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상하오천년〗 운(運)에 따라 일어난 통일 왕조 명조(元朝) (5)

(1368년—1644년)

심연(心緣)

【정견망】

명조(明朝) 중기의 쇠퇴

1424년, 성조 영락제가 일곱 번째로 변새(邊塞)를 나가 친정(親征)할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5세였다. 이후 아들인 인종(仁宗)과 손자 선종(宣宗)이 선후로 즉위했다. 이들은 성조의 옛 제도를 준수했기에 그런대로 명조의 표면적인 번영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선종 시기에는 현신(賢臣) 양사기(楊士奇), 양영(楊榮), 양부(楊溥)를 임용해 정사를 보좌하게 하니, 백성들이 편안히 살며 즐겁게 일하고 국가가 번창했다. 그러나 성조로부터 시작된 환관(宦官)의 전권(專權)과 관리들의 기강 해이와 부패는 명조로 하여금 1436년 영종(英宗)이 즉위함으로부터 쇠락으로 걸어가게 만들었다. 농민 기의(起義)가 빈발했을 뿐만 아니라 대외 방위도 위기가 사방에 도사리게 했다.

환관의 전권과 관직 기강 해이의 악과(惡果)

명태조(明太祖) 시기에는 환관이 정사에 관여하는 것을 엄금했다. 하지만 정난의 역(靖難之役) 때 환관들이 군공(軍功)을 많이 세우자 연왕 주체는 가노(家奴)가 믿을 만하다고 여겨 보위에 오른 후 환관에게 사신, 전정(專征 군사 정벌), 감군(監軍 군대 감시), 분진(分鎮 지방 방어 거점 주둔) 등 군정(軍政)의 대권을 위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창(東廠)이라는 특무(特務) 기구를 설립하여 심복 태감을 시켜 관장하게 했다. 동창은 금의위(錦衣衛)와 마찬가지로 오직 황제에 대해서만 책임을 졌으며, 다른 사법 기관의 승인을 거칠 필요 없이 멋대로 신민(臣民)을 감독하고 체포할 수 있어 환관이 정치에 개입하는 단초를 열었다.

물론 영종 이전에는 황제가 직접 정사를 돌봤기 때문에 환관이 감히 멋대로 전횡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종 이후로는 황제가 대부분 평범하고 어리석어 무능했기에 환관이 기회를 타고 권력을 농단해 내각(內閣), 사법 등의 사무에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헌종 성화(成化 1464~1487) 연간에 이르러 명조는 다시 서창(西廠)을 설립하였고, 후에 다시 내행창(內行廠)을 설립하니 동창과 서창보다 더욱 혹독했다. 무종 정덕(正德 1505~1521) 이전에는 창과 위(衛)가 분립해 번갈아가며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정덕 시기에는 창과 위가 합세하니 특무가 전국 각지에 가득 찼고 심지어 멀리 떨어진 외진 시골에 거주하는 백성까지도 그 해를 입었다. 명대 환관 전권의 현상은 중국 역사상 심각한 편에 속해 후세의 전제 체제에 다시 한번 전제를 강화하는 범례(範例)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환관은 정치적으로 권력을 농단하는 동시에 경제적으로 탐오(貪汙)하고 뇌물을 받아 백성들의 재산을 긁어모으고 교묘하게 빼앗거나 강탈해 대량의 재산을 갈취하니 백성의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조정 관원 중의 붕당의 다툼은 선종(宣宗) 선덕(宣德 1425~1435) 이래로 더욱 격렬해졌다. 관직 기강이 해이해져서 이미 점점 부패로 흘러갔다.

환관의 전권과 관직 기강 해이와 부패는 명조가 쇠퇴로 나아가게 했다.

‘토목지변(土木之變)’에 관한 예언과 영종부터 세종까지의 통치

1435년, 선종이 사망하자 이듬해 9세의 어린 영종 주기진(朱祁鎮)이 등극하니 연호는 정통(正統)이었다. 태황태후(太皇太后)가 보정하며 정사를 내각에 위임하자 대학사(大學士) 양사기 등에게 조정에 올리는 상소문이나 보고에 대해 의견을 제출해 황제가 결정하게 했다. 이것이 명조 ‘표의(票擬 초안 작성)’ 제도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명조 각신(閣臣) 중에서는 오직 위망(威望)이 높은 수보(首輔, 수석 대학사, 또 수규首揆라 부름)만이 표의권을 가졌고, 차보(次輔)와 군보(群輔)는 오직 논의에 참여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권세가 있는 각신, 특히 수보가 되기 위해 조신(朝臣) 사이에 음으로 양으로 쟁투가 전개되었다.

예언서 《추배도(推背圖)》와 《소병가(燒餅歌)》는 모두 영종 시기에 발생한 사건에 대해 정확히 예측했다.

《추배도》 제30상의 그림에는 한 마리 호랑이가 돌 언덕(亂石崗) 위에 그려져 있는데, 호랑이는 짐승 중의 왕으로서 영종 시기 권력을 잡은 환관 왕진(王振)을 암시하고, 돌은 환관 석형(石亨)을 가리킨다. 영종은 왕진의 인도 아래 하루 종일 향락을 즐기다 몽골의 에센(也先)에게 포로로 잡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나중에 영종이 돌아오자 석형이 다시 영종을 도와 복위(復位)시켰다. 이 그림은 영종이 포로가 된 일과 복벽(復辟,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름)의 일을 은유한다.

참문(讖文)은

참(讖)에 가로되:

반 개의 규(圭)와 반 개의 숲(林)이
합쳐지니 변란이 생기네
돌(石) 또한 신령함이 있어
살아서는 영화롭고 죽어서는 천하도다

半圭半林 合刖生變
石亦有靈 生榮死賤

‘반 개의 규(圭)와 반 개의 숲(林)’을 합치면 토목(土木)이 되니, 토목보(土木堡) 사변을 암시한다. ‘합쳐지니 변란이 생기네’는 영종이 토목보에서 몽골 에센에게 포로가 된 것을 가리킨다. ‘돌(石) 또한 신령함이 있어 살아서는 영화롭고 죽어서는 천하도다’은 영종이 포로가 된 후 이복 동생인 경제(景帝 연호는 경태)가 즉위하였으나 후에 영종이 돌아오자 석형이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영종을 복벽시킨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석형은 공을 믿고 오만했기에 마침내 극형에 처해졌다.

또 《소병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北方胡虜殘生命, 禦駕親征得太平,

북방의 호로(몽골 오이라트)가 생명을 해치나, 어가친정(황제의 친정)으로 태평을 얻으리라.

失算功臣不敢諫, 舊靈遮掩主驚魂。

실산(계책을 그르침)한 공신(왕진)에 감히 간하지 못하고, 구령(옛 신령/액운)이 가리어 주상(영종)의 혼을 놀라게 하네.

國壓瑞雲七載長, 胡人不敢害賢良,

국운이 서운(경제 통치)에 눌림이 7년이나 길 터이니, 호인(몽골)은 감히 현량(영종)을 해치지 못하고,

相送金龍複故舊, 靈明日月振邊疆。

금룡(황제)을 서로 보내 옛 터(북경)로 복귀시키니, 명조의 변강을 떨치리라.”

“天下饑寒有怪異, 棟梁龍德乘嬰兒,

천하가 기근과 추위에 시달리고 기괴한 일이 일어나니, 대들보 같은 용덕(황제의 덕)이 어린 황제에 올라탄다.

禁宮闊大任橫走, 長大金龍太平時,

넓디넓은 금궁에서 멋대로 내달리더니, 성장한 금룡이 태평한 시대를 이루리라.

老揀金精尤壯旺, 相傳昆玉繼龍堂。

늙어 노련해질수록 금정(통치력)이 더욱 왕성해지고, 곤옥(훌륭한 후계자)을 전하여 보위를 잇게 하리라.”

이 단락은 영종이 포로가 된 일과 복벽하는 일을 예언하였다.

그렇다면 역사의 진실은 어떠했는가?

1439년(정통 4년), 몽골 잔여 세력의 수령인 토곤(脫歡)이 죽고, 아들 에센이 태사(太師)의 지위를 이어받아 스스로 회왕(淮王)이라 칭했다. 그는 북으로 키르기스를 복종시키고 서쪽으로 중앙 아시아 여러 나라를 정벌하였으며, 서남쪽으로 하미를 취해 서역의 핵심 도로를 통제하고, 사주(沙州), 한동(罕東), 적근(赤斤) 몽골 3위(衛)와 인척을 맺어 ‘감숙행성(甘肅行省)’을 설치하고 관작으로 기미(羈靡)하여 명조 서북 병풍을 깨뜨렸다. 동쪽으로는 올량하(兀良哈) 3위를 공격하고 여진(女真) 제부를 석권하며 조선을 압박해, 여러 차례 명의 요동(遼東), 계주(薊州), 선부(宣府), 대동(大同) 각 변진(邊鎮)을 침입해 소란을 피우며 세력이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에센은 ‘대원(大元)의 일통천하를 추구한다’는 꿈을 품고 중원으로 확장하고자 힘썼다.

1448년(정통 13년), 에센이 병력을 4로(路)로 나누어 명조를 공격했다. 1449년 7월, 에센이 스스로 한 로(路)을 이끌고 대동을 공격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환관 왕진이 전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영종을 협박해 창졸간에 친정하게 했다. 8월 초, 영종이 50만 대군을 이끌고 막 대동에 이르렀을 때 왕진의 각 로 군사가 잇따라 패배하자 급히 퇴군을 결정하고 회군하여 토목보(지금의 하북성 회래현懷來縣)에 이르렀는데, 에센에게 추격당하여 명군이 사상자 과반에 이르고 영종은 포로가 되었다. 역사에서는 이를 ‘토목지변’이라 부른다.

명군이 패전했다는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조정 전체가 크게 놀라고 문무백관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어떤 이는 심지어 수도를 옮겨 남쪽으로 도망치자고 주장하였다. 이때 항전을 주장하던 대신 우겸(于謙)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니, 황태후가 그를 병부상서(兵部尚書)로 임명하여 북경 방어를 담당하게 했다.

우겸은 “사직이 무겁고 군주는 가볍다(社稷爲重,君爲輕)”는 구호를 제창해, 9월에 영종의 이복 동생인 주기옥(朱祁鈺)을 보좌해 보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경제(景帝)이며 연호는 경태(景泰)이다. 이는 에센이 영종을 협박 도구로 삼으려던 음모를 무산시켰다. 10월, 에센이 경사(京師, 수도)에 바짝 접근하자 우겸이 군민을 이끌고 저항해 오이라트군을 대패시키고 1만 여 명을 죽였으며 장령(將領) 수십 명을 사로잡고 약탈당했던 대량의 백성과 가축을 되찾았다.

이듬해 봄과 여름, 에센이 다시 명을 잇따라 공격하였으나 모두 실패에 부딪혔다. 이때 오이라트 내부의 토크토하 부카 칸(脫脫不花汗) 등이 에센의 강경책에 불만을 품고 명 조정과 화친을 논하며 영종을 돌려보내자고 주장하였다. 8월, 영종이 석방되어 경사로 돌아와 황성 남궁(南宮)에 거주하며 태상황(太上皇)이라 칭했다.

에센은 명조 공격에 실패한 후 세력이 점점 쇠퇴했다. 1454년(경태 5년), 오이라트에 내분이 일어났다. 이듬해 에센이 살해되고 몽골 각 부는 분열 상태에 빠졌다. 명조 북부 변경의 위협은 잠시 완화될 수 있었다.

1457년 정월, 환관 석형 등의 도움 아래 영종은 경제의 병이 위중한 틈을 타 다시 정변을 일으키고 다시 제위에 올랐다. 역사에서는 이를 ‘남궁복벽(南宮復辟)’이라 부른다. 영종이 복위한 후 우겸은 살해당했다. 영종은 다시 황제가 된 후 아무런 선정(善政)이 없었다.

1464년, 영종이 죽고 아들 헌종(憲宗)이 즉위하니 연호는 성화(成化)이다. 헌종은 재위 기간 환관 왕직(汪直)을 총애하고 신뢰했다. 헌종이 죽은 후 효종(孝宗)이 즉위하니 연호는 홍치(弘治 1487~1505) 정치가 그나마 청명(淸明)했다. 효종이 죽고 아들인 무종(武宗) 주후조(朱厚照)가 즉위하니 연호는 정덕(正德)이었다. 이 몇몇 황제들은 자주 내궁에 깊이 거하며 조정 정사를 돌보지 않고 대신들과 국사를 상의하는 일이 매우 적었다. 그리하여 조정 정사는 기본적으로 환관이 조종했고 환관의 전횡과 창·위가 횡행할 조건을 제공했다. 전후로 환관 두목 왕진, 왕직, 유근(劉瑾) 등이 전정(專政)하는 현상이 나타나 천하 사람이 “오직 왕직을 무서워할 줄만 알고 폐하를 무서워할 줄은 모른다”는 괴이한 일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정치가 날로 부패해지고 토지 겸병이 심각해지자 농민의 생활이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무종은 후사가 없어 사망 후 사촌 동생인 주후총(朱厚熜)이 보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세종(世宗)이며 연호는 가정(嘉靖 1521~1567)이다. 세종이 등극한 후 생부 흥헌왕(興獻王) 주우원(朱祐杬)을 황제로 존숭하고자 했다. 수보 양정화(楊廷和) 등은 예법상 마땅히 효종을 황고(皇考 돌아가신 황제 부친)로 삼아야 하고 생부는 다만 황숙고(皇叔考)로 삼아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중·하급 관리였던 장총(張璁), 계악(桂萼), 방헌부(方獻夫) 등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세종의 뜻에 영합해 흥헌왕을 황제로 존숭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논박했다. 이것이 바로 ‘대례의(大禮議)’의 다툼이다. 그 결과 양정화는 괁직에서 쫓겨나고 그를 따르던 관리 180여 명이 곤장을 맞았으며 134명이 투옥되었다. 장총이 수보가 되어 황제의 총애을 믿고 발호(跋扈)하며 조정 신하들을 멋대로 거느렸다.

얼마 후 하언(夏言)이 입각해 수보가 되었다. 이후 엄숭(嚴嵩)이 하언을 공격해 무너뜨리고 들어와 수보가 되었다. 엄숭이 정권을 잡고 ‘사인(私人, 사사로운 사람)을 널리 끌어들여 요지(要地를 차지하게’ 했다. 아들 엄세번(嚴世蕃)은 공부좌시랑(工部左侍郎)에 임명되었는데, 황제의 속내를 잘 추측하였기에 엄숭을 대신해 표의하니 경사에 “대승상, 소승상”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가정 말년, 엄숭이 총애를 잃자 어사(御史) 추응룡(鄒應龍), 임윤(林潤)이 잇따라 엄세번을 탄핵했고 엄세번은 죽임을 당하고 엄숭 역시 쫓겨났다. 서계(徐階)가 이어서 수보가 되었다.

세종 재위 기간에는 비록 환관의 전권은 없었으나 세종이 도(道)를 배워 신선이 되는 것에 취미를 붙여 마찬가지로 조정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므로 20년에 달하는 엄숭의 전권 시기가 나타났다. 관직 기강이 해이해지고 부패했다. 그리고 이때 왜구(倭寇)가 크게 일어나 연해 7개 성 가운데 왜구의 침입을 받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었다. 이 시기 뜻밖에 역사에 이름을 남긴 청관(清官) 해서(海瑞)와 왜구를 격퇴한 영웅 척계광(戚繼光)이 등장했다.

일대의 청관–해서

해서(1514년~1587년)는 자가 여현(汝賢) 또는 국개(國開)이며 별호(別號)는 강봉(剛峰)으로 세상에서는 강봉선생이라 불렸다. 경산(瓊山, 지금의 해남) 사람이며 회족(回族)이다. 해서는 4세에 고아가 되어 집안 형편이 아주 가난했다. 어머니 사씨(謝氏)가 지조와 절개에 뜻을 세우고 엄하게 가르치고 훈육했다. 가정 28년(1549년) 거인(舉人)에 합격하고 37년에 처음 벼슬길에 들어왔다.

[역주: 중국 명청대에는 진사 급제를 하지 못해도 지방직 임용은 가능했다 ]

一代清官–海瑞

해서는 일생동안 강직해서 굽히지 않고 법 집행이 산과 같았다. 그는 민정을 직접 겪고 폐정을 혁파했으며 적극적으로 탐오와 사치에 반대해다. 선물 보내는 것을 금지하고 탐관을 징벌하였으며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자 적체되고 억울한 사건을 심리하여 많은 억울한 옥사들을 깨끗이 씻게 했다.

1566년, 해서가 경성에서 관직에 있을 때 가정 황제가 도교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 것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황제가 대노해 사람을 보내 해서를 체포하여 참형(斬刑)에 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해서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이미 관 등을 준비하여 황제가 죽음을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이 긴급한 상황에서 재상인 서계가 거듭 해서를 변호하고 나서자 겨우 한 차례 죽음을 모면했다.

해서가 남경에 가 관직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계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 노후를 보내게 되었다. 어느 날 해서는 많은 백성들의 고소장을 받았는데 서계의 아들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서계의 아들은 현지의 유명한 토호 악당으로 백성들의 많은 토지를 강점하여 많은 이들이 몹시 미워했다.

해서가 정황을 조사하여 밝혀낸 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줄곧 존중하던 은인이 도리어 아들이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을 지지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이에 스스로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엄숙하게 처리하자니 은인을 난처하게 만들고, 방임해서 관여하지 않자니 국법을 위배하는 것이었다.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역시 사사로운 은혜로 국법을 폐지할 수는 없다고 여겨 법대로 처리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의연히 직접 서계의 집을 찾아가 서계가 이 일을 정확하게 대하도록 설득하였다.

서계는 해서가 뜻밖에 자신의 아들을 조사하여 처단하러 온 것을 보고 얼굴빛이 문득 변하며 마음속으로 매우 기분 나빠했다. 그러나 스스로 이치가 궁한 것을 알고 그저 참으며 “내 아들이 한 일을 나는 전혀 몰랐네, 과거 자네를 구해주었던 면목을 봐서라도 이번만 한번 용서해주시게!”라고 했다.

해서는 서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엄숙하게 말했다.

“재상 어르신께서 당년에 제 목숨을 구해주신 것은 제가 관리가 되어 공정하여 국가와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제가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는 것 역시 어르신의 구명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서의 이런 말에 대해 서계는 들으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크게 화를 냈다. 그러나 해서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고 마침내 공정하게 서계 아들의 죄를 다스렸으며 강점한 농지를 반환하게 했다.

해서는 관리가 되어 청렴했을 뿐만 아니라 생활 역시 매우 검소해 청고(清苦)한 행실이 조야에서 으뜸이었다. 만력 15년(1587년) 10월, 74세의 해서가 늙고 병든 몸으로 관사(官舍)에서 죽은 후 죽어서 오직 갈위(葛幃, 칡으로 만든 텐트)와 낡은 옷만 남았을 뿐이라 동료들이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기부해서야 겨우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

동향 사람 소민회(蘇民懷)가 그 유물을 검점(檢點, 점검)해보니 오직 대바구니 하나가 있을 뿐이었고 그 안에는 봉급으로 받은 봉금(俸金) 8량과 낡은 옷 몇 벌만 있을 뿐이었다. 때문에 해서는 백성들이 존경을 받았고 발상하는 날 상여를 배웅하는 이들로 강변이 가득했고 술을 땅에 붓고 우는 자가 백 리에 끊이지 않았으며 백성들에게 ‘해청천(海青天 역주: 해씨 성을 가진 포청천이란 의미. 포청천은 북송 관리로 청백리의 대명사)’이라 불렸다. 당시 사람 왕세정(王世貞)은 9자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돈을 사랑하지 않으며, 당을 세우지 않았다(不怕死,不愛錢,不立黨)”고 평가했다.(명대 주휘의 《금릉쇄사金陵瑣事》권1)

명대 소주 사람 주량(朱良)은 일찍이 해서를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

“역린을 건드려 직간함은 비간의 마음을 능가하고,
고생스러운 절개는 또 백이숙제의 청렴함과 같도다.
용은 해천으로 숨어 구름이 만 리요,
학은 화표로 돌아오니 달이 삼경이라.
쓸쓸히 관 외에는 남은 물건이 없고,
썰렁한 영전에는 풀뿌리가 있도다.
옆 사람에게 말해도 모두 믿지 않으니,
산인이 친히 보매 기울어진 것과 같도다.”

披鱗直奪比幹心,苦節還同孤竹清。
龍隱海天雲萬裏,鶴歸華表月三更。
蕭條棺外無餘物,冷落靈前有草根。
說與旁人渾不信,山人親見類如傾。

[청대 조길사(趙吉士)의 《기원기소기(寄園寄所寄)》권2 《좌우편座右編》에서]

이 시는 일반적인 송시(頌詩)와 달라 주량이 직접 해서의 이처럼 간소한 행낭 및 사대부들이 돈을 모아 해서를 위해 관을 사준 광경을 목격하고 감개무량하여 후세 사람들이 이런 일이 있음을 믿지 않을까 우려해 특별히 이 해서를 기리는 이 시를 써서 산천으로 증거를 삼아 해서의 양수청풍(兩袖清風, 두 소매에 맑은 바람만 있는 청백리)이 장차 인간 세상에 머물도록 기약한 것이다. 사실상 해서는 생전에 일반인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검소했다. 그의 사장(私章, 개인 도장)은 흙으로 깎아 만들었고 여름에는 한 장의 파석(破席, 낡은 자리) 위에서 부인의 헌 치마를 덮고 잤다.

해서는 후세에 관리가 된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왜구를 격퇴한 영웅 척계광

원말 명초에 일본은 남북조 분열 시기에 처해 있어 일부 봉건 영주, 몰락한 무사, 떠돌이 무사와 밀수 상인들이 자주 중국 연해에서 무력 약탈과 소요를 일으켰다. 역사에서는 이를 왜구(倭寇)라 부른다. 명초에는 국력이 강성하고 해안 방어를 중시했기 때문에 왜구가 큰 근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통(正統 1436~1449) 이후 정치의 부패와 더불어 해안 방어가 느슨해져 왜구가 성행했다. 1439년(정통 4년)에 왜구가 절강성 태주(台州)의 도저촌(桃渚村)을 침입해 인민을 도륙하고 멋대로 방화햐 “쌓인 유골이 언덕과 같고 흐르는 피가 개울을 이루었다.”

가정(嘉靖 1521~1567년) 시기에 이르러 동남 연해 일대의 관료, 부호, 지주가 왜구와 결탁해 한 지방에 해를 끼쳤다. 이때 왜구를 격퇴한 항왜(抗倭) 영웅 척계광(戚繼光)이 나왔다.

척계광은 산동성 모평(牟平) 사람으로 일찍이 “제후에 봉해지는 것은 내 뜻이 아니요, 단지 바다가 평정되기를 바라노라”는 구절로 왜구를 소멸하고자 하는 자신의 지향을 표현했다. 왜구를 소멸하기 위해 그는 특별히 절강 의오(義烏)의 광부와 농민을 모집해 ‘척가군(戚家軍)’을 만들었다. 이 부대는 엄격한 훈련을 거쳐 용맹하고 싸움을 잘하며 규율이 엄해 항왜 투쟁의 주력이 되었다.

1561년, 왜구 수천 명이 절강성 태주 일대를 불지르고 약탈하자 많은 백성들의 협조와 지원 아래 척계광이 정예 군대를 이끌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절동(浙東 절강 동부)의 왜구를 소탕했다. 이어 복건성의 왜구가 다시 기승을 부렸다. 척계광은 다시 명을 받아 척가군을 이끌고 복건성으로 들어가 왜구를 초토화(剿滅)하니 연전연승하였다. 얼마 후 척계광은 또 다른 항왜 명장 유대유(俞大猷)와 함께 다시 복건에 있던 왜구를 평정했다.

척계광은 후세 사람들이 존경하고 우러르는 영웅이 되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5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