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년—280년)
심연(心緣)
【정견망】
삼국이란 이 눈부신 큰 연극 무대 아래에서는 또한 풍부한 특색을 지닌 삼국 문화가 잉태되고 있었다.
삼국 시기 문화
* 문학
이 시기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건안문학(建安文學)’이다. 건안은 동한 말 한 헌제(獻帝)의 연호이다. 이는 주로 조씨(曹氏) 부자를 영수로 하는 건안 문인 단체를 가리키는데, 조조, 조비(曹丕), 조예(曹叡), 조식(曹植) 및 당시 유명한 시인들인 ‘건안칠자(建安七子)’가 있는데 즉, 왕찬(王粲), 진림(陳琳), 서간(徐幹), 유정(劉楨), 응창(應瑒), 공융(孔融), 완우(阮瑀)를 포함한다. 이들은 대개 건안 연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 시기를 건안문학이라 일컫는다.
건안문학이 흥기한 원인을 보면 첫째, 한말(漢末)의 전란으로 백성들이 질고를 겪었고 시인 자신도 전란의 고통을 겪었기에 문학 작품을 빌려 사회의 실황과 개인의 조우(遭遇)를 반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문심조룡(文心雕龍)·시서(時序)》편에서는 건안문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 시대의 문장을 살펴보면 대개 강개(慷慨)함을 좋아하니, 이는 진실로 세상에 난리와 이별이 쌓이고 기풍이 쇠하여 풍속에 원망이 가득 찬 데서 기인한 것이다. 아울러 문인들의 뜻이 깊고 필력이 강인하므로, 그 문장의 뼈대가 굳세고 기개가 넘치는 것이다.”(觀其時文, 雅好慷慨, 良由世積亂離, 風衰俗怨, 并志深而筆長, 故梗概而多氣也).”
둘째는 통치자 신분이었던 조조의 제창 덕분이다. 조조는 비록 대권을 장악했으나 문재(文才)가 아주 뛰어났고 또 문사들을 아꼈으므로, 조조 부자를 중심으로 하는 문학 단체와 ‘업하문풍(鄴下文風)’을 형성했다.
셋째는 건안 시대 사인(士人)들의 사상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문학 관념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비의 유명한 저작인 《전론(典論)·논문(論文)》에서는 글이란 “나라를 다스리는 대업이요, 썩지 않는 성대한 (經國之大業, 不朽之盛事)”라고 명확히 말하며 문학이 지닌 불후의 가치를 지적했다. 조비는 또한 동시에 이론상으로 각종 문체(文體)의 요구와 특징, 작품의 풍격과 작가의 기질 및 재성(才性)의 관계 등 문제를 연구했으니, 이는 중국 문학사상 최초로 출현한 문학 이론이다. 게다가 건안의 문인들은 당대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서도 자주 평론을 제기했다.
《전론·논문》에 실린 건안칠자에 대한 평론이나 조비의 《여오질서(與吳質書)》, 조식의 《여양덕조서(與楊德祖書)》 등은 모두 문학을 토론한 유명한 서신으로, 이 시기 문학 비평이란 기풍이 매우 흥성했음을 여실히 증명한다. 건안문학의 발전은 당시의 문학 이론 및 비평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넷째는 한 악부(樂府) 민가(民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 악부는 “슬픔과 즐거움에 감응하여 일에 따라 발생한다(感於哀樂, 緣事而發)”고 했는데, 사회 민생을 대량으로 반영한 신흥 오언체(五言體)가 한말에 출현하자 건안 시인들이 이를 계승하여 대량으로 창작할 수 있었다.
건안문학의 내용은 주로 다음을 포함한다.
1. 시대를 묘사해 전란 및 현실에서 민생의 어려움을 반영하고 백성들에게 깊은 동정을 기탁했다. 예를 들어 조조의 《호리행(蒿里行)》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갑옷에 이와 서캐가 생기고
만백성이 이로써 사망했네.
백골이 들판에 드러나 있고
천 리에 닭 울음소리조차 없구나.
살아남은 백성은 백에 하나도 없으니
이를 생각하면 창자가 끊어지는구나”
鎧甲生蟣虱, 萬姓以死亡.
白骨露於野, 千里無雞鳴.
生民百遺一, 念之斷人腸.
왕찬의 《칠애시(七哀詩)》에서는 “문을 나서도 보이는 것 없고 백골만 평원을 덮었네. 길가에는 굶주린 여인이 자식을 풀숲 사이에 버리는구나(出門無所見, 白骨蔽平原. 路有饑婦人, 抱子棄草間).”라고 하여 모두 생령이 도탄에 빠진 고통스런 상황을 써내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이 밖에 채염(蔡琰)의 《비분시(悲憤詩)》, 서간의 《실사(室思)》 6수 등도 모두 한말(漢末)의 전란이 가져온 고통을 반영했다.
2. 공업(功業)을 세우려는 이상을 반영했다. 천하가 혼란하니 조씨 부자를 대표로 하는 작품 중에는 공업을 세워 천하를 안정시키려는 웅대한 뜻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조조의 《단가행(短歌行)》 결구에서는 “산은 높아짐을 싫어하지 않고 바다는 깊어짐을 싫어하지 않네. 주공은 입에 문 음식을 뱉어가며 인재를 구했으니 천하가 마음을 귀순하리라(山不厭高, 海不厭深, 周公吐哺, 天下歸心).”라 하여 자신이 주공(周公)처럼 인재를 두루 초대해 나라를 위해 힘쓰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조식은 《여양덕조서》에서 자신의 주요 바람이 “영원한 공업을 세워 명성을 쇠와 돌에 새겨 남김(建永世之業, 流金石之功)”이라고 명확히 말했다.
3. 인생을 개탄하며 시인의 사상과 개성을 반영하고 가슴속 분개를 표현했다. 예컨대 채염(채문희)은 흉노 땅을 떠돌며 10여 년간 고통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중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기에, 《비분시》에서 “유리되어 비천해졌으니 늘 다시 버려질까 두렵구나. 인생은 그 시간이 얼마인가 늘 근심을 품고 한평생을 보내네(流離成鄙賤, 常恐複捐棄, 人生幾何時, 懷憂終年歲).”라 하여 유랑 이후 정신이 장기간 평정을 회복하지 못하고 내내 우환을 품게 된 정경을 썼다.
유정은 《실제시(失題詩)》에서 탄식한다.
“천지는 끝이 없건만 백성의 삶은 참으로 촉박하구나.
백 년의 수명을 채운다 한들 누가 이 명록에 응하리오.
오르내리며 순식간에 사라지니 형체는 바람 속의 촛불 같네”
天地無期竟, 民生甚局促.
爲稱百年壽, 誰能應此錄.
低昂倏忽去, 炯若風中燭.
이 작품은 인생무상과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 같음에 대해 극히 큰 고뇌를 표현했다. 이러한 고통을 벗어나고자 많은 건안 작가들은 흔히 술을 마시거나 선인(仙人)을 구하는 쪽으로 돌아서서 정신적 위안을 찾았으므로, 당시에 연유시(宴遊詩)와 유선시(遊仙詩)도 많이 출현했다.
조위 시기에 또 일곱 명의 유명 인사가 나타났으니 바로 혜강(嵇康), 완적(阮籍), 산도(山濤), 향수(向秀), 유령(劉伶), 완함(阮咸), 왕융(王戎)이다. 이들은 흔히 산양(山陽 지금의 하남성 수무현) 대나무 숲 아래에 모여 마음껏 술을 마시고 호탕하게 즐겼으므로 세상에서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 불렀다. 문학에서는 이중에서도 혜강과 완적이 대표적이다.
예컨대 혜강의 《여산거원절교서(與山巨源絕交書)》는 노장(老莊)이 자연을 숭상하는 논점을 들어 자신이 출사(出仕)를 감당할 수 없음을 설명하고 사마씨(司馬氏)와 협력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태도를 공개적으로 표명해 성명(盛名)을 떨쳤다. 또한 완적의 《영회(詠懷)》시 8수는 비흥(比興)과 기탁(寄托) 등의 수법을 통해 최고 통치 집단의 악행을 은밀하게 폭로했다.
촉한의 문학은 제갈량(諸葛亮)이 대표적이며, 그의 《출사표(出師表)》와 《후출사표(後出師表)》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칭송받고 있다.
* 회화
삼국 이전의 회화는 주로 ‘설색지공(設色之工 칠쟁이)’들이 종사하는 직업으로 ‘백공지원(百工之苑)’에 속해 있었으며, 아직 예술의 전당에 진입하지 못했기에 비교적 완전한 회화 이론 및 성공적인 회화 작품을 낳지 못했다. 당시 일반인들은 회화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했을 뿐 그 예술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다 삼국 시대(및 그 후의 양진남북조)에 이르러 사회 현실의 영향을 받아 회화 속에 현실 제재의 내용이 더 많이 추가되었다. 이로 인해 회화는 설교(說教)에서 발전하여 현실 생활을 반영하게 되었고, 예술화를 향해 큰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정치, 군사, 문학 인물에 비하면 삼국 시기에 전문적으로 회화에 종사한 화가는 그리 많지 않았으며, 게다가 적지 않은 회화가 여전히 양한(兩漢) 회화 설교의 연속이었으니 조식의 《화찬서(畫贊序)》 같은 것이 그러하다.
전해 내려오는 삼국 시기 회화로는 주로 위의 《가규상(賈逵像)》과 《창자화상(倉慈畫像)》, 촉한의 《초주도(譙周圖)》, 오의 《소주화상(邵疇畫像)》, 《황개화상(黃蓋畫像)》 및 《장온중매화상(張溫中妹畫像)》이 있다.
삼국 시절 위나라의 화가들은 대개 정무에 종사하는 여가에 그림을 그렸다. 대표적으로 조모(曹髦), 양수(楊修), 서막(徐邈), 환범(桓範)이 있다.
촉나라의 화가는 제갈량이 대표적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가 남이(南夷)를 위해 그림을 그릴 때 먼저 천지와 일월, 군신과 성부(城府)를 그리고 다음으로 신룡(神龍) 및 우마타양(牛馬駝羊)[소, 말, 낙타, 양]을 그렸으며, 또 부족의 수령과 관리가 말을 타고 일산을 두른 채 멀리 편안히 행차하는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아울러 남이 사람들이 소를 끌고 술을 짊어진 채 금은재보를 손에 쥐고 촉나라 관리를 찾아오면, 촉나라 관리가 이러한 물품들을 다시 남이 사람 등에게 하사하는 내용을 그렸다. 이 밖에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장비(張飛)가 미인도(美人圖) 그리기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제갈첨(諸葛瞻)과 이의기(李意其)가 있었다.
위·촉 두 나라에 비교하면 오나라의 회화는 어느 정도 성취를 거두었는데, 비록 회화에 종사한 이가 오왕의 누이인 조부인(趙夫人) 및 조불흥(曹不興) 두 사람뿐이었으나 오히려 비교적 뛰어난 성취를 얻었다.
오왕의 부인인 조부인은 오나라 승상 조원(趙達)의 여동생으로, 서법(書法)과 회화에 능하여 성취가 자못 높았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손권이 일찍이 위와 촉이 아직 평정되지 않음을 슬퍼하며 사람을 시켜 각국의 산천지형도(山川地形圖)를 그리게 하고 싶어 하자, 조부인이 곧 자신이 그린 강호(江湖), 구주, 산악(山嶽) 지형도를 손권에게 바쳤고 나아가 바느질 위에 오악과 열국의 지형도를 수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조부인의 회화는 실로 후세 산수화의 효시(首)를 열었으며 당시에도 영향이 매우 커서 사람들에게 ‘침절(針絕 최고의 바느질 솜씨)’이라 찬사 받았다.
조불흥은 회화에 능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손권을 위해 병풍을 그릴 때 붓을 잘못 떨어뜨려 먹물이 묻자, 그 자리에 즉석에서 파리(蠅) 한 마리를 그려 넣었다고 한다. 손권은 진짜 파리가 그림 위에 날아든 줄 알고 손을 들어 이를 쫓으려 했다. 손권 적오(赤烏) 원년(228년) 겨울 10월, 손권이 청계(青溪)를 유람하다 적룡(赤龍)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물결을 헤치며 행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에 조불흥에게 그 형상을 그리게 했다. 그림이 성공적으로 완수되어 손권의 찬사를 받았으며, 나중에 남조 송(宋)의 문제(文帝) 시절에 이르기까지 이 적룡도를 사용해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당시 대신 사혁(謝赫)은 비각(秘閣) 안에서 조불흥이 그린 용의 머리를 보고는 스스로 진짜 용이 강림한 것 같다고 여겼다. 이로써 그 화작(畫作)의 묘함을 볼 수 있다.
조불흥이 가장 잘 그린 것은 인물화였는데, 그는 일찍이 50척의 비단을 하나로 이어 그 위에 인물 형상을 그린 적이 있는데 마음은 밝고 손은 빨라 붓질 한번 만에 완성했다. 인물의 머리, 얼굴, 손, 발, 가슴과 배, 어깨와 등 중 한 모금의 실오라기만큼도 실수가 없었다. 조불흥은 또한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저명한 불상(佛像) 화가다.
불교는 동한 시기 중국에 들어왔으나 주로 중원 지역에 머물렀고, 삼국 시기에 이르러서야 강남으로 전파되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강승회(康僧會)가 멀리 오나라로 유람 오자 손권이 그를 위해 건초사(建初寺)를 짓고 불상을 설치해 전도하게 했다. 조불흥이 서방의 불상을 보고는 이에 의거해 그림을 그리니, 이로부터 불상이 천하에 널리 전해졌다. 이는 중국 불상 회화 최초의 작품이며 조불흥 역시 중국 최초의 불상 화가가 되었다. 조불흥 이후 장강 중하류 지역에 화가들이 점차 많아졌다.
* 음악
음악은 삼국시대에 이르러 이미 극도로 원숙한 정도까지 발달했다. 그중 혜강, 완적, 채염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은 중국 음악 발전사상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 혜강과 고금곡 《광릉산(廣陵散)》
혜강은 문학이나 사상적으로도 중요한 성취를 얻은 외에 음악 방면에서 후인들에게 소중한 자산을 남겨 주었다. 혜강은 가히 위진(魏晉) 시기의 기재(奇才)라 칭할 만하여 피리(笛)에도 정통했고 고금(琴)에 절묘했으며 음률에 능했다.
혜강이 창작한 《장청(長清)》, 《단청(短清)》, 《장측(長側)》, 《단측(短側)》 4수의 고금곡은 ‘혜씨사롱(嵇氏四弄)’이라 불렸고, 채옹(蔡邕)이 창작한 ‘채씨오롱(蔡氏五弄)’과 합쳐 ‘구롱(九弄)’이라 칭했으니 중국 고대의 저명한 고금연주곡 모음이다. 수 양제(煬帝)는 일찍이 《구롱》을 연주하는 것을 선비를 등용하는 조건 중 하나로 삼았으니 그 영향의 거대함과 성취의 높음을 족히 알 수 있다.
사마씨의 암흑 통치에 직면해 혜강은 분연히 불평했다. 저항을 표시하기 위해 그는 자주 산림으로 들어가 죽림칠현과 더불어 서로 유람하곤 했다.
《광릉산》은 고대의 대형 고금곡으로 최소한 한대(漢代)에 이미 존재했다. 그 내용은 일반적인 견해로 볼 때 그것을 《섭정자한왕(聶政刺韓王)–섭정이 한왕을 찌르다》 금곡과 연계시킨다. 《섭정자한왕》은 주로 전국 시대의 검을 만드는 장인의 아들 섭정(聶政)이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해 한나라 왕을 찔러 죽이고 나서 스스로 자결하는 비장한 이야기를 묘사한 것이다.
혜강이 연주한 《광릉산》은 그의 가공을 거쳐 완성한 곡조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아량(雅量)》에 따르면, 혜중산(嵇中散 혜강의 관직이 중산대부였음)이 동시(東市)의 형장에 임해서도 신기(神氣)가 변하지 않았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고금을 달라고 한 후 이를 연주하니 바로 《광릉》을 연주했다. 곡이 끝나자 “원효니(袁孝尼)가 일찍이 이 산(散 곡조)을 배우기를 청했으나 내가 인색하게 고집하며 주지 않았으니, 《광릉산》이 이제 끊어지겠구나!”라고 탄식했다. 혜강이 죽음에 앞서 《광릉산》 연주를 요구했기 때문에 비로소 이 고전 금곡(琴曲)의 명성이 크게 떨치게 되었으니, 《광릉산》은 어떤 면에서 혜강으로 인해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광릉산》 악보는 전곡이 총 45개 악단(樂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개지(開指), 소서(小序), 대서(大序), 정성(正聲), 난성(亂聲), 후서(後序)의 6개 부분으로 나뉜다. 정성 이전에는 주로 섭정의 불행한 운명에 대한 동정을 표현했고, 정성 이후에는 섭정의 장렬한 사적에 대한 노래와 찬양을 표현했다. 정성은 악곡의 주체 부분으로, 섭정이 원한에서부터 분개에 이르는 감정의 발전 과정을 두드러지게 표현했으며 그가 강폭(强暴)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을지언정 굽히지 않는 복수의 의지를 깊이 있게 그려냈다.
정성(正聲)의 주선율은 대개 악단(樂段)이 시작되는 곳에 두어 그것이 주도적인 체용(體用)을 부각시켰다. 난성(亂聲)의 주선율은 대개 악단이 끝나는 곳에 있어, 여러 가지로 변화된 곡조를 하나의 공동된 음조 안으로 귀결시키니 단락을 표지하고 전체 곡을 통일하는 작용을 한다.
《광릉산》의 선율은 격앙되고 강개하며, 현존하는 고금곡 중 유일하게 창과 방패가 부딪치는 살벌한 전투 분위기를 지닌 악곡으로 압박당하는 이들이 폭군에 저항하는 정신을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혜강은 《광릉산》을 탄주한 것으로 이름이 났을 뿐만 아니라 음악 이론상으로도 독창적인 공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금부(琴賦)》와 《성무애락론(聲無哀樂論)》이다. 《금부》는 주로 고금과 음악에 대한 혜강의 이해를 표현했으며, 동시에 혜강이 유가의 전통 사상과 서로 어긋나는 견해를 지녔음을 반영했다.
* 채염과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
채염은 자가 문희(文姬)로, 동한 말기의 저명한 문학가, 음악가, 서법가인 채옹(蔡邕)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좋은 가정 교육을 받아 “박학하고 재능이 있어 변론을 잘했으며 또 음률에 절묘했다.” 《채염별전(蔡琰別傳)》의 기재에 따르면, “문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달리 빼어남이 있었는데, 여섯살 때 채옹이 밤에 거문고를 타다가 줄이 끊어지자 염이 가로되 ‘첫 번째 줄입니다’라고 했다. 채옹이 일부러 줄 하나를 더 끊고 물으니 염이 ‘네 번째 줄입니다’라고 했다.” 이로써 그녀가 어릴 때부터 이미 매우 뛰어난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를 지니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일생은 극히 비참했다. 최초에는 죄 지은 아버지를 따라 전전하며 유랑하다가 훗날 위중도(衛仲道)에게 시집갔으나 머지않아 남편이 죽었다. 채염은 자식도 없이 친정으로 돌아왔다. 당시 전란이 빈번했는데 대략 헌제 흥평(興平) 2년(195년) 무렵에 동탁(董卓)의 부하에게 포로로 잡혀 남흉노(南匈奴)로 끌려가 좌현왕(左賢王)에게 시집갔고 그곳에서 12년 동안 머물며 아들 둘을 낳았다. 나중에 조조가 북방을 통일한 후 나라 정세가 상대적으로 안정되자 사절을 파견해 금벽(金璧)을 주고 그녀를 데려왔다. 그 후 다시 동사(董祀)에게 시집보냈다. 이렇게 극도로 고통스런 생활은 그녀로 하여금 인간 세상의 마난을 다 겪게 만들었으니, 그녀는 자신의 이러한 특수한 감수를 장편 시작(詩作)인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으로 써냈다.
《호가십팔박》에 근거해 창작된 동명의 고금곡은 중국 음악사상 한 편의 뛰어난 고전 명곡이다. 이 작품은 매우 감동적인 악조(樂調)로 채염 일생의 비참한 처지를 하소연했으며 전란이 백성들에게 가져다준 심각한 재난을 반영했고, 주인공이 조국과 고향에 대해 지닌 깊은 그리움 및 골육이 이별하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표현했다. 이 곡조는 당송(唐宋) 두 대(代)에 걸쳐 크게 유행했다.
《호가십팔박》은 채염이 호가(胡笳 호족의 피리) 18박의 음조를 고금(古琴)에 녹여내 창작한 신선한 풍격의 음악이다. 실제로 그녀는 남북의 풍격을 하나로 녹여해 창작해 낸 것으로, 일정 정도 남북 음악 문화의 교류를 체현했다.
‘박(拍)’은 음악의 단락으로 18박은 즉 18단을 말한다. 제1박은 전곡의 인자(引子 도입부)로 작자가 난세를 만나 타향을 떠도는 비참한 경력을 개괄했다. 제1박의 정서적 기복이 매우 커서 각 단의 음악이 계속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정립해 준다. 제2박에는 장식성 변화음이 출현하여 감정 표현을 상당히 강렬하게 만든다. 제10박에 이르기까지 한 걸음 한 걸음 고향을 떠난 슬픈 정서를 심화시켜 악곡의 제1부분을 구성한다.
제11, 12박은 전곡의 전환점이 되는데, 특히 제12박은 유일하게 음조가 즐겁과 경쾌하며 명랑한 단락으로 민족의 즐거움과 귀국의 기쁨을 표현했다. 음악이 고음에서 시작해 리듬이 비교적 넓어지며 시원하게 펼쳐지는 하나의 악구(樂句)를 구성하니, 이 단락의 선율 음(音) 구역 비교적 높아 이상하리만치 격동된 정서를 표현했다. 제13박부터 제17박까지는 악곡의 제2부분으로 여전히 슬픈 정서를 펼쳐냄을 위주로 삼았으며 주로 어린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제18박은 전곡의 미성(尾聲 종지부)으로 격정 속에서 전곡을 마무리한다.
* 완적과 《주광(酒狂)》
죽림칠현의 일원인 완적은 문학상으로 중요한 성취를 취득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상으로도 당대에 독보적이었다.
그가 창작한 것으로 전해지는 《주광(酒狂)》은, 완적이 사마씨가 대거 살육을 자행하고 다른 견해를 지닌 인사들을 배척하던 암흑 통치 아래에서 두려워하면서 근심하며, 분노하면서도 피하고자 했던 진실한 심태를 아주 생생하게 표현해 냈다.
《주광》은 《신기비보(神奇秘譜)》(1425년) 및 《풍선현품(風宣玄品)》(1539년), 《중수진전(重修真傳)》(1585년) 등 여러 종류의 고금 악보에 모두 실려 있다. 《주광》은 3박자의 리듬을 채택했는데 이는 고금 음악 중에서 보기 드문 것이다.
전곡은 5개 단락의 순환 변주를 통해 감정을 끊임없이 심화시키며, 주인공이 암흑의 현실에 대해 강렬한 불만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출로를 찾지 못하는 모순된 심리를 술 취한 자(醉酒者)의 형상을 빌려 매우 충분하게 표현했다. 악곡의 수법이 간결하면서도 형상이 풍부해 사상이 깊다. 이 또한 문인의 높은 문화적 수양이 음악 속에 반영된 것이다. 《주광》은 중국 고대 음악 중의 진품(珍品)이라 일컬어질 만하다.
완적은 음악 작품인 《주광》 외에도 음악 이론 저작인 《악론(樂論)》을 남겼다.
기타 저명한 음악가로는 완적의 아버지인 완우, 완적의 조카로 비파를 잘 탔던 완함(阮咸)이 있다. 당시의 고대 비파의 일종을 ‘완함’이라 부른 것은 그의 이름를 딴 것이라 한다. 완함의 아들로 고금을 잘 탔던 완첨(阮瞻)은 귀천을 불문하고 고금을 들으려 오기만 하면 모두에게 연주해 주었다고 한다. 그 외에 순욱(荀勖), 유습(謬襲), 도기(杜夔) 등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