작하고, 표정을 꾸미며, 나아가 덕행까지 꾸미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음속으로는 이미 짜증이 나면서도 입으로는 여전히 가장 다정한 말을 해주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남이 자기를 나쁘게 볼까 봐 두려워서다. 어떤 일이 그릇된 줄 알면서도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과오를 지적하려 들지 않는다. 남을 도울 때 입으로는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감사 인사 한마디, 인정 한 조각을 내심 기대한다.
이러한 모습들은 언뜻 보기에는 악처럼 보이지도 않고, 심지어 약간의 선한 모습을 띠고 있다. 하지만 겉모습은 갈수록 인(仁)을 닮아가지만 내면은 갈수록 인에서 멀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효자 이미지를 유지하거나 인덕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드물다”고 말한 깊은 뜻이다. 가장 위험한 것은 명백하게 선한 척 가장하여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거짓을 오랫동안 한 나머지 스스로조차 그것을 믿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연기를 자신의 덕행으로 여기기 시작하고, 남의 칭찬을 자신의 수양으로 여기며, 겉모습을 내면의 진실함으로 여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를 속이는 ‘자기(自欺)’이다.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남을 속이는 ‘기인(欺人)’보다 알아차리기 훨씬 어렵다. 남을 속일 때는 자신이 연기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지만, 자기를 할 때는 자신이 이미 곁길로 빗나갔음을 알지 못한다. 어쩌면 어떤 이가 “나는 원래 이렇게 온화하고 선량한 사람이야”라고 확신하면 할수록,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추어진 이기적인 사심을 스스로 돌아보고 발견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공자는 말솜씨를 비판하지도 않았고, 온화한 낯빛을 반대하지도 않았다. 그가 분별한 것은 바로 그 꾸며진 마음이다. ‘이 말을 하는 것이 남을 위하는 것인가, 아니면 좋은 사람이라는 내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것인가? 이 미소를 짓는 것이 진실에서 우러나온 것인가, 아니면 명예와 이익을 구하기 위한 것인가?’
인(仁)은 남들이 보기에 내가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진정으로 선을 향하게 만드는 것이다. 덕이 명예나 이익을 구하는 데서 비롯된다면, 아무리 좋은 언어와 아무리 온화한 표정도 그저 교언영색일 뿐이다.
교언영색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아마 더는 천하를 주유하지도 않고 제후의 문객이 되지도 않겠지만, 교언영색은 결코 떠난 적이 없다. 남의 비위를 맞추는 말 한마디, 의도적으로 호감을 사기 위한 미소 한 번, 인정과 공명리익(功名利益)을 얻기 위해 드러내 보이는 위선 등은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서서히 곁길로 빗나가게 만들고 자신의 초심을 잊게 할 수 있다.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말을 잘하는가 여부가 아니라, 말을 하는 그 마음이 진실한가 하는 점이다. 공자가 분별한 것은 기교가 아니라 동기이다.
자신을 닦는 것으로부터 초심을 지키는 것에 이르기까지
제1장에서 “배우고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고 한 것은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이 동요하거나 불쾌해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이다.
제3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자신을 꾸미기 시작하지 말라는 것이다. 덕을 닦음이란 남이 좋아할 만한 모습을 닦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고 인후한 마음을 닦아내는 것이다.
인은 교언영색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마다 바름으로 되돌아가는 [念念歸正] 속에 있다. 그러므로 《학이》 제3장은 《논어》가 후세에 처음으로 일깨워주는 가르침이다. 덕을 배움에 진실함을 지키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공자의 깊은 뜻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덕을 닦음에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 즉 효제라는 첫걸음을 내딛는 그 순간부터 엄숙한 경고를 주어 모두가 배움을 통해 초심을 잃지 말고 위선으로 변하지 않으며, 마침내 가장 남을 잘 속이고 자신마저 속이는 위선적인 군자가 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애초부터 배움의 길을 바르게 닦아놓아 곁길로 빠지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다.
전(前) 세 장의 결론
《학이》편의 앞선 세 장을 돌이켜보면 공자의 가르침이 층층이 전개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제1장은 ‘배움[學]’을 이야기하며 먼저 배움의 방향을 바르게 잡는다. 즉 배움이란 지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덕을 닦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제2장은 ‘효제’를 이야기하며 인덕을 가정에 안착시켜 수신은 마땅히 일상적인 인륜에서 시작해야 함을 알려준다.
제3장은 ‘교언영색’을 이야기하며 나아가 덕을 닦는 근본을 지켜내게 한다. 즉 사람들에게 덕행을 외적인 치장으로 바꾸지 말고, 선을 명예를 구하는 겉모습으로 만들지 말며, 시종일관 진실하고 인후한 마음을 간직해야 함을 경고하는 것이다.
이 세 장은 또한 《대학》에서 말하는 수신의 차제(次第)와도 멀리서 서로 호응한다. 마음이 바른 뒤에야 몸이 닦이고, 몸이 닦인 뒤에야 집안이 다스려진다는 것이며, 수신의 근본은 뜻을 성실히 하는[誠意] 데 있다. 《대학》에서는 “그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람이 만약 그 뜻을 성실히 하지 못하면 겉모습을 내면의 덕으로 여기기 쉽고, 남의 인정을 자신의 수양으로 여기며, 자신도 모르게 덕을 닦던 초심을 잃어버리게 된다.
《논어》라는 책은 ‘학(學)’ 자로 첫머리를 열며 급히 천하를 논하려 하지 않고 먼저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도록 가르친다. 남을 바꾸려 서두르지 않고 먼저 자신을 잘 다스리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학이》편의 앞선 세 장은 사실 동일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배움은 무엇을 위해 배우는가? 덕을 닦는 것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또 어떻게 곁길로 빠지지 않는가?
천하의 다스림은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마음의 바름은 덕을 닦음에서 비롯된다. 덕을 닦는 시작은 마음을 세우는 데 있고, 덕을 닦는 성취는 진실함을 지키는 데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