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여(劉如)
【정견망】
【원문】
曾子(1)曰:“吾日三省(2)吾身。爲人謀而不忠(3)乎?與朋友交而不信(4)乎?傳(5)不習(6)乎?”
【주석】
(1) 증자: 증삼(曾參), 자는 자여(子輿), 노나라 사람이며 공자의 제자로 효도로 이름났고, 후세에 “종성(宗聖)”으로 추존되었다.
(2) 삼성(三省): ‘성(省)’은 ‘xǐng’으로 읽으며 반성하고 살핀다는 뜻이다. ‘삼성’은 매일 세 가지 방면에서 자신을 반성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반복해서 거듭 자신을 성찰한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3) 충(忠):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 여기서는 남을 위해 일을 봐줄 때 대충 얼버무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과 힘을 다할 수 있었는지를 이른다.
(4) 신(信): 성실하고 신의가 있는 것. 여기서는 친구와 교제할 때 말과 행동에 신의가 있었는지를 이른다.
(5) 전(傳): 스승이 전수한 사람 되는 도리를 이른다.
(6) 습(習): 단순히 복습하고 반복하여 외우는 것이 아니라, 배운 도리를 자신의 언행 속에 착실히 이행하고 일상생활과 대인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실천하며, 실천 속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바로잡는 것을 뜻한다. 《학이》 제1장의 “배우고 때로 익히다”의 ‘습’과 서로 통한다.
【번역】
증자가 말했다. “나는 매일 나 자신을 반성한다. 남을 위해 일을 도모하면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지 않았는가? 친구와 사귀면서 성실하고 신의를 지키지 않았는가? 스승님께서 전수해 주신 사람 되는 도리를 내 언행 속에 진정으로 실천했는가?”
【본장 요지】
배움(學)이란 사람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익힘(習)이란 사람 되는 도리를 생활 속에 실천하는 것이다.
《논어》에서 말하는 “배움”은 단순히 지식을 얻고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움은 교실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정, 직장, 사회 그리고 평생의 언행(言行) 속에서 끊임없이 실천하고 반성하며 자신을 바로잡는 것이다.
인생 자체가 바로 배움의 교실이고, 생활은 덕을 닦는 공부이다.
【해설】
1. “배움(學)”에서 “익힘(習)”으로, 배우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람 되는 도리이다
《논어》의 첫 장은 다음과 같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만약 ‘배움’을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지식 학습이나 기술 습득으로 이해한다면, ‘때로 익히는 것’ 또한 흔히 공부한 내용을 반복 복습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학이편》을 계속 읽어 보면 사정이 결코 그렇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제2장은 효와 제(悌)를 말하고, 제3장은 교언영색(巧言令色)을 말하며, 이번 장에서는 또 충(忠), 신(信), 그리고 자신을 반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 내용들 중 어느 것이 소위 지식과 기술을 익히도록 가르치고 있는가? 없다.
《논어》에서 말하는 “배움”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효와 제는 가정에서 어떻게 사람이 되어야 할지 가르치는 것이고,
“교언영색”은 겉치레만 일삼아 위선적인 사람이 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며,
충과 신은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사람이 되어야 할지 알려주는 것이고,
“삼성오신(三省吾身)”은 나아가 매일 안으로 자신의 언행을 살펴보아야 함을 일러준다.
그러므로 “배움”과 “익힘”은 서로 보완한다. 배움은 도리를 깨닫는 것이고, 익힘은 그 도리를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진정한 배움은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더 바르고, 더 선하고, 더 참되게 변화하는 것이다.
2. 사람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인데, 어디가 진정한 배움의 교실인가?
이 점을 깨달았다면 증자가 왜 “나는 매일 스승님께서 가르쳐 주신 지식을 복습한다”고 하지 않고 “나는 매일 나 자신을 반성한다”고 말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 되는 데는 고정된 교실이 없기 때문이다. 가정은 교실이다. 부모를 대할 때는 효를 배울 수 있고, 형제자매를 대할 때는 제(悌)를 배울 수 있다.
가정을 벗어나 직장과 사회로 들어가면 또 새로운 공부거리가 생긴다. 남을 위해 일을 봐줄 때 마음과 힘을 다했는가? 친구와 사귈 때 성실하고 신의를 지켰는가? 이익, 득실, 오해, 갈등에 부딪힐 때 자신의 말과 행동은 여전히 사람이 지녀야 할 분수를 지키고 있는가? 이것들이 바로 “익힘”이다.
그러므로 배움의 교실은 스승이 강의할 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온갖 생활 속에 존재한다. 스승이 전해준 도리는 우리에게 하나의 기준을 알려줄 뿐이며, 진정한 공부는 생활 속으로 돌아가 완수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익힘”의 진정한 의미이기도 하다.
3. 가정에서 사회까지, 곳곳이 덕을 닦는 공부
《학이편》의 순서는 사실 매우 흥미롭다. 제2장에서 “효도와 공경이란 바로 인덕의 근본이다.”라며 먼저 가정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는 곳이 바로 가정이기 때문이다.
이 장에 이르면 증자는 “남을 위해 도모하되 충실하지 않았는가? 친구와 사귀되 신의를 지키지 않았는가?”라고 묻는다. 범위가 가정에서 사회로 확장된 것이다. 남을 위해 일을 봐주는 것은 일을 처리하는 것이고, 친구와 사귀는 것은 남을 대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가정에서는 효와 제를 말하면서도 사회로 나가서는 일을 대충 처리하고 친구에게 신의를 저버린다면, 그가 배운 도리는 진정으로 온전히 실천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덕을 닦는 것은 특정한 어떤 장소에서만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상대하든 자신의 언행이 자신이 깨달은 도리에 부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앞장인 “교언영색”의 경고와도 딱 맞아떨어진다. 진정한 덕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약 남 앞에서는 그저 좋아 보이기만 하고 뒤에서는 딴판이라면 그것은 여전히 “표면”에 머물러 있는 것뿐이다.
증자가 제시한 방법은 매우 직접적이다. 매일 뒤돌아보아 자신을 검사하는 것이다. 먼저 남이 옳고 그른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묻는 것이다. “나는 오늘 바르게 행동했는가?”
4. “삼성오신”으로 겉치레만 하는 것을 방지
제3장에서 “교언영색”을 다룬 것은 외모나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라는 경고였다. 이어 제4장에서는 우리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가 방지해야 할 것을 알려주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겉모습에 스스로 속는 것이다.
사람은 명성에 쉽게 집착하고 남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 신경을 쓴다.
남들이 자신을 효성스럽고, 선량하고, 능력 있고, 수양이 깊다고 여겨주기를 바라며, 시간이 흐르면 심지어 “남의 눈에 비친 자기 자신”을 진짜 자기 자신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덕을 닦는 데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남을 속이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삼성오신”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작용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검사한다. 오늘 남을 위해 일해 주면서 내가 마음을 다했는가? 오늘 남과 사귀면서 내가 신의를 지켰는가? 오늘 스승이 가르쳐 주신 도리를 나는 도대체 실천했는가? 진심에서 우러나와 그것을 해냈는가?
이렇게 묻다 보면 단순히 “내가 무엇을 알게 되었다”는 선에서 끝나지 않으며,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보여 겉보기에는 온화하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폐단에 머물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기 기만이다. 끊임없이 안으로 반성하고 스스로 묻고 살펴야만 진정한 수신입덕(修身立德)을 이룰 수 있으며, 교언영색의 곁길을 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배움은 결국 반드시 자신의 언행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5. “전불습호(傳不習乎)”: 스승이 가르쳐 준 도리는 생활 속에서 낱낱이 검증해야 한다
이 구절은 본장에서 가장 세심하게 살펴볼 가치가 있는 대목이다.
“스승님이 내게 전수해 주신 도리를 나는 ‘실천’했는가?“
여기서의 ‘습’은 지식을 다시 암기하는 것이 설령 외워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앎(知)’에 머무를 뿐이며, 스승이 가르쳐 준 사람의 도리를 조금씩 자신의 생활 속으로 들여와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행(行)’이다. 이것이 바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본래 뜻이다.
그러므로 가정은 배움 밖의 장소가 아니며, 직장도 배움 밖의 장소가 아니고, 사회 역시 배움밖의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곳들은 전부 배우는 장소이며 배움의 교실이다.
부모를 어떻게 대하는지가 공부이고, 아이를 어떻게 대하는지가 공부이며, 친구와 어떻게 지내는지가 공부이고, 동료를 어떻게 대하는지가 공부이다. 남이 나를 오해할 때 어떻게 말을 하는가 역시 공부이며, 이익에 부딪힐 때 어떻게 취사선택하는가 역시 마찬가지로 공부이다.
스승이 가르쳐 주는 것은 도리이고, 생활이 내어주는 것은 시험 문제이다. 그리고 우리의 매일의 언행은 바로 우리 자신의 답안지이다.
이렇게 보면 “배우고 때로 익힌다”는 것은 더욱 깊은 뜻을 지니게 된다. 가끔 한 번 배우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실천하는 것이고, 배우고 나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생 동안 배우는 것이다.
6. 배움이란 사실 일생 동안 덕을 닦는 과정이다
이 도리를 더 깊은 차원에서 바라보면, 옛사람들이 말한 “배움”과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교육”은 그 근본적인 방향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배움이라고 하면 흔히 지식, 학력, 기술, 자격을 떠올리게 된다. 반면에 전통문화가 중시한 “배움”은 상당 부분이 안으로 살펴보는 데 있으며, 이것이 바로 배움의 근본이자 핵심이다.
나는 오늘 어디가 충분히 훌륭하지 못했는가?
어디에 여전히 사심이 남아 있는가?
어디가 아직 충분히 바르지 못한가?
어디서 도리는 깨달았으나 정작 실천하지는 못했는가? 발견하면 고치고, 깨달으면 행한다.
그러므로 유가는 비록 사람의 일상생활에 눈을 맞추고 사람들에게 효제, 충신, 인의를 가르치지만, 사실상 그 내면의 수양 방향은 여전히 안으로 자신을 닦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가는 전통적인 “도(道)”가 인간 세상에서 실천되는 한 가지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의 일상생활을 떠나지 않고, 사람의 언행을 떠나지 않으며, 사람으로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덕행과 지혜를 제고해 나간다.
그것은 사람에게 남을 먼저 바꾸라고 요구하지 않고, 먼저 돌이켜 자신을 보라고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들의 수신(修身)이 지닌 중요한 특징이다. 남을 닦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닦고, 남을 바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토록 반복해서 자신을 성찰할 수 있다면 “앎”에서 “실천”으로 나아가게 되고, 또 “실천” 속에서 자신의 더 깊은 부족함을 발견하게 된다.
이 끊임없이 안으로 바름을 구하는 과정 자체야말로 옛사람들이 체인(體認)한, 더 큰 지혜를 끊임없이 열어젖힐 수 있는 하나의 길이자 말없는 천기(天機)이다.
7. 학습에 내성(內省)이 더해져 “도(道)를 즐기는” 길을 성취
이제 다시 《학이편》 제1장인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를 돌아보면, 이 “즐거움(樂)”이 단순히 어떤 기술을 배우거나 자격이나 학위를 얻었기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배운 도리가 조금씩 자신의 생명이 되어가기 때문이며, 효도를 깨달아 부모를 대하는 언행 속에서 실천하고, 충신을 깨달아 일과 교제 속에서 실천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여 고쳐나가고, 오늘이 어제보다 더 참되고, 더 선하고, 더 바르게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안팎으로 우러나오는 변화는 마음의 승화이자 귀진(歸真)을 향한 각성이며, 지혜의 끊임없는 계발이고, 마음에 복이 가득 차오르는 진기(真機)로 이끌어 자연스럽게 사람으로 하여금 든든하고 즐겁게 살아가게 만든다. 배움에 내성이 더해지면 자연스럽게 “도를 즐기는” 길이 된다. 배우고 탁마하는데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학이편》의 앞 세 장과 제4장은 서로 일맥상통한다.
제1장이 “배움”을 말하여 사람 되는 도리를 깨닫기 시작함을 뜻한다면,
제2장은 “효제”를 말하여 그 도리를 가정에 뿌리내리게 하고,
제3장은 “교언영색”을 말하여 겉치레만 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제4장은 “삼성오신”을 말하여 매일의 생활 속에서 어떻게 거듭 검사하고 거듭 바로잡아 배운 바가 진정으로 자신의 행동이 되게 하는지를 일러준다.
여기에 이르면 “배움”은 더 이상 교실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인생 그 자체가 배움의 교실이고, 생활 그 자체가 덕을 닦는 공부이며, 한 사람의 일생은 바로 사람 되는 도리를 끊임없이 언행 속에서 실천하는 과정이다.
이것이야말로 《논어》가 말하는 “배움”의 진정한 깊은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