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년—907년)
심연(心緣)
【정견망】
불법(佛法)이 전성기로 나아간 시대
불교는 당 태종 시기부터 전성기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표지는 불경의 번역과 불교 종파(宗派)의 형성이다. 이때 서쪽으로 길을 떠나 진경(真經)을 구해온 각자(覺者)가 나타났으니 바로 현장(玄奘)이다. 이 시기에 정토종, 천태종, 화엄종, 선종 등 불교 종파들이 구체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석굴(石窟) 예술 역시 더욱 크게 발전했다.
끝내 진경을 구한 대당(大唐)의 각자 — 현장
현장의 본명은 진위(陳褘, 또는 ‘禕’)로, 태어나면서부터 불전(佛典) 읽기를 즐겼으며 어려서부터 불법의 이치를 독실히 믿었다. 614년, 수 양제가 대리경(大理卿 대리시의 책임자) 정선과(鄭善果)에게 명을 내려 낙양에서 출가할 승려들을 심사하게 했다. 당시 겨우 열세 살이었던 진위가 기쁘게 달려갔으나, 정선과는 그가 나이가 어려 의지가 견고하지 못할까 염려해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진위는 구도와 출가를 평생의 목표로 삼았기에 서럽게 눈물을 흘리며 멈추지 않았다. 정선과가 그의 심지(心志)를 알아채고 예외적으로 나이 규정을 어기고 그의 출가를 허락하고, 법호를 ‘현장(玄奘)’이라 했다.
현장은 마음을 고요히 하고 불법을 수행했으며 이후 사해(四海)를 구름처럼 떠돌며 신주(神州 중국) 전역을 다니며 이름난 스승들을 찾아다녔다. 훗날 현장은 경전 속의 일부 장절(章節)을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달았는데, 알고 보니 경전의 번역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현장은 직접 천축(天竺)으로 건너가 불경의 원문을 구해 참된 진리를 탐구하기로 결심했다.
정관 3년(629년), 현장은 장안을 떠나 천축으로 향했다. 당 태종은 그를 위해 통관 문첩(文牒 일종의 비자에 해당)을 마련해주고 자금발(紫金缽)과 백마를 하사했으며, ‘어제(御弟, 황제의 아우)’로 봉하고 친히 배웅했다. 당시에는 이 여정이 얼마나 위험할지, 길은 멀고 방향을 잡기 힘든지를 가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나, 현장은 이미 생사를 도외시 했다. 그는 천신만고를 겪고 온갖 마난의 시험을 견디며, 여러 차례 식량과 물이 떨어지고 국경의 취조를 받는 위험 속에서도 험준한 산맥과 아득한 황야, 끝없는 사막을 건넜다. 나아가 그 죽음과도 같은 적막한 칠흑과 무궁한 고독을 참아내며, 3년의 시간을 들여 마침내 천축에 도달했다.
이어 5년 동안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를 익히고 대승불교의 모든 의리(義理)를 두루 융회하니, 그 깨달음의 신속함과 의지의 강인함은 이방인(異邦人)들에게도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이 불교 성지에서 50부의 경론에 통달한 사람은 겨우 열 명뿐이었는데, 현장이 바로 그중 한 명이었다. 그가 동토(東土) 대당에서 왔으며 인도 불학의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에 정통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당삼장(唐三藏)’이라 불렀다.
[역주: 삼장이란 고유명사가 아니라 경, 율, 논 세 가지 분야에 두루 통달한 승려를 가리킨다.]
정관 19년(645년), 현장은 수백 부의 산스크리트어 불경을 가지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온 도성이 크게 요동치고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쏟아져 나왔으며, 당 태종 역시 친히 성 밖까지 나와 그를 맞이했다. 이후 현장은 가져온 경전들을 일일이 한어(漢語)로 번역했으니, 19년 동안 심력을 다하여 당시의 수많은 미세한 오류들을 바로잡았고, 이로써 후인들이 정통 불법을 배울 수 있게 하였으니 중원에서는 이를 ‘대승불교(大乘佛敎)’라 불렀다. 664년, 현장이 장안에서 입적하니 향년 62세였다.
정관의 치 — 성당(盛唐)의 기상
위로는 천자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한마음으로 불법(佛法)을 독실히 믿었기에, 초당(初唐)의 국세는 놀라울 정도로 강대해졌다. 당 태종의 연호가 ‘정관(貞觀)’이었기에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정관의 치(貞觀之治)’라 부른다.
이 시기는 마치 밝은 달처럼 인류 역사의 밤하늘 전체를 밝게 비추었다. 정치는 청명(淸明)하고 사회는 안정되었으며, 기후가 순조로워 농업은 해마다 풍년을 이뤘다. 매번 명절이 될 때마다 군주와 신하, 백성이 함께 즐기는 축제가 열렸고, 백성들은 편안히 살며 즐겁게 생업에 종사하니 도둑이 사라지고 감옥은 늘 비어 있었다. 천하 대치(大治 세상이 크게 다스려져 태평스럽고 질서가 잡힌 상태)가 눈앞에 생생히 펼쳐진 것이다.
태평성세(太平盛世)의 중요한 표지 중 하나는 법이 간소하고 형벌이 가볍다는 점이다. 정관 4년(630년), 전국에서 사형에 처해진 죄수는 오직 29명뿐이었다. 632년, 전국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죄수는 총 390명이었는데, 그해 말 태종은 그들이 집에 돌아가 후사(後事)를 정리하도록 허락하고 이듬해 가을에 다시 돌아와 형을 받도록 했다(옛날에는 사형과 같은 형법은 가을 이후에 집행했다). 633년 9월, 390명 전원이 감옥으로 돌아왔으며 단 한 사람도 도망치지 않았다. 사회 질서가 안정되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았으니, 천하의 대치는 실로 “해와 달이 하늘을 밝히는 것과 같다”고 할만했다.
이 외에도 이 시기 문화, 경제, 농업, 수공업, 상업, 교통 등 각 방면은 이전의 모든 시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인류 사회는 이때 진정으로 상화(祥和)하고 예의 바르며 안정되고 풍족한 태평성세를 구가했다.
《신당서》에서는 “정관 4년에 이르러 쌀 한 되에 4~5전이었고, 집 바깥문을 잠그지 않은 지 수개월이었으며, 말과 소가 들판에 가득하고, 사람이 수천 리를 다니면서도 식량을 싸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백성과 만물이 번창했다”고 했다.
《통전(通典)》에서는 “정관 이후로 태종이 정성을 다하여 다스렸다. 8년, 9년에 이르러 자주 풍년이 들어 쌀 한 되에 4~5전이었고, 말과 소가 들판에 널렸으며, 바깥문을 열면 수개월 동안 잠그지 않아도 되었다. 정관 15년에 이르러서는 쌀 한 되에 두 전이었다”라고 했다.
이때 각국이 신복(臣服)했고 대당의 변경은 모두 안정되었으니, 천하 사람들이 모두 당 태종을 존칭해 ‘천가한(天可汗)’이라 불렀다.
이러한 성세의 기상은 중국 역사상 매우 보기 드문 것이었다.
당 태종, 인덕(仁德)으로 후계자를 세우다
웅재대략(雄才大略)을 지녔던 당 태종은 후계자를 정하는 일에 각고의 심혈을 기울였다. 당 태종에게는 모두 1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중 장손황후 소생은 세 명이었다.
태자 이승건(李承乾, 장남)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총명함으로 이름이 높았다. 여러 차례 장안에 남아 감국(監國)을 맡아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위왕(魏王) 이태(李泰, 차남): 당 태종과 장손황후의 모든 장점을 거의 받려받아 부황의 사랑을 크게 받았다.
진왕(晉王) 이치(李治, 삼남): 너그럽고 인애하며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었으며, 정숙한 성품에 지혜롭고 온화했다.
태자 이승건은 많은 장점이 있었음에도 당 태종은 결국 그를 폐위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연회를 즐기며 방탕하게 놀았고, 태상시의 한 악인(樂人 동성애 대상)을 어여삐 여겨 도성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2. 호인(胡人)의 풍속과 진법 싸움을 좋아해 돌궐 말을 익히고 돌궐 옷을 입었다. 중화를 버리고 이적을 사모하였으며, 등극한 후에는 돌궐 추장의 부하가 되겠다고 내비치기까지 했다.
3. 소인을 가까이 하고 어진 이들을 멀리했다.
이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당 태종은 이승건에게 극도로 실망하여 다른 아들로 교체하려 했다. 이승건은 이를 알고 도리어 정변을 일으켜 부황을 강제로 퇴위시키려 했다. 그러나 정변은 태종에 의해 쉽게 제압되었고, 이승건은 서인(庶人)으로 폄적되었다.
이후 태종은 본래 이태를 태자로 세우고자 했다. 여러 아들 중에서 자신과 가장 닮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음험하고 위험한 마음을 명백하게 드러냈다. 이태는 이승건을 해치려 도모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게다가 위징, 저수량 등 대신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에 태종이 그를 책립한다는 교서를 내리기 어려웠다.
동시에 태종은 만약 이태를 황제로 세운다면 틀림없이 형인 이승건에게 잔혹한 해를 가할 것이라 생각했다. 태종은 더 이상 형제간에 유혈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 중대한 갈림길에서 모두 셋째인 이치를 떠올렸다. 그는 너그럽고 인자하며 대신들에게도 환영받았기 때문에 후계자로 뽑기에 적합했다. 물론 태종은 재능과 덕을 겸비한 이에게 강산을 물려주길 바랐으나, 이 순간만큼은 ‘재(才)’와 ‘덕(德)’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종은 숙고를 거듭하고 다방면으로 분석한 끝에 마침내 인덕(仁德)을 취해 이치를 태자로 세우기로 결정했으니, 이 사람이 바로 훗날의 당 고종이다.
정관 17년(643년) 4월, 당 태종은 진왕 이치를 태자로 세우고 그를 엄격히 가르쳤다.
가령음식을 먹을 때면 밥상을 가리키며 이치에게 말했다.
“밭을 갈고 봄에 씨 뿌려 가을에 거두는 것은 모두 힘겨운 노동을 거쳐야 한다. 오직 백성의 힘을 아끼고 농사철을 빼앗지 않아야 항상 밥을 먹을 수 있는 법이다.”
또 그가 말을 타는 것을 보면 말했다.
“말은 사람을 대신해 걸어 체력을 아껴준다. 만약 적절하게 부리고 그 힘을 고갈시키지 않아야 항상 말을 탈 수 있느니라.”
배를 타는 것을 보면 말했다.
“배는 군주에 비유되고 물은 백성에 비유된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느니라. 너는 장차 군주가 될 터이니, 물과 배의 관계를 생각하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무 그늘 아래서 쉬는 것을 보면 이렇게 말했다.
“이 나무의 줄기가 비록 굽어 있으나 목수의 줄자로 재어본 후에는 베어내어 곧은 목재로 만들 수 있다. 군주가 비록 무도(無道)할지라도 간언을 잘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성명(聖明)한 천자가 될 수 있느니라.”
정관 22년(648년) 1월, 당 태종은 친히 지은 《제범(帝範)》 12편을 태자 이치에게 하사하며 간곡히 경계하여 말했다.
“너는 마땅히 고대의 성철(聖哲)과 현왕(賢王)을 스승으로 삼아야 하며, 나 같은 사람은 절대 본받아서는 안 된다. 위를 본받으면 겨우 중간을 얻을 뿐이요, 중간을 본받으면 그 아래를 얻을 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등극한 이래로 범한 과실이 매우 많았다. 비단과 주옥이 눈앞에 끊이지 않았고, 궁궐과 누대(樓臺)를 자주 일으켰으며, 개나 말, 매의 종류를 멀리서 구하여 이르게 하였고, 사방을 유람하며 대접받느라 번거롭게 고생시켰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범한 가장 큰 과실이니, 절대 나를 본보기로 삼아 따라하지 말거라.”
태종은 또한 다른 여러 아들들에게도 교훈을 내리며 말했다.
“아버지가 자식을 자애로이 아끼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니, 가르치지 않아도 누구나 스스로 안다. 자식 된 자가 충성과 효도를 겸비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만약 가르침을 듣지 않고 예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반드시 몸을 망치는 화(禍)를 부를 것이니, 아버지가 비록 아껴줄지라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예전에 한 무제(武帝)가 죽은 후 한 소제(昭帝)가 즉위했을 때, 연왕(燕王) 유단(劉旦)이 교만하고 횡포하여 미쳐 날뛰며 복종하지 않자, 곽광이 단 한 장의 조서를 내려 몸은 죽고 나라가 없어졌다. 신하 된 자는 이 일에서 교훈을 얻어 조심하고 삼가며, 절대로 유단의 모습을 닮지 말아야 하느니라.”
[역주: 연왕 유단은 한 무제의 아들로 소제의 이복형이었다. 연장자인 자신이 아니라 나이 어린 동생이 후계자가 된 것에 불만을 품고 두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해 본인은 자살하고 봉국이 폐지되었다.]
이후로 모든 황제의 자손들이 법을 공경히 지키며 함부로 횡포를 부리는 자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당 태종에 대한 역사적 평가
649년, 당 태종이 함풍전(含風殿)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2세였다. 유조(遺詔)를 내려 황태자가 영좌 앞에서 즉위하게 하였고, 상례는 한(漢)의 제도를 따랐습니다. 사후 존호는 ‘문무대성대광효황제(文武大聖大廣孝皇帝)’라 올렸다.
실로 담력과 재지(才智)와 무략(武略)을 논함에 있어,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세민은 ‘천하무적(天下無敵)’이라 부를 만했다. 그의 부지런함과 애민 정신, 문도무략(文韜武略 문학적인 능력과 무략)과 용맹은 창업(創業)의 능력과 수성(守城)의 재능을 겸비했으니 확실히 ‘천고일제(千古一帝)’였다. 그의 인덕은 사해(四海)에 미쳤고 위무(威武)는 팔방을 진동시켰으며, 당 초기의 강역은 진(秦)·한(漢) 시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훗날 명대의 사학자 주익(朱翌)은 태종을 찬탄하며 말했다.
“삼대(三代 하·상·주) 이래로 창업과 수성의 문장력을 겸비한 군주는 당 태종뿐이며, 한의 문제·경제·무제·선제도 모두 미치지 못한다.”
비록 성당의 기상은 점차 멀어졌으나, 이 휘황찬란한 그림을 받쳐 들었던 일대(一代)의 군주 이세민은 후인의 마음속에 영원히 존경받는 천자로 남을 것이다.
